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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왕은 남 유다 스무 명의 왕들 중에 16번째 왕으로, 마지막 종교개혁을 이룬 왕이다. 이스라엘 남 북 왕국, 그리고 통일왕국 전체 42명의 왕들 중에 가장 마음을 저리게 하는 왕이 요시야다. 그는 여덟 살에 왕이 되어 31년 간 남 유다를 통치하고, 39세에 애굽 왕 느고와의 므깃도 골짜기 전투에서 전사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므낫세의 아들 아몬이었다. 아몬은 22세에 왕이 되어 2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24세에 그의 신하들의 반역으로 궁중에서 암살 당했다. 요시야는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다. 그것도 왕의 신하들에 의한 죽음이었다.

그는 여덟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왕이 되기를 원했을까? 사람들이 겉으로 보고 부러워하는 왕의 화려함과 위엄, 권력을 그도 꿈꾸었을까? 그는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요시야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이 여덟 살에 왕이 되어서, 더 승진하는 것도 아니고, 더 높아지고 싶은 마음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올라갈 만큼 올라갔다.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가 꿈 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는 밤마다 아버지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로 악몽을 꿨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성도님들 가운데도 그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지 모른다. 이것은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라고! 이런 삶은 내가 본래 소망하고 꿈 꿔왔던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긴 믿지만, 그 하나님도 늘 원망의 대상이 될뿐, 자신의 삶에 어떤 소망도, 능력도 주지 못하시는 분처럼 느끼면서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요시야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어린시절은 공포가 지배했다. 왕궁에 많은 군사들이 그를 지켜주고 있지만, 그가 누구를 믿을 수 있었을까? 그가 어디 하루 밤인들 편하게 잠들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은 어둡지 않았다. 불행한 과거가 그의 인생을 고통스럽게 붙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찾았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자라고 성장했다. 그에게는 하나님게서 주시는 생명이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멋있고, 존경받는 왕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을 믿으면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으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DNA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닮아간다.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세계까지 이어지는 것이지만, 그 시작은 바로 지금 이 자리로부터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이 확신을 가지고 산다.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을 통해 일하셨던 것과 같이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같은 역사를 이루신다. 기대가 된다. 소망이 생긴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다시 일하고 싶고, 다시 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이 소망과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절대로 상황이나 환경으로부터 오는 마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요 능력이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는 이런 능력과 소망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기뻐하며 찬송하며 살아갈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형편에서도, 어떤 위기 속에서도 승리한다. 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늘 악몽에 시달리는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붙잡으라. 그러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요시야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삶이 회복되었는가? 요시야를 보자. 요시야는 여덟 살에 아버지(아몬 왕)가 죽고, 왕이 되었다. 그가 왕이 된 지 8년 후에, 즉 16살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다고 말씀한다. 그러면 16살까지 무엇을 했을까? 그가 하나님을 몰랐을까? 여기서 하나님을 비로소 찾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동안 그는 방황했다. 하나님께 자기 삶을 맡기지 못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신하들의 암투와 시기, 음모는 계속 되었을 것이다. 8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난 후 요시야는 비로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세워가기로 작정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책임지실 분임을 비로소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예루살렘과 유다 지역에 우상들을 허물기 시작한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 후 4년이 지나서야 그는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는 여전히 성전에 우상이 세워져 있었고, 백성들은 예루살렘과 유다 각 도시마다 온갖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 때부터 요시야 왕은 무려 6년 간 우상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26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성전을 수리한다. 그동안은 성전 안과 밖에 있는 우상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했다면, 이제는 성전을 수리하고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처소로 만들어 간다. 이 일은 그가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 후 적어도 10년이 지난 후였다. 요시야는 느렸지만, 지속적으로 성장해갔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끝까지 세워가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왕이었지만, 자신과 백성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어떤 것일까? 구원이란 무엇일까? 구원 받으면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우리에게 나타난 변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변화한다. 자라간다. 지속적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성장이 멈춘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죽은 것과 같다. 자라감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성인이 되려면 20년은 지나야 한다. 그래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숙한 삶의 상태에 오른다. 이 성장을 5년 혹은 10년이 마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런 기다림은 당연한 것이다. 하물며 영적인 성장은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신체적인 성장은 어떤 면에서 정상적인 식생활과 환경이 갖춰지면 자라가지만, 영적인 성장은 그렇지 않다. 영적인 자라감은 훨씬 더 많는 수고가 필요하다. 시간이 필요하다.


이 점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한다. 참 안타까운 일 중에 하나는 스스로 다 자란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 그런 마음이 있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자라가기를 힘쓰지 않는다. 성장하기를 멈춘 사람이다. 배우려는 마음이 없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가려는 열망을 잃어버렸다. 우리 안에는 그런 마음이 있는가?

이런 마음은 교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사도 바울이 경고한다. 그런 마음이 눈을 통해 보인다. 그의 시선을 통해서 그 마음을 드러낸다. 자세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런 것은 감출 수 없다.

성장을 멈춘 이유 중 하나는 교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마음이 대부분 우리 안에 다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목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성장을 멈추게 하지 말라.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진단해 보라. 그리고 계속 자라가려는 마음을 가지도록 힘쓰라. 영적인 면에서,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라감을 추구하고 있는가?


또 다른 안타까움은 환경 때문에 자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직장과 사업, 학업 등으로 힘든 상황들을 보낸다. 때로는 자녀들로 인한 아픔을 겪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쉽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려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기억하자.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그 분 안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뭔가를 위해 뛰고 싶고, 달리고 싶고, 무엇인가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그래서 밤잠을 설치면서도 하고 싶은 열정과 의지를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증거다. 우리들에게는 이 생명이 있는가? 이런 구원의 경험, 그러니까 주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역동성은 반드시 고난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한계점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주님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지점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시점에서 주님이 오신다. 그리고 말씀하시고, 힘을 주시고, 은혜를 부어주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지점에 오면 하나님을 오히려 멀리 한다. 더 다가오지 못한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이런 한계 상황에서 주님을 만난다. 야곱도 그랬고, 아르바함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다. 왜 그럴까? 바로 그 지점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지점이며, 하나님을 갈구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바로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지점인 경우가 많다.

요시야 왕의 불행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상황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구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느냐 찾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결단에 달린 것이다. 하지만 그 고난의 시점이 필요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세상의 피곤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더 찾고 나아가야 할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을 정말 간절히 만나야 하는 때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볼 수 있는 시기이다.

믿음은 결코 삶을 편안하게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구원은 죽은 후에 편안한 곳을 가기 위한 안전 장치가 아니다. 구원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고난을 이기며 악과 죽음을 정복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라. 주님을 향하여 더 높이 나아가라.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이 죽기보다 더 힘들다고 생각되면, 차라리 그렇게 주의 명령을 따라 살다가 죽겠다고 결단하라. 그것이 바로 진짜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좀 편하면 한 발 들려놨다가, 좀 어려우면 한 발 슬쩍 빼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도, 능력도 맛볼 수 없다.


요시야 왕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또 하나는 그의 철저한 개혁 작업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예루살렘과 유다 전 지역을 다니면서 모든 우상을 부수고 빻고 태워버렸다. 심지어 그는 북 이스라엘 지역까지 올라가서 이 작업을 넓혀갔다.
본문에 나오는 지명을 보라. 6절이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였다”고 말씀한다. 요시야의 개혁은 철저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멸망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갔고, 그 지역은 얼마 안되는 남은 자와 다른 나라에서 역시 끌려온 포로들로 의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만 겨우 있을 뿐이었다. 북 이스라엘의 온 천지는 다 황폐화되었다. 그런데 요시야는 그곳까지 가서 모든 우상을 끌어 내리고, 불태워버리고, 빻아버렸다. 그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세울 때 우리에게도 이런 개혁이 필요하다. 우리도 이런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 삶의 구석구석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사람들은 주님 앞에 변화를 시도하다가도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 멈춰버린다. 스스로 그 지점을 정한다. 그리고 더 이상 가까이 나아가기를 주저한다. 주님의 품 안에 깊이 안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안에 얼마나 놀라운 보화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늘 항상 영적 은혜의 주변에서만 맴돌다. 그리고 더 확실한 것이 있으면 나아가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다시 보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받고, 불순종할 때 그 인생이 형통할 수 없다고 말씀한다. 이 분명한 기준을 성경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가치관은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다. 세상의 방법을 따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 추구는 하나님 앞에서 쓸모 없는 일이라고 말씀한다. 세상을 택하든지, 하나님을 택하든지, 둘 중의 하나의 결단을 촉구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결단을 촉구한 말씀이다.

오늘 우리들도 동일한 말씀 앞에 섰다. 우리도 결단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두 가지 길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우리의 영적인 개혁은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두 길을 다 가려고 해서는 결코 우리 인생에 승리할 수 없다.
오늘 말씀 앞에서 결단하자.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고, 우리의 머뭇거림을 뒤로 하고, 적당하게 모양만 갖추는 삶을 벗어버리고, 전적으로 주님을 향해 나아가자.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조건임을 기억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기대하자. 성장의 속도에 민감하기보다 성장의 지속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자. 그것이 승리하는 길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런 결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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