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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성도님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을 교회에 와서만 기억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순간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가 됩니다. 특별히 우리의 마음이 상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자존감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지 않고 점프해서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고 지키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로 인해서나 아니며 어떤 어려움으로 인해 나의 마음이 상했는데, 그것을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덜 사랑하는가봐’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나에게 닥친 환난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인처럼 생각한다면 이런 경우는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제로섬(Zero Sum)의 게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게임은 한 쪽의 득점(이익)이 다른 쪽에 실점(손실)이 되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 세상에 모든 물질과 재화가 일정량이 있는데,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나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더 많이 가지게 되면 다른 사람은 덜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회사에서 사원을 한 명 뽑는다고 광고가 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대학교 졸업생과 그의 친구, 이렇게 두 명이 입사 원서를 냈습니다. 그러면 둘 중에 한 사람만 그 회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부득이 다른 한 사람이 떨어져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로섬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제로섬 법칙이라는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려면 부득이 저 친구의 것을 빼앗아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학교에 합격시켜 주시려면 불가불 나의 친구는 학교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내 친구나 동료가 잘 되는 것을 봐주기 힘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축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믿음의 분량이 모자라기보다는 우리의 하나님 이해에 대핸 제한된 생각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얼마나 부요하신 분이신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엄청나게 복주시고도 또 나도 얼마든지 부요하게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느라고 나에게 줄 복이 모자라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주 목사를 예쁘게 보셔서 엄청나게 축복하신다고 해도 하나님은 다른 성도님들에게도 주실 복이 충분합니다. 그러니 혹 목사가 복을 많이 받는다고 해도 이로 인해 시기하지 말 것입니다. 저도 성도님들이 복 받는 것에 대해 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님들이 복을 받는다고 나에게 올 복이 줄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좋은 자동차를 사셨습니다. 자동차를 사시고는 저에게 ‘목사님 미안합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 분이 자동차 사시는 것을 보면서 참 많이 기뻤습니다. 저는 그가 절대로 제가 받을 복을 빼앗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만물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나왔고, 다시 주님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해도 결국 주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부족해도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얼마든지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옆 사람을 보면서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현대인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상대적 박탈감으로부터 성도는 자유 해야 합니다. 남이 가진 것을 보면서 박탈감을 갖는 것은 신앙적이지 못합니다. 당당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 나에게도 풍성하게 채우시는 분이심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1절 앞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로마서를 계속 보면서 오늘로서 매우 중요한 점을 넘어섰습니다. 로마서는 크게 1-11장까지 한 부분이고, 12장부터 끝까지 다른 한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런 면에서 12장 1절은 새로운 시작의 첫 절이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난 1-11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모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으로서 멸망 받을 운명에 처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아무 공로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의롭다 칭하셨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사랑)에 근거해서 성도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 주시는 말씀을 들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 자비하심, 즉 사랑에 대해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이 전제된 권면입니다. 이 사랑을 잊어버리면 주님의 권면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옆 사람과 인사해 봅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을 Barclay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너의 몸과, 네가 매일 해야 하는 모든 일들과, 그리고 상점, 공장, 조선소, 광산의 매일의 일 등, 이 모든 것을 예배 행위로써 하나님께 드리라.” 즉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자신의 몸과 그 몸으로 매일 행하는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정교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장엄한 의식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매일 매일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교회당 안에서 행하는 어떤 행사가 아니라 온 세상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고, 모든 일상 행동을 한 예배 행위로 보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란 축도와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린 후에도 우리의 삶의 전 영역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우리의 삶의 영역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을 신뢰하며,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때 먼저 딱 굳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자유롭지 못하고, 맘대로 행동하거나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장실을 가도 자유롭지 못하며 나쁜 말이나 나쁜 습관을 행할 때도 가장 거추장스런 분이 바로 하나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거룩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약한 면과 부족한 면을 가장 잘 아시고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남편이나 내 아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우리 하나님은 이해하고 용납하십니다. 때로는 남편도 아내도 우리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조력자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가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약해서 쓰러져 있을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 등을 두드리시며 조용히 격려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보라고 하십니다. 엘리야가 악한 이방 선지자들과 싸운 후에 지쳐 있을 때 그리고 더 이상은 선지자 노릇도 못하겠다고 불평할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가가셔서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가 다시 힘을 내어 일어날 때까지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보내주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욕을 하면 반드시 본인에게 전달되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로 인한 상처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욕하면 절대 새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약한 모습을 오히려 위로해 주시고 불편했던 사람과도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과 동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할 때만 예배가 아니라 사실 진정한 예배는 격식을 갖춘 예배가 끝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신나는 일인지를 경험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배하면서 삶의 일상적인 자리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께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 분의 아이디어와 지혜를 얻습니다.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맡길 때, 그리고 그 분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지혜롭고 풍성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자의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의미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자의 삶에 대해 2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첫 번째 말씀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란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삶의 원리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를 다시 지적한다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제로섬의 원리’입니다. 요즘은 블루오션이나 레드오션이니 하는 말도 있지만, 이 말도 역시 결국은 ‘제로섬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로섬이 무엇입니까? 남이 불행해져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이 적게 가져야 내가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려면 남을 밟아야 합니다. 끝까지 싸워야 하고, 끝까지 빼앗아야 합니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빼앗은 사람은 끝까지 따라가서라도 다시 빼앗아 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이 원리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그것은 세상의 원리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야 합니다. 어느 자매가 두통 때문에 고통스러워 어느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목사님은 뜻하지 않은 요청을 받고 그 자매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지도 않은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자 그 자매가 그 때부터 한 없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매는 어려서부터 의붓아버지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로 인한 원한이 그의 마음이 깊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늘 미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받은 후 그 자매는 더 이상 두통으로 고통을 겪지 않았으며,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고, 아버지를 미워하던 자기의 감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받은 대로 돌려주고, 당한대로 갚는 원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친히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우리를 모든 억압과 미움과 아픔으로부터 자유와 용서와 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삶의 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다른 성경(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딴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법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여러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지를 각자의 경험을 통해 알아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단지 말로만 들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더욱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뿐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어느 목사님에게 와서 복잡한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니 이 분은 신앙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하나님을 좀 아십니까?” 이 때 아주머니는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십니까?”라고 되물었다는 것입니다.이 질문에 목사님은 “저는 잘 모릅니다.”라고 하고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순간순간 놀랄 따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을 경험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그 분을 먼저 신뢰하고 믿음으로 그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 분의 존재가 처음에는 희미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 분의 존재가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 분은 나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절대자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분과 동행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제롬 하인스(Jerome Hines)의 소원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 무대 위에 서서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표를 향해서 피나는 연습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페라단의 가수가 되자마자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 온 것이 겨우 이것이었단 말인가 하며 말할 수 없는 공허에 빠져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전도대회가 방영되고 있었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하시기 직전에 한 사람이 나와서 찬양을 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라는 찬양을 죠지 베버리쉐아(George Beverly Shea)라는 분이 바리톤의 영감 있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롬 하인스는 충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도 충분히 좋은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저기서 노래를 부를까 의아해 하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날 그는 설교 말씀을 통해 죄악 속에 있던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텔레비전 브라운관 앞에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페라 무대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 달라진 목적을 위해 오페라에 섰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10여년을 그렇게 보냈는데, 어느 날 오페라 작품의 주인공으로 뽑히게 되었고, 계약서에 사인을 한 후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연습을 하면서 춤을 추는데 거의 나체 춤을 추어야 했고, 본래의 작품에는 없는 저질스런 욕설을 노래로 불러야 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아파서 항의하고 그런 가사로는 부를 수 없다고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계약을 파기 하고, 계약 파기에 대한 벌금까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오페라 가수 직을 떠났습니다. 그의 간증집에 보면 그가 오페라단 사무실에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그 순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소로 진정한 기쁨을 경험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무는 뉴욕의 밤거리를 걸어 나오면서 그는 자기에게 감동을 주었던 찬양을 불렀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예수를 믿는 것이 꼭 어떤 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다윗은 왕이 되었으며, 다니엘도 바벨론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보아야 할 것은 진정한 예배자의 삶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고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제롬 하인스는 오페라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근거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내려 놓았을 때 그는 더 큰 기쁨을, 아니 생애에 헌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아픔을 가지고 다가갈 때 그 분은 우리가 자신의 허물을 가지고 부끄러움을 가지고 다가갈 때 우리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롬 하인스 같이 세상의 그 영광스런 자리를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멋진 사람입니까?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즉 사랑을 아는 자의 삶이 아닐까요?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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