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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장 14절부터 10장 18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말씀하십니다. 7장까지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8장에서는 천상에서의 제사장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절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예수님이 지금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 즉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곳은 하늘에 있는 성소, 즉 성전입니다. 성전에는 본래 의자가 없습니다. 성전은 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곳입니다. 만약 제사장이 제물을 드리다가 잘못하여 죄를 범하게 되면 제사장이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앉으셨다는 말은 그분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2절에서 그분은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성소와 참 장막은 동격으로 쓰인 말입니다. 그래서 본래는 성소 즉 참 장막으로 읽어야 합니다. 아무튼 ‘그 성전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지금 그곳에 새로운 성전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성전은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세운 것인데, 그렇게 때문에 그 성전이 원형입니다.

5절을 보면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섬기는 것, 즉 이 땅의 제사장들이 섬기는 성전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리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5장 8-9절, 그리고 40절에 하는 말씀을 언급합니다. 출애굽기 25장 8-9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40절에는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하늘에 있는 성소가 원형이고, 이 땅의 성소는 모형입니다.

모세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는 하늘에 있는 원형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늘의 원형적인 성소를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의 있는 것이 원형이고, 이 땅에 있는 것은 모형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 진짜이고, 이 땅에 있는 것은 모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품은 소망이 하늘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하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형이 아니라, 원형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있는 것을 원형이라고 생각하고, 하늘에 있는 것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하늘에 있는 것은 마음의 위로를 삼기 위한 도구요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의 것을 실제적이고 영원한 것이며 궁극적인 것임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모형만을 보고 살았던 인생이 그림자와 같은 세상에서 영원한 세계, 궁극적인 나라, 우리의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진정한 실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바울은 하늘에 대한 구체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이 땅에서의 바울의 삶을 능력있게 했습니다. 그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갈 곳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 본향을 향한 그의 확신은 현재의 고난을 이기고 담대하게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신은 오늘의 삶을 더욱 견고하게 합니다.


요즘 수요예배에서 요한일서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이 저의 마음을 계속 두드리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8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죄의 고백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 아니 저의 기도를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하며 고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살지 못한 것, 게으렀던 것, 학생이 더 열심히 공부하지 못한 것, 시간관리에 대한 것, 학점이 나쁜 것, 건강을 관리하지 못해서 주를 위해 더 효과적으로 살지 못한 것, 우리는 이런 것들을 회개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백들 속에는 우리 내면에 있는 성공에 대한 잠재된 목적과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뉘우침이 하나님께 대한 죄의 고백을 둔갑한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뭐! 그런 회개조차 오늘날은 별로 찾아볼 수 없기도 합니다. 아예 회개의 기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저의 발견, 생각이 맞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후회와 뉘우침, 그리고 그로 인해 자기 인생에 더 효율적으로 살아가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늘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만, 하늘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그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게 살 것을 기대하지 못하는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 죄는 자기 관리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물론 포함할 수 있겠으나,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하지 못한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다시 땅을 보고, 세상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기도의 모형, 예배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우리 삶의 원형인 하늘 나라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2.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국 다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 성도들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질 당시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성도들에게 매우 극복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매우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당시 헤롯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무려 80년 동안이나 지었습니다. 이 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의 장군 Titus에 의해 무너졌지만, 매우 화려하고 현란하게 지어진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의 외관은 대리석과 황금으로 덮입혀졌습니다. 대리석은 멀리서 볼 때 눈이 온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만큼 아름다웠고, 황금은 태양빛이 비치면 반사되는 빛으로 인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히브리 성도들이 지금 이 히브리서를 받을 때는 바로 이 성전이 버젖이 건재할 때였습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당신들이 보고 있는 예루살렘의 성전은 진짜가 이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진짜는 하늘에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얼마 후에 예루살렘의 그 아름다운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로마의 병사들은 성전 안에 황금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벽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부숴버렸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이 땅에 있는 것을 진짜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앞서 가신 분들을 보십시오. 무엇을 가지고 가셨습니까?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타락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의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은 공상적이고 이념적이며 관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짜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에 어느 몇 명의 목회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늘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도 결국 그렇게 됩니다. 기도하지만,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도 결국 그 이면에는 세상적인 성공이라는 목표가 숨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해도 그렇고, 교회를 위해 기도해도 그렇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도 결국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3.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짜 성소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진짜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원형을 보지 못하면 결국 실족하게 되고, 패배하고 맙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모형입니다. 원형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형을 보면서 원형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C. S. 루이스가 한 말로 기억합니다. 창도 없고, 문도 없어서 밖을 볼 수 없는 공간에 살고 있는 모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바깥 세상을 보게 될 것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왔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딸에게 바깥 세상에 대한 꿈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방 구석에 굴러다니는 빛바랜 종이와 작은 연필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딸에게 바깥 세상이 얼마나 자유롭게 아름다운지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종이 위에 연필로 바깥 마을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초가집, 기와집을 그리고, 냇가의 물이 평화롭게 흐르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사람들이 길에 지나다니는 광경을 그렸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의 눈 앞에 보여주었습니다. 이 아이가 한참 그 그림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바깥 세상이 고작 이런 곳이라면 난 바깥으로 나갈 마음이 없어. 난 이곳에 그냥 살래. 엄마만 가.”

이 아이가 본 것은 이 그림에 그려진 실체를 본 것이 아니라 그림의 빛 바랜 종이와 엄마가 연필로 그린 작은 집과 초라한 아이들의 모습뿐이었습니다. 아이가 본 것은 그림에 담겨진 3차원의 활기찬 모습이 아니라, 종이 위에 놓여있는 2차원의 그림뿐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림에 담겨진 사람들의 활동과 그 안에 있는 관계, 기쁨과 슬픔, 승리와 감격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 맥없이 정지된 그림 자체만을 본 것입니다. 이 아이는 그림 안에 담겨진 역동적인 힘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 아이의 상상력은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의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인생의 원형을 그려볼 수 있을만큼의 상상력이 발동하지 못하고 죽어 있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바깥 세계의 그림을 보여주어도 어린아이에게는 움직이지 않고 정지된 하나의 선에 불과한 그림밖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 영생의 은혜, 영원히 그 생명을 누리며 사는 영광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겨우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영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숨막혀서 어떻게 살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그냥 지옥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내세지향적인 삶을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중요한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목사가 하는 말은 결국 이 세상을 다 무시하고 천국만 바라보고 살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형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형인 천국의 감동과 감격을 이 땅으로 다시 끌어내려와서 여기서 천국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곳에서 살다가 주님께서 부르실 때 기꺼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볼 것이고, 천국을 지루하고 힘든 영원함으로 오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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