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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하나님께서 우리교회가 힘쓸 일이 무엇일까를 기도하던 중 예배의 회복이 가장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예배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흥분되고 소망이 생깁니다. 위대한 사상가를 만나면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영향을 받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때 무슨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매주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때, 그 예배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만약 우리에게 예배가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아주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각하게 이 일을 생각하고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의 변질

본문 5장 13절을 보면, 에브라임(북 이스라엘)이 죽을 병이 든 줄 알고 앗수르를 찾아갔으나 저가 능히 에브라임을 고치지 못하였다고 말씀을 합니다. 에브라임은 지금 고난 중에 있습니다. 인간의 고난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고난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부터 옵니다. 그 고난은 불신자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왔습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임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예배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에 무엇인가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무려 250만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와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들이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지만,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웃시야 왕은 매우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는 국력도 튼튼하게 유지했고, 그의 영토는 애굽 변방까지 이를 정도였습니다(대하26:8).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를 직접 집례하려고 하다가 그만 그의 몸에 문둥병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배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여기에 아주 작은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전에는 신실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고, 영토를 넓히고,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을만큼 많은 것을 소유했을 때 그는 나머지 하나님의 영역, 즉 제사장이 갖는 신성한 권위를 갖고 싶었고, 결국 하나님을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이전 신앙과 이후 타락한 신앙은 아주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전과 동일한 예배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아주 달랐습니다. 여전히 동일한 모습의 예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중심은 전혀 다른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질이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것은 아주 순간적인 변화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 가운데 나타나는 우리의 이런 아주 작은 변화에 민감해야 합니다. 바른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자신의 변화 혹은 변질에 대해 예민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동일한 예배자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배자로서의 목적이 변질되면 우리는 문둥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예배의 변질입니다.


예배의 회복

그러면 어떻게 예배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6장 1절과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입니까?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하면, 구약성경을 줄줄이 외우는 그들에게 어떻게 그분을 더 안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알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1절을 잘 보십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기에서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찢으셨고, 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를 치시는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계하시기도 하고,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라고 설교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에서 말씀하시는대로 우리를 치시는 분이시고, 찢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5장 13절의 말씀과 연관지어 이해해야 합니다. “에브라임은 죽을 병이 든 줄 알고 앗수르를 찾아갔고” 그들이 왜 앗수르를 찾아갔습니까? 그것은 앗수르가 그들에게 그만한 영향력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야말로 그들을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바꿔 말하면 앗수르야말로 그들을 찢고 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찢을 수 없으면 그들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6장 1절의 말씀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찢고 치시며, 또 낫게 하시고, 싸매시는 분은 앗수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싸매시는 분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찢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만약 그분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그분의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이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그분의 긍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구원할 방법이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죄에 빠진 인간을 그냥 구원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찢으신 것입니다. 그를 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단순히 사랑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사건이지만, 또한 엄청난 공의의 사건, 심판의 사건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찢으신, 심판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바로 서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을 균형있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느 하나에 집착하는 것은, 즉 하나님의 사랑만을 붙들고자 하는 것은 곧 타락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하나님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바른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주님을 바르게 만날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3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서 ‘안다’는 말은 가장 친밀한 관계 안에서의 앎을 의미합니다. 저는 오바마 대통령을 압니다. 그분은 가끔 저에게 식사(도네이션 프로그램)를 하자고 이메일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앎’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누군가가 그를 잘 알아서 나를 대신해서 그에게 개인적인 요청을 할 수 있을만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제 아내를 잘 압니다. 그의 성격도 알고, 그의 삶의 배경, 그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거의 대부분 압니다. 그래서 그가 힘들어 할 때는 그를 어떻게 도와야 되는지 압니다. 그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래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저는 최선을 다해서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조심합니다. 최대한 그의 감정과 상황을 배려합니다. 이것이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최대한 조심하고, 그분께 바르게 나아가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막무가내 우리의 생각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분께 합당하게 응답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무조건 나의 생각, 나의 관심만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아십니까? 예배를 드리면서 그런 앎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몇 가지로 말씀합니다.

1)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3절입니다.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이 없나니”  그렇습니다. 그분은 새벽 빛같이 변함이 없으십니다. 새벽 빛, 아침 해가 뜨지 않은 날은 유사 이래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믿습니까? 하나님을 확실히 알면 우리의 삶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늘 흔들리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혹시 나를 배신하지는 않으실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혹시 뜬 구름을 잡는 것은 아닐까? 목사가 말하니까 그렇게 내가 세뇌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변함없으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의 불변하심을 알 때 우리는 그분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우리의 믿음이 부질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너희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중요합니다. 인간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음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 중심적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자가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신뢰받으실 수 있는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객체가 되고 그분이 주최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주인이시고, 나는 종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안정되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의 체험입니다. 이것은 결코 죽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무한한 은혜와 영광을 맛보는 길이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우심을 아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우리가 그분을 더 깊이 알게 되면 그분의 심판이 빛처럼 변함없음을 알게 됩니다. 즉 그분의 심판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삶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상당히 신기한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모로부터 시작해서 삶의 환경, 성장 배경 등에 대한 불만입니다. 이런 불만은 결국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불만입니다. 자신에 대한 불만은 하나님을 불공평하시다고 하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우심을 안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믿음과 일치합니다. 만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할 때만이 이런 고백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론

6절입니다.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냥 제사를 지내면서 좋은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세상의 훌륭한 사람을 만나도 영향을 받고 삶이 바뀌곤 하는데,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남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2012년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교회는 예배드리는 일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잘 예배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 힘쓰려고 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합니다. 이것은 이싱한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전부터 마땅히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새 해를 맞아 이 한 해 주님을 만나려는 갈구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서 그분을 만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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