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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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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96년 5월 6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노량진교회에서 서울 남 노회에서 주관하는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licence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목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카드도 없습니다. 물론 요즘은 목사안수증명서라는 서류를 뗄 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목사로 안수를 받을 때 노회로부터 받은 것은 ‘안수패’ 하나였습니다. 안수패는 목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사안수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하나 만들어 주는 것뿐입니다. 요즘이야 세상에서 누구를 믿고 산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목사조차도 어떤 증명이 필요한 시대가 되어 갑니다. 마치 목사 증명서가 필요한 시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총회장 직인이 찍힌 증명서를 요청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함께 있었던 증인 세 명을 요구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가 목사처럼 생겼고, 목사처럼 말하고, 조금 겪어 보니 말 안해도 ‘목사님 같네요’ 혹은 ‘어쩐지 목사님이셨네요’ 라고 한다면 얼마나 감사할까요? 제가 우리 샬롯츠빌 한인교회에서 사역을 한 지가 2년 6개월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혹 성도님 중에 누군가가 저에게 ‘당신 진짜 목사인지 알아봐야겠으니 목사 증명서 좀 보여달라’고 한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장 보따리 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런 소리를 들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당신이 만약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면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든지, 아니면 하늘로부터 어마어마한 능력을 내려서 로마 군인들을 불사르든지 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시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신지가 이미 2년 어간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 주님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앉은뱅이를 고치셨고, 풍랑을 잔잔케 했으며,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저 같으면 보따리 싸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고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자연의 이치는 징조만 보고도 잘도 압니다. 저녁의 날씨를 보면서 다음 날의 기상 현상을 예측할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는데, 그들은 도무지 시대의 징조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증명을 해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은 주님께서 보여줄 마지막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그 의미를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셔서 무덤이 삼 일간 묻히셨다가 다시 부활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BC 9세기에 살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당시 적대국이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 명령을 거절합니다. 죄가 가득 찬 니느웨가 그냥 그대로 멸명하는 것을 요나는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가던 길에 요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의 밥에 되어 그 물고기 배 속에서 삼일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물고기가 요나를 니느웨에 토해내게 해서 그곳에서 요나는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이 없어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이로 인해 니느웨는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습니다. 그 회개로 인해 니느웨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은 바로 그 때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 삼 일간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주님도 무덤 속에서 삼 일간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거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제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갈 때까지 가보면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다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요나는 삼 일간 물고기 배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그들에게 니느웨의 멸망을 외칠 때는 자신이 물고기 배 속에 있었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즉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이 전하는 말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 자신이 물고기 배 속에 삼 일간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요나의 표적’은 요나 자신과 요나가 말하는 하나님의 메시지 자체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그가 물고기 배 속에 삼 일간 들어갔었던 사건이 아니라, 그가 전한 메시지와 예언자 요나 자신의 출현이었습니다.

내가 표적으로 보여줄 것은 요나처럼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역설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실은 지금 너희 앞에 서 있는 예수님 자신과  그가 전하는 말씀으로 충분한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회개할 수 없으면,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으면 소망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과 다시 부활하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것조차도 거짓으로 몰아갔습니다. 결국 멸망과 심판 밖에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는 말씀은 최종적이고 종말적 표현입니다.

그들은 날씨는 예측할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면서도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란 누구입니까? 그들은 당시 가장 대표적인 종교계층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로 보수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뿐만 아니라 전통을 중요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천사와 육체의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정부를 배격하는 성향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에 비해 사두개인들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했고, 로마 정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종교적 귀족이었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이 두 종파와 정당보다 더 큰 이질성을 가진 단체를 찾는 것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매우 다른 성형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려고 하면서 그들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고,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인들 중에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종교인의 죄’를 봅니다. 그들은 지금 종교적 오만과 허영을 드러냅니다. 가장 높은 종교적 삶을 살아간다는 교만과 우월의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종교적 행위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익숙해 있고, 기도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찬송에 익숙해 있습니다. 믿음이 부족함으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말로 종교적 위안을 가장해, 자신의 허세를 과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으로, 낮아짐으로 세우는 영적 몸부림이고, 영적 전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익숙해지는 것은 종교적 행위일 뿐입니다. 익숙해지는 것 안에는 습관과 외식과 형식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익숙해지고 나면 다시 부족하고, 뭔가 이룬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나면, 다시 자신의 허물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종교적 행위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것을 더 편하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주일만 되면 자연히 발걸음이 교회로 옮겨집니다. 찬양만 하면 생각 없이도 손이 위로 올라갑니다. 눈만 감으면 자신이 생각해도 놀랄 만큼 유창한 기도가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주일날 교회 안 나오면 오히려 어색하고 불편함을 느낍니다. 종교적 삶에 익숙해져 갑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그렇게 변해가는 나의 모습이 신앙적으로 성숙을 향해 가는 걸음일까요?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 당당하게 지적합니다. ‘신앙이란 그런 게 아니야!’ ‘신앙생활이란 이렇게 하는 거야!’ ‘그것은 틀렸어!’ 그렇게 당당합니까? 그렇게도 자신 있습니까? 익숙해진 종교적 행위가 마치 자기 자신의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고 거침없이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는 악함이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종교인의 오만입니다. 종교인의 허영입니다. 습관화되고 익숙해진 종교적 행위 위에 잘못된 자기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 신앙과 신학의 잣대 위에 남을 판단하고, 급기야는 메시야로 오신 주님을 향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감히 협박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많은 표적과 이적, 사랑, 긍휼의 모습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할까요? 그들이 믿지 못하는 가장 분명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권위를 허물어 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이 아니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될수록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체면, 사회적 지위, 가르침이 모든 것들이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위태롭습니다. 자신들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사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붙들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도전합니다. 당신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도전적인 질문으로 자신들의 불안한 마음을 숨겨 버립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치관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종교적 삶에 익숙해지고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으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의 자리는 어떤 면에서 늘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주님 안에서만 평안을 누리고, 주님 안에서만 자유 한 것입니다. 그 평안은 자신의 지위로부터 얻는 평안이 아닙니다. 그 자유는 종교적 행위에서 얻는 자유가 아닙니다.

대학부 학생들이 요즘 새벽마다 열심히 나와서 기도합니다. 몇 몇 학생들의 고백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하다 보니 경쟁적으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새벽기도회에 가는데, 내가 안 갈 수 없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자유하지 못합니다. 경쟁적인 마음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 나오는 사람을 함께 새벽기도에 오도록 권면하는 과정에서 그 권면이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고, 그 부담은 그를 정죄하는 식으로 전달되는 것 같고, 스스로는 신앙적 우월감을 갖게 되는 것 같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처음은 순수하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덧 무엇인가 그 믿음의 행위 위에 덧칠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벗겨 내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자신의 신앙적 행위가 종교적 습관과 공명심으로 바뀌고, 그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의식으로 발전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괴로워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나의 신앙이 또 하나의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되는 것을 보면서 다시 나는 추락하고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 아래 내려와 보니 다시 나를 받아주시는 주님이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심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갑니다. 이 때 주님께서 배 위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 말씀의 뜻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드린 말씀과 같이 전통과 관습, 종교적 행위에 길들여져 있는 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이 떡을 잊지 말고 가져오라는 말씀으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주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이 먹지 않았느냐? 그리고 또 남은 것을 주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지금 먹을 것에 대해 하는 말이 아니다.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

문제는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입니다. 우리도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적 습관과 전통에 길들여질 수 있습니다. 익숙해져 가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익숙해질수록 교만과 오만이 생기고, 시비를 가리려는 의지만 늘어갑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지리를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입니다. 저들의 교훈은 누룩과 같아서 너무도 빨리 사람들의 생각 속에 침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을 신앙 안에서 깨어있게 하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종교적 삶의 틀 안에 가둬 버립니다. 그 누룩은 어느 덧 제자들 마음 안에도, 그리고 오늘 우리들 안에도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편안하고 싶은 마음을 틈타 들어옵니다. 종교적 신분이 마치 나의 신앙을 드러내는 듯 위장합니다. 마치 나는 저들의 무리들 가운데 속하지 않은 것처럼 슬쩍 자신을 포장하고 분리시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떡의 문제는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은 바로 주님께서 제자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그 문제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성도의 근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힘써야 할 것은 저들의 누룩을 주의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교훈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길들여진 종교인의 삶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습관과 전통은 생명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연수는 우리를 전통에 고착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 면에서 우리 교회가 30주년을 맞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도전입니다. 지난 30년간 우리 교회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그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삶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지기보다는 신앙적 성숙을 향해 오늘도 몸부림 치고 자신을 주님 앞에 내려 놓는 성도가 됩시다.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참된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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