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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 들어가 마태가 준비한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마태의 잔치’라고 해서 매우 관심을 끄는 장면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 당시에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차별이었습니다. 귀한 사람도 있고, 천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신분의 차별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당시는 매우 노골적이고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공식화된 사회였습니다. 마태의 직업은 세리였고, 세리란 세금을 걷는 직업이었는데,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세리 직업은 로마의 하수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는 당연히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고 거둬들이는 세금의 일부는 자신을 위해 사용하였기에         주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시 창기들이나 일반 죄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에게는 재판관이 될 수 있는 권한도 없었고, 재판장에 증인이 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회당의 출입도 금지되었었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된 사람입니다. 돈을 모으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그 일 외에는 다른 사회적 활동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부류의 사람들 중에도 재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세리들 주변에 모여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세상사는 것이 그렇게 돌고 돌면서 사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세리 마태를 보시고는 그를 부르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직업이 세리인 마태를 당신의 열 두 제자 중 하나로 세우셨습니다. 10절에는 자신을 부르신 주님의 은혜가 놀라워서 자신의 집에 잔치를 배설해 놓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자신의 친구들인 세리와 다른 죄인들을 초청했습니다.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회적인 관행과 전통을 너무도 쉽게 넘어서는 주님의 행태가 기존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인들의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비난합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11:19, 눅7:34)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비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벌어지는 이 잔치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마태가 주님의 초청을 받고 응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좇으라’하시니 마태가 바로 ‘일어나 좇으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비난받는 세리였던 마태, 돈은 많이 모았을지 모르지만, 평생 비난받는 직업을 가진 자로서 그의 심리적, 정신적 눌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나쁜 쪽으로 그의 성격이 더욱 강화됩니다. 그래서 한번 삐뚤어지면 여간해서 그의 길을 돌이킨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리 마태가 주님의 초청을 받고 응답을 했습니다. 마태가 변화되고 있습니다. 세리장이였던 마태에게 변화의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마태가 변화된다면 그의 수많은 세리 친구들과 죄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흥분할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세리 마태는 자기 집에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친구들을 다 모았습니다. 자기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온 새로운 변화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준비해 놓고는 예수님을 초청했지만, 또한 친구들도 초청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라고 해야 모두가 다 죄인이며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잔치의 분위기는 완전히 엉망진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나운 말, 그들의 입에서 내뱉는 더럽고 천박한 언어가 오고 갔을 것입니다.

자! 이런 분위기를 상상해 보십시다. 그런 분위기를 바라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심지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못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대로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당시 바리새인들과 경건한 유대인들은 금식을 매우 일상적으로 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경건을 드러냈고, 그런 경건으로 인해 자신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규율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만 세리 마태의 집에서 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흥청망청 노는 모습으로 비춰졌습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그 이면에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돈만 알고 민족도 팔아버리고 인간쓰레기와 같은 세리의 집에서 죄인들이 모여 온갖 더러운 말들로 가득 찬 이런 자리에 주님께서 계신다면 되겠습니까? 하는 질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사람이지, 관행이나 관습, 혹은 전통이 아닙니다. 전통이나 관행이 사람들을 옭아매는 사슬이 된다면  언제든지 그런 것은 끊어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사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깨어진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상처받고 고통 받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상 쓰고 살아가던 인생, 왜 사는지 모르고 살아가던 사람, 매사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삶의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자기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미 있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두 사람이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 거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온전해 지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치던 돼지들이 모두 바다로 뛰어 들어가 몰사됩니다. 그것을 본 마을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지역에서 나가기를 요청받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돼지만 보였습니다. 사람이 온전하게 된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 마을에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돼지의 죽음으로 손해 본 사람들이 예수로 하여금 당장 그 지방을 떠나도록 종용하였습니다. 생명이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님도,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도 금식해야 하지 않냐 고 말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돼지를 잃어버려 더 이상 주님으로 하여금 그 지역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떠 내미는 가다라(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이나 동일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전통을 고수하는데 관심을 가지면서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돼지 떼에 관심을 가지면서 귀신 들려 고통 하던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주님을 향해 말하기를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15절에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의 친구들을 말합니다.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신랑의 결혼 잔치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슬퍼하며 금식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행동입니다. 그 때는 마땅히 기뻐하며 축하하고 헹가래를 쳐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한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잔치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오실 때 우리는 보통 무슨 마음으로 오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올 때는 잔치 집에 오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껏 신랑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마음껏 그분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6절과 17절 말씀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낡은 옷에다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로 버리게 됩니다. 옛날에는 포도주를 병 속에 저장하지 않고 가죽 부대에 저장했습니다. 새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넣을 때 새  포도주는 완전히 발효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죽 부대에 들어간 새 포도주는 그 안에서 가스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가스로 인해 가죽 부대 안에는 압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새 가죽 부대는 신축성이 많기 때문에 부대에 압력이 가해져도 손상이 없습니다. 반면에 낡은 가죽부대는 굳어졌고 신축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포도주를 넣어 그 안에서 발효가 되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전통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습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적 체계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오래된 낡은 부대와 같이 새로운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일 만큼 신축성이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배척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주님을 마을 밖으로 나가도록 종용했습니다. 세리 마태가 변화되어 주님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받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오늘의 말씀 후반부에 나오는 두 가지 사건에서 성경은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은 한 직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직원의 정확한 신분은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은 당시 회당을 책임진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 정통주의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를 경멸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딸을 살리기 위해 의사란 의사에게서 모두 찾아가서 치료를 부탁했을 것입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고치려고 시도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최후의 수단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는 그의 생각을 접어야했습니다. 그의 전통과 관습과 율법에 붙들려 있던 모든 생각과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즉 그는 새로운 부대를 준비한 것입니다. 오래된 부대를 가지고는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이 여인도 역시 많은 의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의원들로부터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고, 아무 효험이 없었고, 병증은 더 중하여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겉옷 자락만 만져도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전력을 볼 때 이것은 상당히 좋은 믿음 같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미신적인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아무 거나 붙잡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의 믿음은 연약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22절).”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 안에 들어가서도 계속해서 부풀어 오릅니다. 다 부풀어 오를 때까지 밖에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가죽 부대 안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죽 부대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새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순간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단 한 번이라고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했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다시 나가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낡은 가죽 부대로 남아있다면 아마도 낡은 가죽 부대로서의 우리 자신은 날마다 부풀어 오르는 복음의 역사로 인해 터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새 가죽 부대를 준비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새 가죽 부대를 준비하기 위해 성도는 첫 번째,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확신 가운데 살아갑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자기 확신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생각을 주님의 말씀 앞에서 점검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불완전함을 느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내 생각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새 가죽 부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단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이 순결하다거나 욕심이 없다거나 죄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복합적이거나 외식적인 두 마음이 아닌 단순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동기가 순수하며 생각이 진실 되며 온전한 마음을 가진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순수한 동기로 했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 안에 또 다른 동기가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이런 것은 청결한 마음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할 때 생기게 됩니다. 오직 그것만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알 때 단순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세 번째,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음으로 새 가죽 부대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나쁜 것 같지만, 사실 고난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여기서 의란 마음이 청결함에서 오는 성품입니다.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할 때 가지는 품성이 바로 의입니다. 그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직원, 회당장은 자기 딸을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믿음 없음으로 인해 당한 고난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도 여러 의원을 찾아갔지만, 돈만 허비하고, 고생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을 더욱 가난해졌습니다. 그는 정말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처음에 그녀는 누구에게 간들 이 병쯤이야 못고치랴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는 더욱 더 절망하였고, 그런 절망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녀의 마음 안에서 움직이게 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진다면 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미신적이지만 철저하게 주님을 의뢰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어떤 가죽 부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담을만한 새 가죽 부대를 준비하셨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엇이든 들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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