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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강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대림절, 강림절)이란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며 준비하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대강절을 네 주 동안 지키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네 주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 이미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심으로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한 후 이미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계획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좀 더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준비하신 것은 세례 요한을 보내시는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출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본문 5절에서 ‘유대 왕 헤롯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세례 요한이 출생할 때의 상황을 묘사해 주는 말입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라는 말은 유대인에게 아픔과 시련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유대인은 기쁨보다는 아픔이 더 많았고, 좋은 날 보다는 고통과 시련의 세월이 더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어떤 때는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하셨고, 또 어떤 때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때때로 백성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선포하면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선지자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뎌진 영혼은 흔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의 존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축복이고 감사한 존재였습니다. 예언자가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생명력을 지킬 수 있었고,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이 중단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400년 동안 예수님이 오시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이때를 흔히 중간시대라고 하고, 영적으로는 암흑기라고도 표현합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BC 167년 마카비 혁명을 통해 이스라엘은 당시 헬라로부터 성전제사를 회복하고 정치적으로도 독립해서(143년BC)  약 100년 가까이 독립국가를 지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주전 67년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두매 족속(에서의 후손, 에돔 족속)인 헤롯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대 왕 헤롯 때에’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의 시간이었고, 예언이 끊긴, 즉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말씀하지 않는 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음을 찡하게 울리는 말씀도 없습니다. 격려의 말씀도 없고 징계의 채찍을 드는, 그래서 가슴을 찌르는 말씀도 없습니다. 잘못됐으면 잘못됐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잘 했으면 함께 기뻐하고 함께 춤출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닙니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생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믿긴 믿지만 뜨겁지도 않고 간절함도 없습니다. 믿어도 그만이고 안 믿어도 그만입니다. 교회 나가도 그냥 그렇고 한 주 빠져도 그냥 그렇습니다. 그저 종교적 삶은 있을지 모르나, 그 안에 생명이 없고 능력도 없고 역사하는 힘도 없습니다. ‘유대 왕 헤롯 때’가 바로 이런 시대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절기 때와 매일 같이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서 그들은 감격을 잃어버린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이 때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이라는 부부입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이었고, 엘리사벳은 아론의 후손입니다. 6절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신앙에 뜨거움과 간절함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란 제도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즉 아버지가 제사장이면 아들도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제사장이면 손자도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제사장 중에서도 대제사장은 로마의 임명동의를 얻어야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언제나 정치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제사장은 매우 정치적 성향이 강했던 사두개파 사람들 중에서 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인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노선은 매우 자유주의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경건이나 뜨거운 믿음이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찾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시대에 성전을 장사하는 사람들의 시장 바닥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사가랴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고, 그리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리는 말씀도 없고, 감동적인 설교도 사라지고 선지자의 책망이나 격려도 없고, 동료 제사장들의 열정도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무감동, 무기력에 빠진 시대에 사가랴 제사장과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사가랴의 또 하나의 훌륭한 점은 아내를 사랑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훌륭한 가정생활을 했습니다. 7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고 자식도 없고 나이조차도 많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현재 아기가 없고 또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나이도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가랴는 엘리사벳을 끔찍이 사랑하고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없고, 또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하는 남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그가 특별했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에게 최선을 다해 섬김으로 사랑하는 아내가 하나님 앞에서도 신실한 사람입니다.


8-10절에는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당시 약 2만 명의 제사장이 있었고, 24반열로 나뉘어 성전을 섬기는데, 한 반열 당 약 1000명씩 구성되어 있어 한 반열이 일 년에 두 주를 섬김니다. 그러니 제사장 개인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확률은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가랴가 나이 들어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 천사가 향단 옆에 서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사가랴가 무슨 기도를 했습니까? 자식을 달라고 기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시자 18절에서 그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다’고 대답합니다. 사가랴는 전에 자식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포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또한 그 아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성령 충만한 아이가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와 소망 보다 더 크게 인도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문제는 경건한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영적 암흑기에서도 하나님을 뜨겁게 섬기는 것이 성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뜨거운 감동이 없는 시대에도,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말씀이 없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그리고 의롭게 살았던 사가랴에게 임한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너무 늦게 응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가랴가 이렇게 늦게 요한이라는 아들을 얻음으로 그들 부부는 요한을 위해 훨씬 더 많이 기도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요한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자연적 출산의 의미를 훨씬 더 넘어서는 사건이었고, 그 감동과 은혜, 자녀에 대한 책임과 하나님 앞에서의 아들의 존재의 목적은 너무도 크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요한에 대한 자녀교육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결국 거기에 하나님의 의도하심과 이들 부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20절에는 사가랴가 벙어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사가랴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사랑이었고 하나님의 표적이었습니다. 벙어리가 되어도 기뻤고, 수태를 못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었지만 그들은 더 귀한 아들을 더 귀한 목적을 위해 쓰임 받도록 키울 수 있었습니다.

대강절입니다. 성탄의 계절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힘들고 어려운 한 해를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참 기쁘고 감사한 한 해를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기대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사가랴가 누린 그런 놀라운 인생의 변화와 능력이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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