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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성도님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맛보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참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도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산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이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이 사랑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놀랍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깨닫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많은 연봉을 받는다고 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좋고, 또 건강해서 좋은 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 인생에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도 두 아이에게 한글 이름을 계속 사용하게 했습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학교에서 선생님께서도 그냥 사용해도 되겠다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이가 영어 이름을 갖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제 아내가 학교에 모임이 있어서 갔는데, 제 딸 아이 이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찾은 후 아이가 이름을 바꾼 것을 알았습니다. 제 마음에는 그것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저 스스로 한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얼마 후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물어봤는데, 그만 이 아이가 이름 바꾼 것을 아빠가 알면 혼날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우물쭈물하면서 둘러대더니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한참 달래준 후에 물었습니다. ‘너 아빠 무섭니?’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이 당황스러웠습니다. 많이 반성하고 회개했습니다. 저를 다시 돌아보게 했습니다.

두려움은 대화를 단절시킵니다. 사랑은 대화의 문을 열고 마음의 평안과 삶의 기쁨, 그리고 행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분이십니다. 성경 속에서 수없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바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사랑에 대해 가장 심금을 울리게 하는 말씀 중 하나가 이사야 49장있습니다. ‘여인이 자기 젖 먹는 아이를 잊을 수 있겠느냐.’ ‘혹시 여인이 자기 젖 먹는 아이를 잊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놓고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알면 삶의 소망이 생깁니다. 이 사랑을 알면 알수록 삶의 길이 보이고 능력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것이 더 강한 표현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표현은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가 사랑이라는 말이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 전체가 사랑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그 사랑은 사랑 안 할 수 있는데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신 분, 바로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맛보며 사는 길은 우리도 그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성장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나타나는 변화는 바로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따라와야 하는 변화입니다.


바로 그런 변화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성경의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훌륭했던 이유 중 하나는 계속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사역의 발자취에서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변화는 바로 사랑의 중요성을 알아가고,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하여 간다는 점입니다. 물론 처음에도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 사랑이 그의 사역의 중요한 원칙이 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러간 후였습니다. 처음 그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가 믿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없이 행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죽는 일에 찬성투표를 던지면서 그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그의 여전히 그런 성품은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이 분명해야 했고, 무엇이든지 타협이 없이 밀고 나가는 추진력을 가지고 사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다혈질적인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업무추진력이 매우 강했고, 그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이 따라 오지 못할 경우는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는 바로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다시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1차 여행에서 동행했던 마가를 제외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에 함께 했던 마가가 중간에서 되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일로 바울은 마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일로 바울의 영적 스승이었던 바나바와도 등을 지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7절에 보면, 바울은 내가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인간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의 성격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의 편지에서 나타나는 글들을 보면  때로는 듣기 민망할 만큼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5:12) 그는 할례를 통해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사람들을 향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고 엄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빋을지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불같은 성정을 사용하셔서 복음의 타협할 수 없는 점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그의 인생 말기쯤 가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바울의 감옥에 갇힌 것을 계기로 복음을 전합니다. 즉 그들은 바울의 반대편에 서서 자기 세를 늘리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교회 안에 파당을 만드는 분란의 씨를 뿌리는 일일 수 있었습니다.그가 교회들에게 편지할 때마다 일치와 하나 됨을 그토록 강조했는데, 그는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또 하나의 분열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이를 인해 내가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미숙한 믿음까지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용과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은 그에게 갈수록 중요한 신학적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식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빚을 진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을 할 의무를 진다’는 뜻입니다. 즉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은 다른 것에는 어떤 짐도 지지 말되, 오직 사랑할 의무를 지라는 뜻입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세금을 내야하는 빚도 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세금은 즉시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금이 빚진 상태로 있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빚진 자가 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역설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사랑은 영원히 다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말입니다. 인간은 평생 그 빚을 갚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사랑의 빚을 다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처음 태어나면서도부터 사랑의 빚을 지고 태어납니다. 혼자 태어날 수 없고, 혼자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최소한 생후 수 년 동안은 부모와 부양자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또한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우리는 누군가의 빚을 져야 땅에 온전히 묻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자입니다. 사랑은 다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빚진 마음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8절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9절에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등의 율법을 다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안에 다 들어 있다고 합니다. 10절에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사랑 안에 율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율법을 성취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행하면 그것이 곧 율법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누가복음 10장의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율법에는 뭐라고 쓰여 있느냐?’ 율법사가 대답합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네가 잘 대답하였도다. 그대로 행하라.‘ 이 때 율법사가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나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당신이 알다시피 가파른 길이고, 강도들이 자주 나타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만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그 사람을 거의 반은 죽을 만큼 때리고 그의 몸에서 모든 것들을 가지고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는 매우 바쁜 길을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여리고로 급한 심방을 가고 있었던지,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어서 레위인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레위인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었죠. 그 사람도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사마리아 사람이 그 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사마리아 사람은 앉아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기름과 포도주로 그의 상처를 소독하고 천으로 그의 상처를 싸맨 후 그가 타고 오던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주막 주인에게 잘 치료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만약 경비가 더 들게 되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더 갚을 것까지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자! 당신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사는 꼼짝 없이 대답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9절 말씀을 잠시 다시 보겠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앞서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어기지 않았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간음을 하지도 않았고, 살인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도적질을 한 것도 아니며 남의 것을 탐내지도 않았습니다. 쓰러져 있는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취하려고 탐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율법 준수로는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율법준수는 그들의 삶과 그들의 공동체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 교회 공동체는 어떤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종교행위에 굳어져 있는 목사는 아닌가? 나는 내가 할 일에만 빈틈없이 하려고 하면서 다른 것은 모두 내 영역이 아니라고 외면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우리교회는 과연 예기치 않은 일들이 나타났을 때 아!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고, 갑작스러운 일은 할 수 없다고, 그렇게 외면하는 공동체는 아닌가? 우리는 과연 모든 일들 이면에 사랑이라는 가장 강한 motivation으로 일하고 있는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몰아가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냥 앉아있지 못하는 그런 교회인가?

어느 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공간의 문제가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 이름 알기가 어려워 애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주는 자(giver)로 가득 차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티 내는 자(tipper)로 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운행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인갅거 판단 위에 운행한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다.
죽어가는 교회는 편안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활발히 전도하고(evangelize) 움직인다.
죽어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가 화석화(fossilize) 되어간다.


본문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하지 않은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뭔가 변화를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변하고, 모임이 활성화되고, 작고 큰 섬김의 자리에서 굳은 일,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나서는 모습은 사랑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랑으로 변화되어가는 바울처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처럼, 사랑은 율법의 완서잉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랑의 은혜와 사랑의 능력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일자 설교 제목 성경
789 의의 종이 되십시오(롬 6:15-23) 2006. 6. 4 주일예배
788 율법에서 사랑으로(롬7:1-13) 2006. 6. 11 주일예배
787 바울의 고민(롬7:14-25) 2006. 6. 18 주일예배
786 성령을 좇아 삽시다(롬8:1-17) 2006. 6. 25 주일예배
785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롬8:18-30) 2006. 7. 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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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롬10:1-13) 2006. 7. 30 주일예배
780 믿음으로 삽시다(롬10:13-21) 2006. 8. 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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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8 이방인의 구원(롬11:11-24) 2006. 8. 20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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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8-10) 2006. 10. 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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