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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지혜로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놀랍고 큽니다. 그래서 찬송가 404장의 작사자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한다.’고 노래합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용서 하셨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의 중심에는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하나 밖에 없는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을 뒤집어 말하면 본래 우리가 그 십자가에 죽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혀서 사람과 동일한 모양으로 오게 하시고,  인간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대신해서 죽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습니다. 내가 이대로 살면 죽겠으니 살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언제 당신에게 나를 대신해서 죽어달라고 했느냐’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분은 위엄 있는 왕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광채 나는 옷을 입고,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단지 인간의 모습으로, 조금도 흠모할 만한 구석이 없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셔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사람들은 그를 몹시 무시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했고,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예수께서 유대 사회의 종교적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이유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주님은 당신이 살리기 위해 오신 그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십니다.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30대 초반의 청년 예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심문합니다. 청년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들을 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고 다닌다는 죄목입니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의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그의 손에는 흐느적거리는 갈대를 들게 하고 왕의 흉내를 내게 합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왕이 입는 붉은 계통의 옷을 입힙니다. 이런 색은 보통 왕이 입는 옷의 색깔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사람들이 엎드려 절을 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예수님은 결국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오전 9시였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까지 십자가 위에서 달려 있었습니다. 낮 12시가 되었을 때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오후 3시까지 그 어두움은 계속 되었습니다. 오후 3시쯤 주님은 크게 소리 지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의 의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절망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저주를 대신 받으십니다. 여러분과 나의 죄를 위해 죽음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외치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고통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고통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겪으신 이 고통은 사실 사람들로부터 당한 조롱과 핍박과 비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로부터도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무시당하고, 채찍에 맞으시고, ‘유대인의 왕이여’ 하면서 희롱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그 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덜어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처절히 울부짖으실 때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계속적으로 조롱합니다. ‘엘리 엘리’라는 말을 듣자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 ‘자!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며 조롱합니다. 그들은 헬라어나 아람어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못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예수님의 간절한 부르짖음조차도 조롱거리로 바꿔버렸습니다.

50절에서 예수님은 잠시 후에 다시 한 번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는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외치신 말씀을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헬라어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는 단 한 단어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tetelestai'(테텔레스다이)입니다. 이 tetelestai는 승리자의 외침입니다. tetelestai, 다 이루었다. 이것은 자기의 과업을 완수한 사람의 외침입니다. 엄청난 고통과 아픔 가운데서 드디어 승리한 사람이 이렇게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암흑을 뚫고 드디어 광명의 빛으로 나온 승리자가 영광스런 면류관을 쓰고 외치는 것이 바로 tetelestai, 다 이루었다 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을 땐 아무 소리도 외칠 수 없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피를 쏟은 후에 죽도록 되어있습니다. 보통 만 하루 이상 지나야 죽게 됩니다. 오랜 걸리는 경우는 2-3일까지 십자가에 달려 있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단지 6시간 만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너무도 심한 채찍에 맞으시고,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죽을 땐 정말 아무 소리도 지를 수 없는 상황이지만, 주님은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죽으셨습니다.

이 외침은 예수님께서 더 이상 죽음의 세력에 머무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떨어져나가는 상황이 아니라 친히 당신이 사람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완수하시는 순간에 크게 외쳤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승리자로서, 세상 죄의 권세를 이기신 정복자로서 승리를 외치면서 그의 생명을 끝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대신해서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이를 통해 주님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죽음의 세력을 영원히 잠재우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은혜로 영원한 멸망으로서의 죽음을 더 이상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그리고 우리가 사는 동안 주님께서 재림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한,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그런 죽음은 아닙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두려움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하나의 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천국에서 누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것을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죄의 대가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로 인한 사망으로 인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죄는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한 죄책감이 있고, 죄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한 절망이 우리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절망이 우리에게 찾아온다고 해도 그것은 실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절망을 이미 주님께서 다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가짜에 우리가 속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십자가의 절망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주저앉게 합니다. 십자가의 절망으로 위장한 절망이 우리에게 엄습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주님께서 경험하신 고통, 즉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고통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신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 나의 미래의 불투명함,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듯 한 절망감,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관심과 하나님의 외면하심처럼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의 고통,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고통은 예수님께서 다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경험한 것과 비슷한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참 승리란 하나님조차도 자신을 버렸다고 느낄 만큼 처절한 삶의 자리에서 발견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가진 마지막 신앙의 자리조차도 무너져 내렸다고 느끼는 그 순간까지 우리를 내려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단의 시험이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강하게 신뢰하게 하시기 위한 연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믿을 때 이런 일들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본문에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는 지성소이고, 다른 하나는 성소입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일상적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고, 지성소는 일 년에 한번 대제사장 혼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정결하게 자신을 준비하지 않고 지성소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런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하나님은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그의 옷에 방울을 달게 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혼자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내면 그가 움직이면서 방울 소리가 들리게 되고, 방울 소리가 들리면 대제사장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이 그 안에서 죽게 되면 그의 시신을 수습할 방안이 없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허리에 끈을 묶어 달린 끈을 잡아 당겨 시신을 끌어냅니다. 그만큼 지성소는 위엄 있는 곳이고 거룩한 곳입니다. 아무나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이 예수님의 운명하시는 시간에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일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제사가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으로서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만 정결함을 얻는다고 했던 구약시대의 모든 규정은 그 의미만이 남아있고 그 모든 제사는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친히 제물이 되셔서 단번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대신한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아니건 사람들 마음 안에는 절대자로부터 오는 진노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작은 사건 앞에서도 혹시 이것이 나에게 오는 죄의 대가가 아닌가를 염려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인간 심연이 깊이 박혀 있는 본성입니다. 사람들이 불행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런 내적 불안과 염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절대적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믿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죄로 인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난은 진짜에서 가짜를 분별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입니다. 산에서 광석을 캐서 용광로에 끌게 하고 불순물을 제거할 때 순도 있는 금을 캐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고난의 과정을 거쳐 순도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난은 주님의 영광을 맛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형상을 더 닮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을 알기 전에 죄로 인한 두려움에서 당하는 고난과는 다른 것입니다. 죄를 두려워 마십시오. 고난의 자리에서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를 절망케 하고 낙심케 하는 고난의 자리에서 이미 모든 죄 값을 담당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승리의 외침을 외칠 수 있습니다. 'tetelestai' 주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부활의 사건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순간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며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고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 즉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며 설명하기도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신학자들조차도 설명하기를 힘들어 합니다. 이 사건은 두 번 반복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많은 무덤이 열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이 다시 부활한다는 약속의 표징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의 부활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몸이 부활한다는 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죽어도 삽니다.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는 영원한 실패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해도 그 죽음은 예수님을 영원히 무덤이 가둬놓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의 불의와 불공평함으로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리고 우리가 설령 사회적인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심각한 손해를 보고 때로는 생명까지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한 손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이 부활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땅에 사는 누구도 부활을 경험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 일회적인 사건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많은 무덤 문이 열렸던 것을 예표로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믿음을 가지도록 촉구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믿음이 우리를 이 땅에서 승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성도는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본문에 이런 상황에서 응답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백부장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사건을 보면서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들은 예수가 죽는데 가장 근접한 곳에서 그 일을 집행했습니다. 그들은 이 일에 주동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악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최초의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아직도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아직도 2000년 전 한 유대 청년의 죽음쯤으로 받아들이는 분이 있다면 이제 그 분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길 바랍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 값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죄의 값, 즉 사망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여인들입니다. 54-56절에 보면 몇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 생전에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것은 멀리서나마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데, 그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당시 사회적으로 큰 힘이 있던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주님께서 마지막 죽으실 때까지 그 곁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비록 가진 것이 없더라도 우리가 비록 가진 지식은 없고, 가진 재물은 없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함께 느껴보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주님 곁에서 기도로 그 분 곁에 서 있고, 찬송으로 그 분을 높여 드리고, 말씀의 순종으로 그 분의 삶을 이 땅에 다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아리마대 부자 요셉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산헤드린이란 당시 유대 사회에 단지 71명으로 구성된 최고의 의결기관입니다. 여기에는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 서기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중에도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로 구성된 기관입니다. 그는 신분도 높고, 부자이기도 하고, 권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지위가 높고, 물질이 많고, 권력도 있는 사람은 본래 그것을 지키는 위해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보다 외부의 압력을 더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그가 평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지라도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를 위해 준비해놓은 새 무덤을 주님께 드리는 결단을 합니다. 그는 비록 많은 물질이 있었고, 사회적 신분이 높았고, 놓기 힘든 권력도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더 중요한 분임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는 많은 물질이 있었지만, 물질의 종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높은 명예와 지위가 있었지만, 그것에 자기 삶을 종속시킬 만큼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할 만큼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내가 아직까지 주님을 알지 못했다면 오늘 이 시간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떻든,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사형 집행하던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자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처럼 주님은 오늘 우리들을 부르시고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우리가 비록 드릴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약한 존재라도 예수님의 주변에서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여인들처럼 그렇게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주님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는 성도, 하나님께 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로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쩌면 아리마대 요셉처럼 그렇게 부요하고,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는 사람이라면 혹시라도 그 부요함과 지위와 명예가 지금 나의 주인이 되어 나를 나의 원하는 대로 인도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 없는 곳으로 인도하지 않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생명이시며 주인이십니다. 주님의 장사지낼 무덤을 제공하는 이 멋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봅시다. 그런 멋진 사람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물질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명예의 종이 되지 마십시다. 지위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물질과 명예와 지위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는 자가 진정으로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쓸 만큼 가지고 살면서도 누릴 만큼 명예도 있으면서  더 큰 명예, 더 많은 물질을 구하기 위해 인격도 버리고, 인간관계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의 심정을 보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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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 인자를 파는 사람(마26:14-29) 2007. 3. 1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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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 징계를 통한 강한 믿음(히12:5-8) 2007. 4. 22 북한선교후원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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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1 은총을 받은 자녀(삼상2:26) 2007. 5. 6 어린이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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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 도피성으로 가라(수20:1-9) 2007. 5. 20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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