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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혼인을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사)이라고 말했습니다. 결혼은 생명의 출산을 가능하게 하고, 기쁨을 기대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가장 가까운 모형입니다. 결혼 없이 생명은 출생할 수 없습니다. 결혼과 출산은 함께 가는 것이고, 출산이라는 놀라운 과정을 통해 생명이 탄생하는 신비로움을 경험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창세기 1장을 비추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그리고 빛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창조의 회복입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안에는 생명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그 생명 안에는 무한한 기쁨과 약동하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의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은 이런 맥락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사건과 요한복음 1장의 창조의 회복인 구원 역사에 이어지는 아주 자연스런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를 경험하게 합니다.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얼마나 예쁘고 아름답습니까? 지난 주일에도 우리 교회에 한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월요일에 가서 보고 기도하고 왔는데,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 생명의 은혜를 주신 것은 부자들이나 권력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생명의 신비를 맛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과 함께 창조적 역사를 이루시는 또 하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가정은 육체적인 생명을 낳고 기뻐하지만, 교회는 영적인 생명을 낳습니다. 자기를 닮은 자기 자녀를 낳는 것도 엄청 기쁜 일이지만, 교회를 통해 믿음의 선조들을 닮아 영적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 육체적인 생명보다 결코 작지 않은 기쁨을 줍니다. 영적인 생명을 낳는 기쁨을 맛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장성해서 자연스럽게 만나 좋아하고 사랑하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난 후 귀한 생명을 낳듯이, 교회도 주님을 닮아가고,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그런 교회 안에서의 자연스러운 나눔을 통해 교회 안에 영적인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늘 혼인잔치집에 보니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는 이스라엘 지방에서 음료를 대신해서 사용하는 필수품이고, 혼인집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음식입니다. 당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들에게 수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런 일이 생기면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일로 인해 혼인 집은 얼마나 낭패를 당해야 했겠습니까?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삶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의 인생이 마치 포도주가 떨어진 가나 혼인 집과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항상 우리는 뭔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식 날조차도 뭔가 더 풍성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구하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결혼식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기쁨을 누릴 여유가 없습니다. 언제나 꿈은 내일을 위한 것이며, 오늘은 무엇인가에 대한 결핍증을 앓고 있는 환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만족도 기쁨도 없이 늘 아쉬움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일로 재판석까지 가야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혼인집의 딱한 사정을 아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요한복음에 7가지 표적 사건이 나오는데, 매 사건마다 주님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을 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서 이 사건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표현은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고 연결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때’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말씀하시는데, 하나는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시고, 후반부로 가면 ‘내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으로는
7:6, “내 때는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7: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당신의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27, “지금 내 마으미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왔나이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리라.”
17:1. “어버지여 때가 으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내 때’라고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고 인간을 구원하실 구속의 역사를 이루실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통해서 주님은 비로소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방법으로 당신의 십자가의 사건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아직 내가 십자가를 질 때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이 혼인집이 안타까운 상황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 기쁨, 능력, 은혜, 감격을 보여주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진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편으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나 혼인 집에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심으로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맛보게 하려고 의도하셨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직은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 모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1절을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표적이라는 말은 기적이라는 말과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기적은 miracle입니다. 표적은 semeion, 즉 sign입니다. 기적은 인간이 보통 경험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인이라는 뜻의 표적은 더 중요한 것, 혹은 진짜의 어떤 것을 가리키는 표시를 말합니다.

즉 Fairfax를 가고 있는데, 29번 도로에 Fairfax 50마일이라는 사인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Fairfax까지 가려면 50마일을 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인에 Fairfax라고 쓰여 있다고 해서 그곳이 Fairfax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인은 무조건 많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인은 적절하게 있으면 됩니다.

본문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기적이기 이전에 표적입니다. 표적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기 위해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또한 그것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그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날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를 믿으면 됩니다. 만약 Fairfax로 가는 사인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본래의 목적지를 찾아가지 못하고 81번 도로, 95번 도로, 66번 도로 등을 동분서주하면 다녀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계속 졸라댑니다. 여기서 표적을 보여달라는 말은 당신을 아직은 못믿겠으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확증할 수 있는 더 분명한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너무 잘 이해될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이 혹시 그들과 같지는 않습니까? 사실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기적이기 이전에 표적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하나님은 여전히 기적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시는 사건은 모두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여전히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는 한 기적은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회를 하면서 간증을 하는데, 옛날 같으면 화가 나고 분노할만한 일들이 자신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평안을 주셨다고 고백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모든 것은 다 기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함으로 우리는 그런 은혜를 누립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표적을 구하는 신앙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가나의 혼인 집에 가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놀랍습니다. 소문이 온 동네, 아니 다른 동네까지 다 났습니다. 잔치집마다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만의하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포도주가 떨어지면 주님께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할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요청합니다. 단번에 판단이 되지 않습니까?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한 번 포도주가 떨어져서 낭패를 보았으면 둘째 아들을 장가 보낼 때는 더 잘 준비해서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이 표적은 주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가나 혼인 잔치 집이 주님이 행하신 역사로 인하여 은혜를 누린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보게 하는 목적이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표적의 결과입니다. 표적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표적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표적이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후를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 놀라워하는 감격과 기쁨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만 연회장과 하인들에게만 카메라가 다가갑니다.

연회장은 하인들이 가져온 포도주를 맛보고 놀라워합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기쁨의 소리입니다. 감격스럽고, 고맙다는 인사였습니다. 혼인집에 감사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하인은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천한 신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만이 이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이 포도주가 어떻게 난 것인지 연회장도 모르는데, 아니 신랑도, 신부도 모르는데, 하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1) 이 혼인 집에서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같이 기뻐합니다. 모두가 더 같이 만족해 합니다.

모두가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기쁨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누구도 이 기쁨에서 소외되지 않습니다. 다 같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천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교회는 그런 천국의 기쁨을 찾아가고 있습니까?

두 번째는 신비롭게도 다른 사람이 누리는 기쁨 때문에 내 기쁨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혼인집에서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은 혼인하는 신랑과 신부 당사자들입니다. 그들은 물론 이 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회장도 덩달아 같이 기뻐합니다. 신랑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고 있었냐고, 대견한 일을 했다고 칭찬하고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쁨은 또 얼마나 컸을까요? 11절을 보면 이 일을 보고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이 나의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하고, 내 기쁨이 다른 사람의 기쁨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밑에서 섬기고 일하는 하인들의 기쁨을 볼 수 있습니다. 연회장은 신랑을 보고 칭찬하며 이야기하지만, 실상 그 비밀을 알고 더 기뻐하는 사람은 바로 하인들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3) 마지막 세 번째 보여주는 천국의 특징은 섬기는 자에게 더 큰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이 역사에 참여함으로 정말 참된 기쁨을 누린 사람들은 바로 하인들입니다. 그들은 뒤에서 빙그레 웃으면 기뻐합니다. 기쁨의 실체를 압니다. 기쁨의 본질을 압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9절).” 그들만 진짜 기쁨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남들은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데, 남들은 나를 아는체도 하지 않는데, 내게는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자리에서 남들이 하기 힘들어 하는 섬김을 하고 있지만, 그 자리가 곧 남이 발견하지 못한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자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릴 천국의 기쁨을 간접적으로 보게 해 주는 그림자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때에 십자가를 통해 이루실 구원의 역사는 바로 이런 놀라운 기쁨과 감격의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천국의 모형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입니다. 가정은 육신의 생명을 출산하는 곳이고, 교회는 영적인 생명을 출산하는 곳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생명의 기쁨을 누리고 살아갑니까? 우리 가정에는 이런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는 이런 생명의 기쁨의 사건이 일어납니까?


저는 우리 가정과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정말 이것이 진짜 교회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제로섬 게임이 적용되는 곳이 아닙니다. 남이 잘 되면 내가 안 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눌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하인의 기쁨에 참여하기를 촉구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천국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주님을 알아가는 은혜입니다. 섬김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낮아짐이 없이, 겸손이 없이, 기꺼이 내려앉는 순종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감격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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