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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1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합니다. 모든 인간을 다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시는지,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을 믿고 고백하고 받아들일 때 그것이 나의 구원이 됩니다. 내 아내가 예수를 잘 믿는다고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구원은 내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아내가 혹은 내 남편이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나중에 나도 천국에 가겠지 하면 크게 낭패를 당합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절대 아내나 남편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부터는 인간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냐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믿음과 구원의 문제는 개인적으로 믿고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반응하는가 하는 문제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놀랍고 크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직접 받으시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의 반응의 대부분은 공동체를 통해 공동체 안에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헌금을 해도 교회를 통해 받으시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사람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임금이 의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띠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때 의인들이 질문합니다. “언제 저희들이 그렇게 하였습니까?” 임금이 다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사랑을 해도 누군가를 섬김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혼자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들은 기도와 찬양의 일부를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할 때 그 대부분은 교회와 내 이웃을 통해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장부터는 공동체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반응하며 살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AD 1세기에 기독교가 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의 역사를 경험한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던 중에 은혜를 경험하면서 교회가 탄생합니다. 이것을 1세기 교회(초대교회)라고 합니다. 그 후 속사도시대와 교부시대를 거쳐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를 거치면서  로마교회는 우리가 아는 천주교의 형태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약 1천년이 흐른 후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종교개혁의 주된 issue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은 것, 즉 개인구원을 말합니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가 신앙입문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성도들에게 돌려주었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참된 은혜를 맛보고 누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잃어버린 매우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성입니다. 개신교회는 공동체성이 매우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지금도 하나입니다. 천주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어디로 이사를 가든지 거기서 가장 가까운 천주교로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가능하면 전에 출석하던 교회를 가도록 유도합니다. 이것은 지금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서 천주교회 옹호론자가 아닙니다. 다만 중요하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몸(삶)으로 고백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보통 성도는 혼자 믿는 것은 잘 합니다. 하지만 함께 하는 일에는 너무 약합니다. 함께 하려고만 하면 갈라집니다. 함께 모이면 어려움을 겪습니다.

12장 이하를 잘 살펴보십시오. 12장 이하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것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그 말의 의미는 기도를 열심히 한다든지, 성경을 열심히 본다든지, 아니면 금식을 하는 것과 같은 실천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의 대부분은 모두 관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지 말라는 등의 이웃과의 관계, 공동체에서 어떻게 섬기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20년 전만 해도 한국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는 교회 간 연합 체육대회와 같은 행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운동장에 교회별로 모여서 텐트를 치고 응원을 합니다. 이런 응원가 겸 복음성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승리하리
우리는 승리하리
우리는 승리하리 오늘에
확실히 믿노라
마음속 깊이
우리는 승리하리 오늘에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발 더 나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교회가 이번 경기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도 서슴없이 기도하곤 했습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저쪽 이웃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럴 때 보통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픔을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교회의 존재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왜 저 교회가 존재하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교회는 경쟁의 대상이지 함께 천국 문을 향해 나아가는 동역하는 교회라는 생각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하리, 우리는 승리하리’ 누구를 상대로 승리합니까? 악한 마귀가 아니라, 무슨 무슨 교회입니다.

본문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 말씀의 구체적인 설명을 4절로 8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몸과 지체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모임 자체이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여러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결국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인 것입니다.

4절에서는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한 몸에 붙어있는 여러 지체들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여러 지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양은 각기 서로 다릅니다.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섬기는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권위(설교)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구제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도 있고, 행정의 은사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 있고, 교사의 은사가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회계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만 보면 머리가 아픈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안내를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주방에만 들어가면 신이 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역을 잘 돌보는 사람도 있고, 시설관리를 잘 하거나 전기 혹은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교훈입니까? 이 말씀들은 자기 은사에 맞게 섬기라는 교회생활에 대한 권면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교훈은 우리는 결코 혼자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한 몸에 연결되어 있는 지체입니다. 지체는 함께 가야 합니다. 지체는 결코 혼자일 수 없습니다. 지체는 혼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음으로 당신을 유익하고 복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체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소중함은 나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있음으로 다리가 바르게 걸어갈 수 있고, 손이 일을 할 수 있고, 입이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눈이 소장한 것입니다. 눈은 본다는 것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의 기능을 돕고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우리의 관계가 그렇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만 옳을 수 없고, 나만 주장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있음으로 내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상대방의 섬김과 돌봄이 있기에 내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몸에 눈만 있어도 안 되고, 코만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귀도 필요하고, 입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지체는 같이 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개체라면 우리 혼자 판단하고 우리 혼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개체가 아니라 지체이기 때문에 함께 가야하고, 함께 서야합니다. 함께 하지 않는 것은 함께 멸망할 수 있습니다.

지체들 중에 어니 하나만 두드러지게 되면 결국 온 몸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 몸에서 어느 한 세포가 커지게 되면 그것이 곧 암이라고 합니다. 암은 결국 온 몸을 병들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지체도 역시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지체는 같이 가야하고, 같은 방향을 봐야 하고,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지체들 중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게 되면 당장은 자랑스럽고 멋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온 몸을 병들게 합니다. 그리고 생명이 죽음으로 몰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강한 자가 있으면 약한 자가 있어야 하고, 배운 자가 있으면 덜 배운 자도 있어야 합니다.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자도 있어야 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업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이고,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성경에서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는 ‘제 기능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각 기능을 다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 몸의 덜 귀히 여기는 지체가 있는데, 그것들은 사실 더 귀한 것들로 입혀 줍니다. 예를 들어 엉덩이 같은 부분입니다. 만약 엉덩이에 뾰루지라도 나면 앉아 있을 수조차도 없습니다. 배설의 기능은 우리 몸에서 정말 중요한 기능입니다. 평소는 그저 천하게 생각할런지 몰라도 우리 몸에서 귀하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도 동일합니다. 교회의 성도들도 동일하게 모든 사람들이 매우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소중하게 대해야 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성입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로 나아갈 때 거기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라고 하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교회의 표어가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 함께 하는 공동체 복음의 증인이 되는 성도 공동체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함께 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식, 이런 마음을 지닌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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