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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이자 화가이며 건축가이고 또 시인이었던 미켈란젤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매우 크고 멋없는 큰 대리석 덩어리를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의 질문에 “나는 지금 이 바위 안에 갇혀 있는 천사를 조각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멋없는 대리석 바위덩어리에서 미켈란젤로는 그 안에 갇혀 있는 천사를 보았습니다. 미켈란젤로라는 사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위대한 예술가가 된 것은 바로 그가 보는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위 안에서 마치 살아 숨 쉬는 천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무엇을 보실까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형상을 보셨습니다. 당신의 형상이 인간에게 있기에 그 분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솜씨를 보았습니다.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모양 없고 등치만 큰 바위 덩어리 안에서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을 보았고, 사도 바울은 성도들 안에서 하나님의 솜씨(작품)를 보았습니다. 그런 눈을 가진 미켈란제로의 손끝을 통해 위대한 조각 작품들이 만들어졌고,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을 회복하고 치유하며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의 남편과 아내를 보면서, 그리고 자녀와 친구들을 보면서 무엇을 봅니까?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그들 속에서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 형제 안에 있는 하나님을 형상을 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14-15절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이하에서 교회 공동체가 서야할 모습에 대해 계속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주제를 조금씩 바꿔가면서 언급합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가장 먼저는(롬12:1-2)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영적 예배라고 언급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형제를 사랑하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고 비판하지 마라. 형제의 앞에 넘어질 것을 두지 마라.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이런 권면들을 한참 해 놓고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로마 교회 성도님들이 이런 것쯤은 다 알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사명)로 인하여 여러분들로 하여금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그 안에서 서로 봉사하고 주께 훌륭한 봉사를 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확고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직접 세우지 않았고 가본 적은 없지만, 로마 교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납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바로 로마로부터 얼마 전 추방되어 나온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당시 세계의 도시였던 로마에 대한 소식을 자주 접했을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 대한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삶에 있어서는 바리새인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바울에게 로마 교회 성도들의 삶은 결코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허점이 많았고, 그래서 할 말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길게 권면하는 이유는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기억을 되살리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의 거친 모습, 서로 성숙하다고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모습들 속에서도 그들을 격려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너희들이 사실 진리를 다 알고 있는 줄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켈란젤로가 멋없는 바위를 대하는 자세였으며,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대하는 자세였습니다.

제가 헌금기도를 하면서 반드시 의도적으로 빼놓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여러 가지 형편 때문에 드리지 못한 손길들이 있다면 그 성도님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어느 성도님께서 이 기도가 마음이 걸리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하셨는데, 직접 하지는 않으시고 다른 분을 통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조심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이야기를 해 주신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질문하신 분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헌금 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 1불도 없어서 헌금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우리 가운데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기도가 오히려 헌금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justify시켜서 헌금 안하고도 마음의 부담을 갖지 않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인 것으로 느꼈습니다.

사실 제 안에도 그런 염려가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부분일수록 항상 기로에 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은 항상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해 사용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바꿔볼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님! 헌금하지 못한 성도님들에게는 헌금할 수 있는 형편ㅇ르 주시고, 헌금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드리고도 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소서.’ 그러나 이런 기도는 목사가 헌금하지 못한 성도님들을 간접적으로 정죄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헌금하지 못하는 분들은 믿음이 부족할 수는 있어도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결국 이것은 목사의 목회적 신앙고백의 차원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목사는 헌금하지 못한 성도들조차도 헌금을 드리고 헌금기도를 하는 이 예배의 한 부분에서 제외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마치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께 은혜를 요구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분명 경계해야 할 우리의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헌금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나는 저의 경험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지난 달 LA 코너스톤 교회에 가서 헌금을 두 번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주일예배였고, 또 한 번은 마지막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주일예배 시간에 정말 헌금준비를 미리 하지 못했습니다. 급하게 준비했는데, cash가 없어서 check을 썼습니다. 헌금을 해 놓고는 마음이 많이 걸렸습니다. 코너스톤교회에서는 비행기 표까지 사서 보내주고, 숙식을 제공하고, 항상 식사도 최고, 최대의 정성을 다해서 준비해 주었습니다. 요세미티까지 가서 두 밤이나 자면서 시간을 보냈고, 매 순간순간 감동과 감격을 경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헌금은 교회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은 은혜에 비해 드린 것이 너무 적다는 생각에 미치자 제가 드린 헌금으로 인해 제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수요일 저녁 또 헌금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했는데, 이번에는 cash로 전보다는 좀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하고 나니 ‘이번에도 check으로 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헌금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 교회는 저에게 최대의 섬김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들은 저의 부족한 모습을 보지 않고 오히려 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저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또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목사의 약함을 보지 않고 그저 주님의 이름으로 충성스럽게 섬기셨습니다. 그것이 목사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갈 4:13-15) ‘내게 육체의 약함이 있었지만 너희가 나를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고백합니다. 부족하고 약한 바울이지만 그를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하는 갈라디아교회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자신을 비하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하나님의 존귀케 하시는 역사를 보십니다.


20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로 하여금 더 놀라운 것을 보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주적 교회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교회에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여러 교회들을 통해 동시에 일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로마에 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10-13절에서도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의 더 큰 소망은 서바나(스페인)에 가는 것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땅 끝이었습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따라 바울은 열심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스페인으로 가는 중에 로마에 들리기를 원했고, 로마교회가 후원하는 것으로 스페인까지 갈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의 서바나 전도계획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교회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 교회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를 통해 서바나를 갈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예루살렘 교회를 먼저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당시 셀롯당이라고 하는 열심당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민족을 위해서 품에 칼을 품고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반민족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서슴없이 살해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과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암살의 주된 대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정상적인 직업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날마다 삶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의 성도들이 도왔습니다. 이 지역에 대표적인 교회는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교회입니다. 이 두 교회는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하고 사도 바울을 통해 그 헌금을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몇 가지 기도를 부탁합니다. 첫 번째는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유대에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얻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31절). 유대에 순종치 않던 자들이란 앞서 말씀드린 열심당원(셀롯당)들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향한 순결함을 잃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무차별 잡아 죽이곤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헌금을 전달한 후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유대에 순종치 않는 자들, 즉 열심당원들의 암살계획으로부터 구원받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두 번째 기도요청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의 섬기는 일을 잘 받아들이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남을 돕는 것은 도움을 받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혹시나 마게도냐(빌립보)와 아가야(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헌금이 잘못 전달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로마로 가서 로마교회 성도들과 이 기쁨을 나누면서 편히 쉴 수 있는 때가 오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서를 거의 마무리하면서 로마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범 우주적인 교회를 보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로마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에서 로마교회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있어서 능히 서로를 돕고 권면하며 세워주는 교회로 칭찬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교회가 거기서 그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바로 범우주적인 교회를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적어도 예루살렘교회를 생각하게 했고,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고린도교회와 빌립보 교회를 보게 했습니다. 또한 로마를 거쳐 스페인을 향한 선교의 열정이 타오르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로마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당시로서는 전 세계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우주적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우리교회 하나만이 아닙니다. 교회는 전체가 하나입니다. 신기한 것은 교회마다 지역마다 형편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기근과 핍박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할 수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을 만큼 고난을 겪습니다. 빌립보교회와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교회를 돕습니다. 로마교회는 사도바울의 선교를 후원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지나치게 개교회주의적인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 영적으로 빚진 자라고 표현합니다(26-27절). 또한 로마교회를 향해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교회로서, 그리고 당시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교회로서 서바나를 향한 선교적 부담을 지도록 촉구합니다. 자기 교회가 파송하지 않은 선교사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사역을 위해 기도하도록 요구받습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을 깊이 바탕에 깔고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 이러한 우주적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못생기고 덩치만 큰 대리석 바위 안에서 천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 안에서 당신의 형상을 보고 계십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고, 그냥 볼품없는 것이었지만 미켈란젤로라는 위대한 조각가의 손끝에 있는 칼이 닿을 때 그 안에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지듯이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우리 인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로마교회를 향해 예루사렘교회와 빌립보 교회, 고린도 교회, 그리고 서바나라고 하는 선교지를 마음에 품도록 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사명을 품고 기꺼이 그 짐을 지는 교회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기꺼이 기쁨으로 지고 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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