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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에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며, 가장 행복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목사가 인사하라고 하니까 하지만, 이 말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구원, 영생, 천국과 같은 말들은 결코 현재의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았다고 말할 때 그 구원은 이다음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행 열차표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생도 죽은 후 다시 안 죽지 않는다는 시간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도 역시 같은 개념입니다. 구원, 영생, 천국, 생명과 같은 말들은 미래적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은 죽은 후에 얻는 것이 아니라 사실 지금 얻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지금 우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처음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했습니다.

영생이란 사실 영원히 산다는 시간적 개념(eternal life)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real life)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진정한 생명을 얻을 때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진짜 생명은 영원히 사는 생명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자기 인생을 드렸습니다. 영생의 기쁨 때문에 성도들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어 놓습니다. 이 천국의 감격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어린아이가 예수께로 나오는 사건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린아이가 오는 것을 막고 꾸짖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어떤 한 청년이 와서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심한 시대였습니다. 사회적 귀족이 있고, 또 종교적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온갖 갖가지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주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또한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여자들도 당시로는 천대받는 계층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여자들도 주님 앞에 나오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은 척도 안하시자 제자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이 여자의 소원을 들어주고 보내소서 라고 부탁합니다. 비록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라도 예수님께로 오는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천대받는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녀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기도를 받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아이들이 오는 것을 가로 막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어린아이까지 예수님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어린아이를 환영하면서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자를 못 들어가게 막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나타나던 일들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에 보면,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지금 제자들이 바로 동일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주님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어린아이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내가 혹시 그렇게 목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주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로 인해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주님의 뜻에 역행하는 일들을 계속적으로 자행하여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천국 문을 막고 자신도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굳이 주님 앞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올 자격도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시 받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나와도 별로 도움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천국은 바로 그들의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을 계속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엄청난 긴장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는 과정에서 수많은 반대에 부딪치시고 위험을 감당하셔야 했고, 계속적인 도전에 대응하셔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부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28장까지는 불과 만 3년이 넘지 않았습니다. 그 삼년 동안 주님은 수많은 반대세력들을 만나면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으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인해 주님은 끊임없이 도전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위해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필요 없어 보이는 사람, 수고해도 별 소득이 없어 보이는 사람. 전도해도 교회에 큰 보탬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서 사역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당신의 삶을 허비하셨습니다. 마치 어느 여인이 향유 한 옥합을 깨트려 주님의 머리에 부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도전의 결과로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왜 주님께서 그런 고난을 감당하면서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면서 그 길을 걸으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길이 진리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인간들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은 그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역설입니다. 주님은 인간에 의해 반대를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면서 결국 인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가신 길이 복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주가 지나면 우리교회가 30주년을 맞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교회설립 30주년 기념예배를 드립니다. 30주년을 맞는 우리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득 없어 보이는 이들을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주님께 데려오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온갖 반대와 방해를 무릎 쓰고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비록 주님께서 지신 동일한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도 그 길을 가고자 결단하는 것이 바로 30주년을 맞는 우리교회의 길입니다. 왜 그래야만 합니까? 그 길이 바로 진리의 길이요, 그 길이 바로 영생의 길이며,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한 젊은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그는 영생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네가 선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묻는 말이냐?’라는 뜻입니다. 선하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렇게 툭 질문을 던져놓고는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젊은 청년이 매우 자신 있게 다시 묻습니다. ‘어느 계명입니까?’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나열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청년이 자신 있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더 말씀해 보십시오 하는 당당한 태도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젊은 청년은 자신의 영생에 대해 질문했는데, 예수님의 결론적인 답변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젊은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의를 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이고, 간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도적질하지 않고, 법정에서 거짓 증거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정말 철저하게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네 소유를 팔아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과 이 청년이 생각한 것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영생이란 혼자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의 시선이 가난한 자에게로 돌려질 때 하늘의 보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아볼 때 거기에 진정한 영생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천국은 바로 거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시자 삭개오는 너무 기뻐서 주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후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요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가 보이는 반응이었습니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한 자의 반응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내가’ 그는 자신의 힘으로 영생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이웃에 대한 관심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영생에 대한 관심만 있습니다. 그의 종교적 노력은 무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웃의 아픔도 보이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 설립 30주년을 맞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웃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낮은 자를 보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낮아져야 합니다. 어린아이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그 맑은 영적 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와 같이 낮아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비천한 자를 돌아보는 낮아짐이 필요합니다. 낮은 자를 보려면 나의 자세를 낮춰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 그냥 서 있는 자세로는 낮은 자의 입장에서 볼 수 없습니다. 낮아지되 그 사람의 자리까지 낮아져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릎을 꾸부리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나에게는 불편한 일입니다.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21절)

성도님들은 우리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 30년 동안 우리교회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혹 나가서 교회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믿음을 먼저 살펴보셔야 합니다. 우리교회 참 좋은 교회입니다. 우선 목사가 좋고, 장로님들도 좋고, 권사님도 좋고, 집사님들도 훌륭한 분들입니다. 성도님들도 참 좋으신 분들입니다. 찬양도 뜨겁고, 젊은 분들의 활기가 우리교회만큼 있는 곳도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도 강렬합니다. 그 주된 증거가 바로 이곳에 계시다가 돌아가시는 분들이 간증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세례를 받고 가시는 분들의 고백은 눈시울을 뜨겁게 할 만큼 감동적입니다. 플로리다에서 대학을 다니는 어느 학생이 그곳에서는 신앙생활을 마땅히 할 만한 곳이 없어 안타까워하는데, 우리교회와 이곳 UVA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이곳 UVA로 transfer를 해서 와야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교회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많은 좋은 평가가 있지만, 그 중에 참 아픈 마음으로 들을 것이 있습니다. 어느 분이 우리교회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신이 여러 교회를 다녀보았는데, 다른 교회는 10명이 모이면 그 중에 8명은 평범한 사람이고, 2명은 잘 난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8명은 잘난 사람이고, 2명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자신은 평범한 사람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느끼시는 교회의 이미지입니다. 저에게 그런 표현으로 말씀해 주신 분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상관없습니다. 그 분 지금 우리교회 나오지도 않는 분이십니다. 무시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젊은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가난한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그를 가난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그를 못살게 하도록 저주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그 한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미안한 부탁을 드립니다. 교회 안에서 ‘박사님’이라는 호칭은 삼가 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삼가 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명함을 건네는 일도 가급적 삼가 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으로 들어가시는 분에게는 명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샬롯츠빌에 거주하기 위해 오신 분에게는 명함 대신 교회 주소록을 주십시오. ‘여기 제 이름이 있습니다. 주소는 여기에 있고요. 전화번호도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 가지면 저 뿐만 아니라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샬롯츠빌 한인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영생을 누리는 길입니다. 영생은 나 혼자 나의 의를 쌓으므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교회 설립 30주년을 맞으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워져가는 참된 교회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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