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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 오실 것을 준비하는 대강절 기간을 보내면서 성탄의 기쁨이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어른이 되면서 어렸을 때 느꼈던 성탄의 기쁨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경험한 성탄의 기쁨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탄의 본질로부터 느끼는 기쁨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성탄추리를 하고, 동네를 다니면서 집집마다 앞에서 캐럴 송을 부르면 기다리시던 어른들이 나오셔서 준비해 놓은 과자를 주시면 얻어가지고 다시 교회로 와서 밤을 새워 게임을 하면서 노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작 25일 11시 성탄예배 때는 꾸벅꾸벅 조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요즘은 쇼핑하는 기쁨이 더 큰 성탄절이 된 것 같습니다. 그나마 쇼핑할 형편도 안 되시는 분들에게 소망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정말 참 성탄의 기쁨을 누릴 기회를 얻으신 것입니다.

진정한 성탄의 기쁨은 밤새워 노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쇼핑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주님을 만나는데 있습니다. 내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로 오신 그 분, 지극히 낮아지셔서 우리의 모습으로 오신 그 분, 그래서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 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의 지식과 경험과 삶의 범위의 한계 안으로 찾아오신 그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이야기하고, 또 그 분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그 분 안에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과 대화하면서 나를 발견합니다. 내 인생의 길을 찾아갑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탄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참 오래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사단의 권세를 부순다는 것인데,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계획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장소를 먼저 고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는 예루살렘도 아니었고, 벧엘도 아니었고, 세겜도 아니었습니다. 미스바도 아니었으며, 길갈도, 여리고도, 실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선택하신 장소는 바로 갈릴리 지방에 있는 나사렛이란 곳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나사렛이란 지명은 구약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지명입니다. 조용한 도시였습니다. 이름 없는 도시였습니다. 약 1500년의 긴 구약성경시대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외쳤지만, 나사렛이란 곳은 선지자들의 선포의 대상도 되지 않았고, 선포의 장소로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즉 나사렛은 역사 속에서 외면당하던 지역이었습니다. 더구나 갈릴리라는 지역 자체가 이스라엘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었습니다. 갈릴리란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서 별로 발달되지 못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도 나사렛이란 마을에는 로마 부대가 주둔하던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나사렛에는 유대인보다 이방인들이 더 많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나사렛이란 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뜻의 대명사로 쓰인 곳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빌립이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내가 나사렛에서 오신 예수라는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분임에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나사렛 같은 촌 동네에서 무슨 인물이 나오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23절에 보면 전에 선지자들이 예수를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칭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구약성경에 ‘나사렛’이란 지명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천대받고 멸시받을 것을 예언한 것을 마태가 ‘나사렛 예수로 칭하리라’고 예언한 것처럼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금방 알아차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후미지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매우 천하게 취급 받는 동네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곳인 나사렛에서 살던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히 마리아의 삶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미리암’에서 온 이름입니다. 미리암이란 모세의 누이로서 출애굽 당시 모세, 아론과 더불어 상당히 리더십을 발휘한 여성입니다. 이로 인해 어디나 그렇듯이 후대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그로 인해 마리아라는 이름은 당시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당시 나사렛에 사는 매우 평범한 소녀였습니다. 부모의 이름조차도 언급되지 않는 소녀였습니다. 시골티는 덕지덕지 드러나는 처녀였습니다. 집안일도 열심히 하고, 들판에서 거친 일도 하고, 때로는 남자가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하는 소녀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거친 모습을 날마다 보면서 살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이방인들과 함께 특별한 선민의식조차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천주교 수녀님들을 보면 참 단정하고 잘 정돈된 모습이 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흡사 마리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마리아가 예뻤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삶의 자리를 살펴보면 마리아는 그렇게 예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마리아가 갑자기 나타나 이렇게 전하는 천사의 소리를 듣고는 놀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은혜’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기 시작하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슨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나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바로 그 분의 일을 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먼저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어디 한 번도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먼저 손을 내미시고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그렇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도 그렇고, 베드로를 주님의 제자로 삼으시는 것도 그랬고,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는 과정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예수라는 신에게 찾아와서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 두 가지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것보다 더 크고 놀랍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기에는 참 소망과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언제나 안전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큰 기대와 소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좇아 믿음의 발걸음을 걷는 자에게 참 소망과 믿음을 주십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이어서 마리아에게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마리아가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큰 자가 될 것이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윗의 보좌를 줄 것이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에서 왕 노릇할 것이며, 그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라는 말만 들어도 흥분하고 기대하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가장 크게 누린 왕입니다. 바로 그 다윗의 보좌를 그 아들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영원히 영원히 야곱의 집에서 왕 노릇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마리아가 이 천사의 말을 얼마만큼 이해했을까 의문입니다. 마리아의 삶의 자리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거나 상상하기는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나세렛 시곡 촌구석에 살던 마리아가 이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은 정말 상상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었지만, 그녀의 마음 안에 분명한 것은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흥분하고 있었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소망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어서 마리아가 하는 질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의 마음에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마음의 기대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현실이었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보통 절망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할 형편도 되지 못하고, 능력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소망 중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소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32-33절에 마리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처럼 하나님은 우리교회에서 소망을 주셨습니다. 지난 주 건축위원장이신 김용일 장로님께서 우리교회의 건축에 대한 상황보고를 드렸습니다. 그 때 보고하기를 내년 7월에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교회당을 비어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화요일 CAM으로부터 2008년 1월까지 예배당을 사용할 수 있다고 통보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만약 교회를 다 짓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힘든 일이 될는지 상상하기도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CAM을 통해 더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정말 함께 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의 건축을 돕고 인도하시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적어도 백만 불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만 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백만 불을 만들기란 거의 불가능할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현재 교회당 사용 연장 허가를 받았다고 해도 백만 불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마리아가 하는 고백과 흡사 비슷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도 우리가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 것이 없으면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가브리엘 천사는 세 가지로 대답을 합니다. 첫 번째는 35절입니다. 이 일은 성령의 임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일입니다. 마리아가 한 일은 단지 순종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빌려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자신을 내어 놓는 일입니다. 물론 이것도 힘든 일입니다. 아기를 갖고 10달 동안 임신의 기간을 갖는 것, 그리고 입덧을 하고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말하듯이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합니다’라는 식의 염려를 필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적인 사고이며 자기중심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방법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두 번째 36절에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산 실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주에 우리가 함께 보았던 엘리사벳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벳은 이미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지났습니다. 나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도 아기를 가졌습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상황은 똑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사건을 표증으로 보여줍니다.

세 번째 37절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은 곧 삶의 현장에서 사건이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결코 마리아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에게 하나씩 격려하고 설명하고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결코 당신의 자녀들이 억지로 주님을 따라오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만약 그것을 원하셨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고 아마도 또 다른 동물이나 로봇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고 믿음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신다는 이 경이롭고 위대한 사건에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38절에서 이렇게 멋진 고백을 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참 멋진 고백입니다. 마리아는 이 고백으로 자신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종이 되는 순간 모든 염려와 결정권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종이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책을 하나 보았습니다. ‘노후를 준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무슨 내용이 있나 보려고 목차를 보았는데, 저축을 얼마씩 하고, 운동을 어떻게 하고, 건강진단을 일 년이 한 번씩 하고, 등등 이었습니다. 다 필요한 것입니다. 건강해야 하고, 노후자금도 준비해야 하고, 건강검진도 할 수 있으면 받아야 합니다. 무책임하게 사는 것은 결코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하지만 노후대비를 위해 수 없이 쏟아지는 책들이 결국 이 시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염려입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우리의 인생을 즐기고 누리기보다는 더 많은 염려와 짐으로 누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러나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이떤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 나를 열어드립니다. 주님! 주님께 나를 내어드립니다. 나를 통해 일하시옵소서.’ 이것이 마리아의 고백이었습니다. 성탄의 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주님 오시옵소서. 나를 통해 일하시옵소서.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신다면 나를 주님께 드리오니 나를 통해 일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함으로 주님의 영광스런 역사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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