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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를 묵상하면서 얼마나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지 모릅니다. 에베소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합니다. 또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는 바울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그 기도를 묵상하고 있으면 정말 우리의 마음이 설레고, 기대와 소망이 가득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놀랍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큰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이 되게 하심으로 오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로 더 이상 죄의 영향력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승리하도록 하는 성령의 인치심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런 은혜는 세상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어떤 소망을 갖게 되는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을 이기고도 남을 만큼 위대한 힘인 것을 성도들이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모든 신실한 자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기도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저와 성도님들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얼마 전 어려움이 있는 목사님과 밤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화중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닥친 상황을 어떻게 인도하실 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대화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원하면서도 얼마나 우리가 평소 안 되는 방향으로 생각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안 되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면 멸망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그 길을 고집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삶은 사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지, 우리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우리의 의지대로 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마다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고, 집을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면 나름대로 피해가지 못하는 자기만의 약점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1-3절은 우리의 인생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원하는 대로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인가가 나를 잡고 갔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이 불행해진 것은 바로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 죄는 지금도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죄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 죄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능동적 삶의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죄의 엄청난 힘에 의해 끌려 다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만 노예가 아니라 성경은 오늘 우리들의 삶도 영적으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지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그런 운명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는 마귀를 의미합니다. 마귀가 우리의 삶을 지배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아왔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직도 우리 안에는 죄가 있고, 죄의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그 모든 것들이 즉시 다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갈등이 있고, 성도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내가 과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게 힘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그냥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사람일수록 예수를 믿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를 믿고 싶긴 하지만, 그냥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왠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옳지 않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지 않으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보통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분들 마음에는 바로 그런 양심의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문제는 스스로 깨끗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좀 더 수고하고 노력하면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긴 하는데, 문제는 그런 노력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성경이 분명하게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 자체에 철저하게 절망적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노력으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 안에 씨앗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의 본성 대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의 말씀이 들어갈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4절 이하를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누군가 나를 싫어합니다. 뒤에서 나를 험담합니다. 그러면 엄청 힘들고 스트레스 받습니다. 누군가 나를 모함합니다. 하지 않은 말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장 좇아가서 따지고 싶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와서 얼굴을 때립니다. 영문도 모르고 뺨을 맞았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용서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수도를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었던 죄인이 긍휼이 풍성하신 그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용서받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일 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감격이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1611년에 프랑스 로레인 지방에서 태어난 니콜라스 헤르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후에 갈멜 수도회에 들어가 평신도 수도사로서 평생을 보냅니다. 거기서 그는 또한 로렌스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을 허드렛일을 하면서 보냅니다. 처음에는 수도원 회계의 잔심부름꾼이었고, 주로 주방 일을 담당했습니다. 수도원에서의 삶을 통해 로렌스 형제는 늘 주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항상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고, 어떤 분주한 일들 속에서도 그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때로 동료 수도사가 나오지 않아 두 배의 일을 해야 할 때는 그의 손놀림을 결코 더 빨라지거나 느려지지 않으면서 평정을 잃지 않았고, 그 모든 일들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삶의 비결이 바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처음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구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서투름에 대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이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들을 하나님을 위해 다 희생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로렌스에게 벌을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더 흡족한 마음을 주시고, 기쁨으로 넘치게 하셨습니다. 이 기쁨과 흡족함이 이상해서 그는 하나님께 자기가 지금 뭔가에 혹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여쭙곤 했다고 합니다. 로렌스 형제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용서와 긍휼의 삶을 살았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충만할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은 기질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입니다.


7절을 보면, 이제 이 놀라운 복음을,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음 세대에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알면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복음의 참 맛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져서 사람들을 찾아가면서 이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전도는 교회의 출석수를 늘리고, 헌금액수를 높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의 동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의 능력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이 복음은 비밀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비밀이라는 말은 가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가려진 복음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고, 복음을 전함으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이 그 복음의 참 맛을 알지 못합니다. 복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능력 있는 것인지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복음이 내 삶을 먼저 변화시켜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복음이 나를 세우고, 복음 때문에 내가 새 힘을 얻고, 복음으로 인해 용기를 얻고, 복음으로 인해 세상을 이기는 경험이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적습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동일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복음의 능력을 맛보길 원합니다. 어려울 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미워질 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맘이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사업이 안될 때 주님을 바라보시고, 논문이 잘 쓰이지 않을 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를 맛보십시오. 우리가 그 은혜를 맛볼 수 있는 것은 그 은혜가 바로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누리는 은혜가 마치 나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랑하게 됩니다. 그 교만은 누구도 꺾을 수 없습니다. 겸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맛보아야 합니다.

마지막 10절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그릇과도 같은 우리를 회복하시고 치유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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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4 열 두 돌의 기념비(수4:1-9) 2007. 4. 1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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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 도피성으로 가라(수20:1-9) 2007. 5. 20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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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 여호와여 구원하소서(시20:1-9) 2007. 7. 2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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