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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Gift Shop을 운영하는 다나 베트슨이라는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전 남편에게서 낳은 스물 한 살 된 Jason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시 결혼해서 낳은 열 두 살 된 Lucky라는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네 살 된 꼬마가 있었는데 이 꼬마가 심각한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악성 바이러스가 이 아이의 간에 침투되어서 간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열 두 시간 안에 간이식을 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유일한 소망은 살아있는 간 기증자를 구하는 겁니다." 신장이 아니라 간입니다. 사람은 신장은 둘을 가졌지만, 간은 하나뿐입니다. 신장이라면 혹 하나를 나누어 줄 수가 있지만은 간은 절반을 잘라서 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열 두 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모두가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꼬마의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초조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전 남편의 아들인 제이슨이 자기의 간을 나누어주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이들 둘의 간이 체질적으로 맞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다행히 맞을 것 같다는 진단이 되었습니다. 이런 불안한 가운데서 이제 수술을 받게 됩니다. 제이슨(21)이라고 하는 아들과 네 살 난 딸을 이렇게 수술실에 넣어 놓고 수술 받는 동안 그녀는 열 두 살 된 딸의 손목을 잡고 수술실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잘못하면 두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겠습니까? 어쩌면 두 자식을 다 잃어버릴 수 있는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마음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 있습니다.엄격히 말하면 자기 친동생도 아닌 이부형제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간을 나누어주겠다고 수술실에 들어갔어요. 그 자원하는 마음이 너무 고마워요. 내게 이런 아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마운 것입니다. 이들은 친형제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는 다릅니다. 이같이 강퍅한 세상에 '그래 이렇게 사랑스러운 내 아들이 여기에 있다.' 사랑과 그 고마운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한편으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수술 자체를 생각하면 걱정이지만, 이렇게 소중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가정에 이렇게 거룩한 사랑이 있고 내 아들이 이렇게 귀한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합니다. 한편으로 걱정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감사와 염려는 항상 같이 온다는 것입니다. 한쪽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감사합니다. 이쪽에서 보면 걱정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저쪽으로 보면 감사할 것이었습니다. 앞서 한 두 사람의 간증을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그들의 삶 가운데 고난이 있었습니다. 근심이 있었습니다.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 아픔 때문에 울기도 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는 결과가 아니라 믿음이며 의지이고 순종입니다. 감사하려고 마음먹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과 자세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말씀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약속하시지 않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삶이 회복되기 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삶이 회복되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서 감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난 후에 그들의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니엘의 이야기를 봅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에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느부갓네살 왕 밑에서 총리가 되었고, 이어서 벨사살 왕 밑에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페르시아가 다스리던 때 다리오 왕 밑에서도 총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다리오 왕은 나라에 120명의 방백들을 세워서 전국을 120개로 나누어 통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어서 120명의 방백들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리오 왕은 이 세 명의 총리들 중에 다시 다니엘을 가장 으뜸으로 세웠습니다.

다니엘은 본래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포로였습니다. 그의 출신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포로였고, 천민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니엘을 시기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다니엘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관리하는 국정에서는 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득이 그의 신앙에서 흠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리오 왕에게 30일 동안 왕 외에는 누구에게도 기도할 수 없게 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을 어기게 되면 사자 굴속에 넣도록 하는 법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법을 만들어 놓고는 그곳에 왕의 도장까지 찍어서 왕 자신도 고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니엘을 잡기 위한 음모였습니다. 나중에서야 왕도 그것을 알게 되지만, 10절에 나오는 다니엘의 행동이 얼마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지 모릅니다.

10절에 보면 다니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으로 전에 행하던 대로 ---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자기를 잡으려고 모함하는 함정이 엄청난 정치적 힘을 등에 업고 결정된 사실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여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니엘이 지금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기도에서 몇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다니엘의 감사는 전에 행하던 대로의 감사였습니다(10절). ‘전에 행하던 대로’가 무슨 뜻입니까? 그는 이런 어려움이 있기 전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조서에 어인이 찍한 것을 알고도’ 집에 돌아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엄청난 음모가 일어나는 그 상황에서도 동일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다니엘은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진실했습니다. 다니엘의 정적들도 그의 흠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충성스럽게 살았는데, 왜 죽어야 합니까? 왜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들어가야 합니까? 다니엘이 원망한다면 원망할 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염려와 원망, 불안과 불공평한 세상에 대해 저주를 퍼부어도 뭐라 못할 사람입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아왔는데,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전에 행하던 대로 여전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이렇게 인도하십니까? 왜 이런 자리에서조차 감사를 받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까?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가 ‘존재의 용기’라는 책에서 ‘신앙이란 용기’라고 정의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의 고향, 조상 대대로 살던 그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셨습니다. 야곱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그를 고향 가나안을 떠나서 그의 삼촌 라반이 사는 밧단아람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길을 가면서 거의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요셉을 애급으로 인도하십니다. 애급으로 가지 않을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17세에서 30세까지 노예로, 죄수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용기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떠나는 여행과도 같습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바벨론과 바사의 총리는 그의 삶의 근거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이 바사 나라의 총리 자리를 내려놓는 것은 엄청난 용기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더 안전하게 세워놓으십니다. 그는 사자굴 속에 들어갔다 나온 후 더 확고한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안전지대에서 일어서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전혀 새로운 자리로 떠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게 떠날 때 성도는 전에 서 있던 그 자리가 삶의 근거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용기입니다. 다니엘이 ‘전에 행하던 대로’ 여전히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유가영 자매의 간증을 들으면서 참 마음에 가장 와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단계에 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생명포기각서’라는 그의 표현을 들으면서 그가 정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유가영 자매의 힘든 것을 통해 하나님이 정말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아이의 생명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이 아이가 여전히 내 품에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내 품을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 이 아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신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근거가 이처럼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할 때 우리는 비로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다니엘의 감사는 ‘하루 세 번씩’ 드리는 감사였습니다. 즉 다니엘의 감사는 일상성 속에서 드리는 감사였다는 것입니다. 매일 세 번씩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의 감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체질이 되어야 하고,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오랜 동안 같은 행위가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오래 가면 성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감사의 체질화를 연습해야 합니다. 감사를 연습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감사의 계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 년 내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침에도 하고, 점심에도 하고, 저녁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식사를 차려준 주부에게 감사하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그리고 저녁을 먹으면서도 언제나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마운 일이 있어도 고맙다고 말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도시에 착한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신부가 이발소에 왔습니다. 정성껏 이발을 잘 해드린 다음에 ‘그저 하나님께 봉사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이발료는 내지 마시고 그냥 가시지요. 저도 하나님의 일을 좀 하고 싶습니다.’ 하고 보내드렸습니다. 신부님은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가서 생각하니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우편으로 기도문 책을 몇 권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며칠 지난 후 경찰이 와서 이발을 하게 됐습니다. 이발을 다 마친 후 다시 이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발료는 내지 마십시오. 저도 지역 사회에 봉사한 셈치고 좋은 일 한 번 하고 싶습니다.’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돌아가서 생각해 보니 참 감사했습니다.참으로 고마워서 그도 도너츠 몇 개 사서 봉투에 넣어가지고 그 안에 엽서 한 장 써가지고 문 앞에 갔다 놓고 갔습니다. 다음 날 국회의원이 왔습니다. 역시 이발을 다 해드린 다음에 ‘이발료는 안 내셔도 됩니다. 저도 국가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날 보니까 국회의원들이 문 앞에 줄을 섰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감사를 잘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할 조건과 감사하기 힘든 조건을 같이 갖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감사할 수 있지만, 반대로 보면 감사하기 힘든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아니 대부분 우리 앞에 있는 상황들은 감사하기 힘든 것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면 그 안에서 우리는 다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가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삶이 바뀌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을 때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21살 아들과 4살 딸이 병실에서 생명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이런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한 어머니의 모습처럼,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도 그렇게 감사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총리자리를 내려놓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나님 앞에 감사했을 때 다니엘은 더 든든히 세워졌습니다. 여기에 감사의 원리가 있고 법칙이 있으며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 안에 진정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 가운데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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