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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1-2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전 700년 경에 남 유다에 선포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는 말씀의 일부이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이름으로 된 열 두 지파의 이름에서 유래한 지역명이다. 이들은 가나안에서 가장 북쪽의 땅을 얻어 정착한 지파들이었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장 괴롭혔던 앗수르, 바벨론과 같은 나라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북동쪽 나라들이었다. 이런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스불론과 납달리는 늘 강대국들의 침략에 가장 빈번하게 노출된 지역이었고,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변방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을 건축한 후, 그동안 물자를 지원해 준 두로 왕 히람에게 갈릴리 땅의 성읍 스무 곳을 주었다(왕상9:11). 변방에 있는 이 지역은 정치적인 이유 혹은 다른 이유들로 인해 늘 다른 나라에 복속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두로 왕 히람은 솔로몬 왕으로부터 받은 이 땅이 맘에 들지 않아 다시 솔로몬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곳에 성읍들을 건축했고, 그곳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주하게 했다고 성경(대하8:2)은 기록하고 있다. 즉 되돌려받고 성읍을 짓고 의도적으로 그곳으로 이주정책을 해야만 했던, 그만큼 이 지역은 인기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 또한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점령할 때 제일 먼저 점령했던 지역이 바로 갈릴리와 납달리 땅이었고, 그 지역의 백성들은 앗수르로 사로잡혀 갔다고 말씀하고 있다(왕하15:29). 그야말로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이방인의 군화발에 빈번히 짓밟혔던 곳이었고,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을 간직하지도 못하고 살았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도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로 언급될만큼 천대받는 곳이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은혜의 말씀을 선포한다. ‘고통 당하던 자에게 흑암이 없을 것이다. 멸시 받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이다. 주전 700년 경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장차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이 땅에 보내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메시야가 오시는 곳이 바로 이방의 갈릴리 지역,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이 예언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6절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그려준다. “이는 … 그의 어깨에는 정사(정권, 권력)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Wonderful-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라 모사(Counselor, 지략가)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는 메시야가 누구인가? 이 메시야는 지금 유다가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는 메시야다. 그들은 지금 그런 메시야가 정말 간절히 필요하다. 남 유다는 지금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앗수르의 공격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빨리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 강력한 통치자가 필요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이방 땅 갈릴리에서 오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사야는 궁중 선지자였다. 유다 백성들이 위기 가운데 있는데, 선지자라고는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선언하지 않고, 이방 땅 갈릴리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이런 예언이 당시 정치적으로, 상황적으로 가능했을까? 사람들이 이 예언을 바르게 들었다면 과연 그의 예언을 잘 수용했겠는가? 이사야가 궁중 선지자로서 이렇게 예언할 수 있는가? 돌 맞을 일 아닌가?

하지만 이 예언에 바르게 응답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남 유다 왕 히스기야였다. 물론 본문은 이사야서 전반부에 있는 것으로 봐서, 그리고 7장에서 이어지는 맥락으로 봐서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 때 선포된 예언 같다. 하지만 그런 예언은 히스기야 때까지 지속되었고, 히스기야는 왕이 되기 전부터 이 이사야의 예언을 들으면서 기도했을 것이다. 이 예언에서 히스기야가 반응한 것이 무엇일까? 히스기야 왕은 이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방의 갈릴리에 임할 메시야. 왜 메시야가 이방의 갈릴리에 빛을 비추신다고 하는 것일까? 가난하고 천대받는 땅 갈릴리, 수없이 이 나라, 저 나라에 복속되면서 자기 민족에 대한 정체성도 잃어버린 백성들,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사람들, 자기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 왜 메시야는 그들에게 빛을 비추신다고 하시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자신을 바라 본다. 자신이 지금 거의 그런 지경에 와 있음을 발견한다. 의지할 곳 없다. 나라가 위기를 맞았지만, 왕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백성들 앞에 권위를 드러낼 것도 없고, 칼을 휘두르며 왕의 위엄을 행세할 여유도 없다. 백성들은 왕만 바라보고 있다. 뭔가 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너무도 허약하고 무기력한 자신을 본다. 히스기야 왕은 자기 자신 안에서 갈릴리 백성의 마음을 보았다. 갈릴리 백성들의 마음이 바로 이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갈릴리에 보내시는 이유도 깨닫는다. 그리고 갈릴리 사람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것은 가난한 자의 마음이다. 과부의 마음이고, 고아의 마음이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가슴에 갚이 와 닿는다. 깊이 꽂혔다. 그리고 갈릴리에 오실 그 메시야, 그를 보내실 하나님이 바로 내 하나님이심을 깨닫는다. 여기에 그의 기도가 폭발한다. 그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성전으로 들고 가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17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18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 땅을 황폐케 하였고, 19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20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사37:16-20) 히스기야의 기도가 결정적으로 유다를 앗수르로부터 구원하게 된다. 그의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루살렘을 구하게 된다. 무려 185,000명의 앗수르 군사가 하루 밤에 죽어나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다.

오늘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디로 오실까? 이 시대의 갈릴리는 어디인가? 우리 교회는 이 시대의 갈릴리인가? 그렇게 아파하고 고통 받는 자들이 모인 곳인가? 우리에게 과부의 마음이 있는가? 우리에게 고아의 마음이 있는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의지할 곳 없어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심정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가?

6절을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문학적으로도 놀라운 표현이다. 한 아기는 연약함을 상징하면서 인간으로 오실 메시야를 보여준다. 한 아기와 한 아들은 같은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는 히브리어의 전형적인 강조용법이다. 하지만 한 아기와 한 아들은 그런 강조용법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한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 아들’은 메시야의 신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무튼 본문에서 한 아기와 한 아들은 연약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는 ‘아담’처럼 어른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는다. 메시야는 장군으로 오시지 않는다. 정복자로 오시지 않는다. 아기로 오신다고 이사야가 예언한다. 6절 한 구절 안에 ‘영존하시는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 평강의 왕’이라는 말과 함께 ‘한 아기, 한 아들’이라는 말이 동일한 메시야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눈여겨 보자. 아기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예뻐하고, 뽀뽀도 해 주고, 쓰다듬어 주기도 한다. 스스럼 없이 그렇게 한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는 것을 아기들도 좋아한다. 그러나 어른에게 그렇게 하면 크게 실례를 하는 것이다. ‘아이고 예뻐요!’하면 망측하지 않나?

갈릴리 사람들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그들에게 정복자는 늘 자기 반대편이었다. 그들은 늘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들이었다. 가까이 하기 어렵고, 자기들의 뜻을 들어주는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다. 설령 선한 목적으로 오는 왕이라도 그들은 일단 경계한다.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들은 메시야는 아기로 오신다는 것이다. 아기이기 때문에 마음을 연다.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간다. 자기들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들의 아픔을 알아줄 수 있는 분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이렇게 말씀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갈릴리 사람들은 그 메시야를 향해 마음을 연다. 그에게 다가간다. 그에게 찾아가서 말도 걸어보고, 그의 말도 듣고, 함께 먹기도 하고, 불편함을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예수님은 보통 왕의 근처도 갈 수 없는 이들이 언제나 가까이 갈 수 있는 그런 분이셨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하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누구든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함께 하셨다. 그분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구유 위에 뉘우셨다. 어떤 사람들은 당시는 보통 동물들과 사람들이 함께 살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복음 2장 7절을 보라.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더라.”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 당시 가장 천한 계급이었던 목자들이 제일 먼저 찾아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한다. 그리고 천사들이 찬양하는 소리를 듣는다. 얼마나 위대하고 놀랍고 아름다운 광경이었을까? 그분은 3년 동안 갈릴리 전역을 돌아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병든 자,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다. 그분은 그분에게로 오는 이들을 바꾸셨다. 그들의 인생의 목적을 바꾸시고, 그들로 하여금 전에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세계의 삶을 누리게 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창조적 삶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의 못박아 죽인 유대 종교인들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왕같은 담대함을 지닌 사람들로 바뀌었다. 그것은 참으로 세상의 왕이시며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이시고(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 모사이신(놀라운 지략가이신),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고, 평강의 왕이신 주님을 섬기는 참된 천국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누리게 되었다.  

다시 이전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오늘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디로 오실까? 이 시대의 갈릴리는 어디일까? 우리 교회는 이 시대의 갈릴리일까? 우리는 갈릴리 백성들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26:32).”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갈릴리로 가야 한다. 예루살렘이 아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정치와 음모가 판을 치고 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의 탐욕과 싸움과 모략이 성행하고 있다. 정치와 음모와 죽음의 사건이 일어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난다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주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로 오실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갈릴리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어린 아이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갈릴리로 갈 것인가? 아니면 출세와 삶의 질을 높이려는 욕망을 품고 정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힘을 가지고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그 주변에 몰려든다. 뒤에서는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그 앞에서는 절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능한 가까이 가려고 한다. 약한 사람, 그들은 언제든 내가 필요하면 가까이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언제든 거기서 나를 기다려 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힘 있는 사람을 잘 찾아서 가까이 가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으로 그런 기질이 있다.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예루살렘이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도 그런 일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교회는 어떤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 안에 언제든 예루살렘으로 달려갈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마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악한 심성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예루살렘의 정치판에 뛰어들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다. 힘 있는 자와 함께 권력을 행사하며 거기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이런저런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gossip을 즐기고, 험담을 하고, 그런 재미, 그런 것을 기쁨이라고 여긴다. 그러면서도 마치 교회를 염려하는 듯이, 교회를 엄청이나 사랑하는 듯이 행세한다는 점이다.

오늘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디로 오실까? 우리 교회는 주님이 활동하실 갈릴리인가? 우리에게는 갈릴리 백서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저는 지금 세 번째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문제는 뭘까? 문제는 이곳에 갈릴리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갈릴리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기껏해야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정도 아닌가? 놀랍지 않은가? 그들 중에는 성경 학자들인 서기관들도 있었고, 철저하게 율법 대로 살아가는 바리새인들도 있었고, 당시 종교적 지도층이었던 사두개인들도 있었다. 어떻게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주께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물론 사도행전에 보면 허다한 제사장들도 주께로 돌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지금은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준비하고 경배하는 대강절이다. 2,000년 전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지극히 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평강의 왕으로 우리 가운데 일하셨다. 정사와 ㅍ여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3절을 보자.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 한 절에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된다. 주께서 이루실 나라에 참여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그 기쁨에 참여한다. 주 앞에서 즐거워한다. 우리의 기쁨이 무엇인가? 우리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의 기쁨은 주님으로부터 온다. 본질로부터 온다. 예루살렘에 모인 자들은 세상의 권력을 탐하고, 물질에 탐익하고, 세상의 오락과 육체적 만족을 추구한다.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다. 결국 사라지고 말 즐거움, 결국 자신을 패망케 할 즐거움에 빠진다. 그러나 주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을 구한다. 어린 아이로 오신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마음, 그런 불타는 마음, 열망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아기 예수를 영접하기 위해 갈릴리로 갈 마음이 있는가? 더 낮은 자리, 더 섬기는 자리, 이웃과 함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자리,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오직 주님 밖에는 없다고 고백하며 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거기에 진정한 즐거움이 있다. 진실로 그런 성도만이 아기 예수 오신 성탄의 기쁨에 참여할 영광을 누릴 것이다. 이런 영광이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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