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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서 로마서의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로마서는 마지막이 다른 서신서와 다소 다르게 끝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에서 끝을 맺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 마지막에는 항상 축도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너희들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보통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는 그것이 15장 33절에 나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그리고는 다시 16장을 쓰고 있습니다. 그에게 쓰고 싶은 말이 다시 생각난 것입니다. 그리고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문안인사였습니다. 1-16절까지 무려 26명의 사람의 이름을 열거하며 문안 인사를 전하도록 부탁합니다.

바로 바울의 마지막 문안인사를 통해 우리는 당시 로마의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과연 뭔가 하는 점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바로 복음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되는 구절은 로마서 1장 16-17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리고 그 복음에 대해 1장부터 15장까지 길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없었다면 기독교가 가능했을까 라는 말이 있을 만큼 로마서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왜 오늘 인간에게 필요합니까? 그것을 로마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관계의 파괴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적어도 네 가지 차원에서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셋째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나와 자연과의 관계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세상에 잘 알려진 두 사람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미국의 제 38대 대통령이었던 Gerald Ford 대통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라크의 전 대통령이었던 후세인이었습니다. 후세인은 어제 아침 형장의 이슬로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후세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왠지 마음 한 구석에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통치를 위한 명분으로 무자비하게 자기 백성을 죽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지구상에 악을 응징하겠다는 단호한 결의로 그에게 사형을 확정하고 사형이 언도된 지 단지 나흘 만에 그를 교수대로 보낼 수 있는 담대한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적 논쟁을 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인간의 마음 안에 감추어있는 죄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안에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고는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 몸을 가렸습니다. 잠시는 가려졌지만, 햇볕에 자꾸 돌돌 말아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의 죄도 사람의 힘으로 가려지지 않습니다.

후세인의 얼굴을 선입견 없이 보면 평범한 아저씨 얼굴입니다. 그런데 그런 얼굴 뒤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잔인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럴 명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평범하고 아저씨 같은 얼굴 안에 그런 잔인함이 있었다면 과연 내 얼굴에 감췬 내 이면의 모습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니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악을 모두 응징해야 한다고 했을 때, 과연 누가 응징의 주최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악을 응징할 수 있을만큼 악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정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그의 얼굴을 통해 내 얼굴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악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이 내 안에도 있음을 보지 못한다면, 이 응징은 또 하나의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려고 아담과 하와 때부터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번번히 그 시도는 무화과나무가 말려 올라가듯이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악은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다툼과 미움과 증오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로인해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열등감도 있고, 우월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남과 비교합니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들도 미워합니다. 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너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것이 부럽고, 그의 것을 시기하고, 해 준 것 없이 잘사는 그의 모습이 싫어집니다. 갈등하고 분쟁합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만나놓고도 키 재기를 합니다. 네가 잘 났는지 내가 잘 났는지 수없이 재고 또 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고 나니 로마서는 자연까지도 탄식한다고 말씀합니다. 한심한 인간을 보면서 탄식하는 자연의 소리를 듣습니까? 인간의 탐욕과 욕심으로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고 파괴하는 행위, 그리고 그로 인해 수많은 재앙과 오염, 질병을 가져옵니다.

오늘날 이 땅에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깨어진 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이 깨어진 관계를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분열된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해서 자신을 사랑하도록 하고,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며 더 나아가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잘 관리하도록 도전받게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능력을 함께 맛보고 나누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보 4면 윗부분에 이런 문구를 오늘부터 넣었습니다. ‘복음, 교회의 절대 가치’ 교회의 절대가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이 바로 교회의 절대가치입니다. 교회는 복음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복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맛 잃은 소금과 같고 말 아래 감취인 빛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16장에서  복음으로 변화된, 혹은 복음으로 변화되어 가는 로마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1절부터 16절까지에 보면, 사도 바울이 무려 26명의 사람들 이름을 들면서 문안인사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들면서 인사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문안인사를 하는 것을 잘 보면 그 안에 로마교회의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로마교회는 여성이 존중받는 교회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여성의 이름이 적어도 6명이 나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8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6명이라는데 동의합니다. 뵈뵈(1), 브리스가(3), 마리아(6), 유니아(7), 루포의 어머니(13) 그리고 아마도 네레오(15)가 자매였습니다. 당시 사회상황에서 여성은 매우 천대받는 계층이었습니다. 사람 수에도 들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바로 그 때 로마교회에서는 여성들의 존재가 남자와 동등하게 존중받았습니다. 하나도 차별하는 흔적이 없었습니다. 여성의 권위도 높여줘야 한다는 말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살았습니다. 스스럼없었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여자로 뵈뵈가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바울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 뵈뵈를 천거합니다.겐그레아는 바울이 로마서를 썼던 고린도에서 가까운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써서 바로 여자 집사였던 뵈뵈를 통해 로마교회로 보냈습니다. 그를 보내면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부탁합니다.

또한 3-4절에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있습니다. 이들은 부부입니다. 브리스가가 부인이고, 아굴라가 남편입니다. 신기하게도 이들 부부의 이름은 항상 같이 신약성경에 6번 나오는데, 그 중 4번은 부인의 이름이 먼저 언급됩니다. 당시 상황으로 일상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만큼 브리스가의 역할이 더 주도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브리스가는 당시 귀족출신이고, 아굴라는 그 집의 노예였는데, 그들이 예수를 믿고 신분의 차별을 극복하고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7절에 ‘유니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녀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들 사이에 평판이 좋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녀를 매우 존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사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더 나옵니다.

얼마 전에 설교하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라는 말씀은 아내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남편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 일에 온 힘을 써야 합니다.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 말에 또 여자들이 은혜를 받지 마시고 남자들이 받으셔야 합니다.

성경이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도록 했다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그런 내용들이 나온다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우리는 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혹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것처럼 쓰였다면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가정으로 돌아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부관계는 전보다 분명 많이 평등해졌습니다. 하지만 평등해진 것이 곧 행복해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평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함으로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기쁘게 하는 남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걸음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로 하여금 왕비가 되게 하십시오. 이 설교를 듣고 또 집에 가서 아내가 남편에게 오늘 목사님 말씀 들었냐고 하는 부인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남편에게 하는 말입니다. 남편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내들은 잠시 귀를 닫으십시오. 그리고 남편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나도 남편을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사실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우리는 부부사이에 동등해 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히 동등하지 않은 부부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약간 내 편에서 손해라는 생각이 있어야 동등합니다. 부부관계에서도 내가 좀 손해 보는 것 같다고 느낄 때 비로소 동등한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손해를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상대방보다 좀 더 낮아진 자리에서 상대방을 세워줄 때 비로소 동등한 관계, 아름다운 관계를 가꾸어갈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예수 믿는 가정들이 모두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정말 사랑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말로 다할 수 없게 사랑하고, 내 몸같이 사랑하는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복음으로 인해 변화된 로마교회의 모습은 종의 존재였습니다. 로마서가 쓰일 당시는 종이 있었던 시대입니다. 10절의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이라는 말고, 11절의 나깃수의 권속이라는 말은 모두 당시 로마의 명문가문의 이름들입니다. 로마서가 쓰일 당시 이미 복음은 로마의 귀족들의 가정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귀족들보다는 그 집안에 있는 종들에게 먼저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아 로마의 귀족들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8절에 ‘암블리아’라는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 그는 노예였습니다. 암블리아는 당시 아주 흔한 노예의 이름이었습니다. 1세기 말엽에 있던 ‘도미틸라’라는 묘지가 전해 내려옵니다. 그곳에 있는 묘지 중 하나의 묘지의 비석에 ‘암블리아’라는 이름이 굵직하고 하려한 글씨로 쓰여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날 미국 사람들처럼 first name, middle name, 그리고 last name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석에 세 개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한 묘지는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그 비석에는 매우 크고 화려한 글씨로 ‘암블리아’라고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노예였습니다. 끝까지, 죽을 때까지 노예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교회에서 감당한 일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매우 책임 있는 일을 감당했고, 또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죽을 때까지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 안에서 그의 신분은 아무런 걸림돌도, 문제도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복음입니다. 바로 복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복음은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뿌리 깊은 의식까지도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교회가 복음을 위해 존재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간판을 걸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복음을 위해 존재하고, 복음을 위해 집중할 때 그것은 가능합니다. 오늘날도 가능합니다. 오늘도 그 복음은 변함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동일할 일을 행하십니다. 이미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담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안에 허물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누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가정에서의 담이 무너지고, 교회에서의 담이 무너지고, 우리의 일터에서 담이 무너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복음의 능력이 오늘도 동일하게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세 번째 복음으로 인해 변화된 로마교회의 모습은 교회 간 관계의 변화입니다. 3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이들 부부는 본래 로마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AD 49년 로마 황제 그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유대를 떠나 고린도에 왔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에베소로 갔다가 얼마 후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들 부부가 섬기는 교회는 따로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5절입니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서로 다른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AD 3세기까지는 교회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모두가 가정교회였습니다. 모여서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부득이 여러 개의 교회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를 받는 사람들에게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고 부탁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섬기는 교회에도 찾아가서 나의 문안을 전하라고 부탁합니다.

오늘날은 교회당이 있어서 수 백 명에서 수 천 명, 혹은 수 만 명까지 들어가서 동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러 개의 교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한 교회만이 아니라 여러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이 서로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참 감사한 것은 지난해와 올 한 해 동안 이 지역에 있는 세 교회가 서로 교류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웃교회에 가서 설교를 한 번 했고, 우리교회의 유충웅장로님 은퇴식 때 이웃교회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와서 축하했습니다. 또 유장로님께서 노스사이드교회에 가셔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내년에도 우리교회가 30주년을 맞는 해가 됩니다. 아마도 30주년 행사 때는 이웃교회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함께 이 기쁨을 누리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함께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더욱 진전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달려가는 천국 시민이라는 정체성입니다. 함께 사랑을 나누고 동역자, 지체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죄의 역사입니다. 관계가 파괴되어가는 것이 바로 세상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파괴되고, 자신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이웃과의 관계, 더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하지만 복음은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죄 용서와 사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신과의 관계를, 이웃과의 관계를,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역사입니다. 우리교회를 오늘까지 이렇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더 강하게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복음의 능력이 오늘 우리교회와 가정 가운데,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놀랍게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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