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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츠빌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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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수가라는 마을 부근에 있는 한 우물 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보다 더 천하게 여겨지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 랍비들은 여자에게는 율법도 가르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여자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여인은 전에 남편이 다섯이나 바꾼 적이 있었고, 지금은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어떤 남자와 함께 동거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 여인은 가장 더럽고 불결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을 예수님께서 만나고 있습니다. 시간은 제 6시, 지금으로 하면 낮 12시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상황으로 보면 낮 시간은 매우 뜨거운 날씨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낮시간에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에 물을 길으러 온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물을 좀 줄 것을 요청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 말 속에는 빈정거림이 분명 있었습니다. 이 말은 마치 ‘당신은 유대인 나리가 아니십니까? 어찌 그리 고상하신 선생님께서 나 같은 천한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자신의 내면을 위장하기 위해 오히려 상대방의 제안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려주려고 하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계속된 대화를 통해 이 여인은 자기 안에 있는 적어도 세 가지의 갈증을 드러냈습니다. 첫 번째 갈증은 생수에 대한 갈증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수에 대해 말씀하시자, 이 여인은 금방 “그런 물을 내게도 주셔서,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생수에 대한 갈증은 이 여인이 경험하는 사회적 시선에 대한 갈증입니다. 부끄러운 삶을 살아온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순간 다시 화제를 바꾸었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인이 대답합니다. “저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자기의 치부가 드러났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이 노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에 이 여인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이시군요.” 이 말도 거의 반사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 여인은 ‘내가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든 아니든, 당신이 내 인생에 무슨 상관이냐’고 응수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하며 반응했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의 두 번째 갈증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선지자일 것이라는 반응은 그 여인의 마음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영적인 갈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면입니다.

세 번째 갈증은 그녀 스스로 먼저 주도적으로 표출합니다. 그것은 예배에 대한 갈증입니다. 여인은 이어서 예수님께 먼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 즉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고, 또 그것이 옳다고 가르쳐 주셨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더이다(20절).”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율법도 모르는 여인이었고,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도 가장 천대받고 살아갈 만큼 타락한 모습의 전형인 이 여인의 입에서 예배에 대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교회 나와서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면 코방귀도 뀌지 않을 것 같은 여인이 먼저 예수님께 예배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자의 마음 속에는, 아니 그 여인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영적 갈망,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자의 문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배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즉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그녀의 예배에 대한 관점과 방향을 조정해 줍니다. 어느 시대 건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장소와 형식이 아니라, 예배자가 어떻게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반응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배에 대해 중요한 두 가지 점을 깨닫습니다. 첫째는 예배자는 자기가 오픈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해 더욱 강한 영적 갈증을 가지고 나아갔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둘째는 예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예배(제사)에서는 백성들이 각기 자기 제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서 제사장의 도움을 받아 제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스스로 동물의 각을 뜨고, 그 예물을 친히 불에 태움으로 번제로 드립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예배자에게 이 동물이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되었음을, 그리고 그로 인해 죄 용서를 받았음을 선언합니다. 그러면 이 예배자는 죄 용서의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예배의 강력한 요소 중에 하나는 간증이었습니다. 한 주간 생활하면서 주님과 함께 했던 은혜를 예배를 통해 나누고, 고백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간증을 통해 역시 그들의 죄도 들어나고, 그들의 약함과 받은 은혜, 그들 속에 있는 허물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간증을 통해 그들은 세상에서의 삶과 교회에서의 예배가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두 시대의 공통적인 특징은 예배자가 바로 예배의 참여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배의 주최였습니다. 그 예배를 인도하고 안내하는 제사장과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사실 돕는 자였고, 예배자가 제물을 통해서, 혹은 간증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예배에 스스로 참여했습니다.

오늘의 예배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풍성합니다. 풍성한 음악과 세련된 예배의 형식, 수 많은 음향장비와 화려한 예배당을 통해 멋진 예배를 이루어냅니다. 하지만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참된 예배자가 더 중요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볼 때, 현대 예배에서 예배자는 예배의 적극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관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예배자는 관객일 뿐입니다. 결코 예배의 중심에 서지 않습니다. 목사는 배우이고, 하나님은 예배의 감독쯤 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관객은 남의 이야기만을 듣고 보고 즐기고 갑니다. 때로는 남의 이야기, 그것도 가상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현대인의 회개입니다. 거기에는 조금도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습니다. 확실히 오늘날 교회는 그렇게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의 예배자들은 삶의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숨겨주는 좋은 피난처가 됩니다. 주의 십자가가 자신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피상적으로 붙들고, 모든 죄를 무마시켜 버립니다. 더욱이 교회의 여러 가지 직분으로 자신을 포장하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참여자가 되는 것과 관객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보십시오. 우리가 영화관을 갈 때 우리는 그저 10불만 가져가면 대부분의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배우들의 탁월한 재능과 현대 첨단 기술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만든 영화를 보고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문화의 장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문화를 현대인들은 즐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도 그런 마음으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온갖 영상과 기술을 동원해서 감동을 유도합니다.  얼마간의 헌금을 드리고, 현대 첨단 기술로 만든 영화만큼은 못해도, 그럭저럭 마음의 죄책감을 덮을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때로는 10불도 안 되는 돈이 아까워서 복제판 CD, DVD가 유행합니다. 교회도 동일합니다. 동일하게 복제판이 돌아다닙니다. 아니 교회는 한 수 더 떠서 인터넷에 아예 복제판 예배영상을 올려줍니다. 굳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인을 주고 있습니다. 본 교회에서 다 채우지 못한 영적 기갈을 채우기 위해 언제든 자신의 교회 사이트에 들어오면 남은 기갈을 채울 수 있다고 호객행위를 합니다.


2월 5-7일에 부흥회를 합니다. 남가주 서머나교회에서 사역하시는 김성수 목사님께서 오십니다. 아주 좋은 목사님이십니다. 많이 알려져 있는 목사님이십니다. 벌써 김성수 목사님께서 우리교회에 부흥회를 오신다고 하니, 동부지역에 있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우리교회에 와서 부흥회에 참여하려고 문의를 해 옵니다. 벌써 6~7통화는 받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전화를 받으면서, 몇  통화를 빼놓고는 전화를 받은 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영화관의 티켓 판매원에게 전화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본인을 밝히지도 않고, 왜 전화를 했는지도 말하지 않고, 어디서 전화한다는 이야기도 없고, 전화를 받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도 없습니다. 그냥 부흥회의 시간(공연시간)을 확인하는 질문과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는지, 얼마나 걸리는지를 묻는 질문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영화관에 전화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영화관에 전화하면서 자신을 결코 밝히지 않습니다. 내가 왜 그 영화를 보려고 하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전화 받는 사람은 누구인지, 혹시 이름은 무엇인지 알아도 되겠냐는 말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낭비입니다. 교회와 영화관은 너무도 다른 것을 저는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마치 영화관을 찾듯이 그렇게 찾아간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니, 자연스럽게 제가 어디서 오시냐고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 중 몇 분은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오시는 분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이곳까지 올 정도로 열심과 열정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2박씩 호텔에 머물면서 은혜를 사모한다면 그들은 분명 그들의 교회에서도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 속에 샬롯츠빌 한인교회는 영화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꼭 그분들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전화하셨던 그분들을 통해 투영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적 갈망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으면 그것을 은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같긴 합니다. 분명 예배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오고, 뉴욕에서 달려오지만, 사실은 영적 갈망이기 전에 왜곡된 갈망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관람객으로 옵니다. 자기 고백도 없고, 상대방에 대한 관심도 없고, 마치 영화관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매표원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아니 가질 필요도 없는 것과 같이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조차도 매표원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현대의 대부분 성도들은 참된 갈망 대신에,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 대신에, 자기를 오픈하고, 자기 고백, 간증, 삶의 나눔, 예배에의 직접적인 참여 대신에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채워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 풍성한 삶, 더 좋은 자동차, 더 좋은 주택, 더 좋은 직장을 하나님의 은혜의 전형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으로만 채워져야 할 은혜를 선포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속적인 물질과 명예와 사회적인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이 기도하고, 말씀을 읽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는 장소의 문제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처럼, 오늘 우리들은 예배를 통해 마치 영화를 구경하는 관객처럼 그냥 남의 이야기나 듣고 웃고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현실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 더 불행한 삶을 추구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교회도 가끔 간증을 하지만, 저는 간증하기 전에 반드시 원고를 정리하도록 부탁하고, 간증을 할 때는 반드시 원고를 보고, 원고 대로만 읽도록 합니다. 간증이 소중한 것이지만, 현대 교회가 간증을 자꾸 꺼리게 되는데,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간증조차도 자꾸 포장되기 때문입니다. 간증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내어놓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이미 자신을 포장하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간증에 포장을 하게 됩니다.

현대 예배자들 가운데 영화에서 주는 감동과 예배를 통해 경험하는 영적 도전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히 구분하고 경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철저하게 자신을 가리고, 신분 상승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주소가 아닐까요? 함께 기도를 하고, 함께 찬송을 해도,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이야기를 별로 들어볼 기회가 없습니다. 가르치려고만 하고, 무슨 영적 영웅심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와 세상이 아무 것도 다른 것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진정으로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삶이 없습니다. 교회에 와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나눌 간증이 없고, 함께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어떤 것이며, 참된 예배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는 찾으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배당을 영화관으로 혼돈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친히 자기 삶을 가지고 나와서 주님 앞에, 그리고 성도 간에 고백과 나눔, 간증이 없다면 이것은 진정한 예배일 수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 자신이 깨어지고 부숴지는 역사가 없으면 참된 은혜도, 기쁨도, 능력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배를 통해 참된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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