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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그의 소원이었던 서바나(스페인)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난 후 로마는 마술사 시몬에 의해 잠시 영적 혼란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현란한 묘기는 기독교인들까지 유혹할만 했었습니다. 이 때 사도 베드로가 로마로 왔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시몬의 영적 대결이 겨루어졌습니다. 마치 애굽의 술사들과 모세의 영적 대결에서 모세가 승리한 것처럼, 그렇게 베드로가 로마의 마술사 시몬을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잠시 혼란 속에 빠져있던 로마의 교회는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로마에는 엄청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황제 네로로 인한 박해였습니다. 네로는 로마 도시 전체를 불사르고 그 도시를 그리스식으로 지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후에 로마 도시의 3분의 1 크기의 대궁정, 황금저택을 지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의도로 로마 시 전체를 불질렀던 것입니다. 당시 네로는 로마로부터 56km나 떨어져 있는 안티움 별장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원로원들은 이 방화가 네로의 소행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안 네로는 이 난국을 비껴가기 위해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기독교인들을 무차별하게 잡아 박해하고 죽이는 일들을 행했습니다. 이런 박해가 닥쳐오자 왕성하게 성장하던 교회는 매우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사역을 통해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아그리파의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데, 집정관의 아내의 변화는 베드로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갔습니다. 할 수 없이 베드로는 주변의 권유로 변장을 하고 로마를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로마 성문을 벗어나자 베드로는 로마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라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쿼바디스 도미네)?”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야.” 베드로가 다시 여쭙니다. “주님, 십자가에 다시 못박히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 베드로,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야.”

이 때 베드로는 제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다시 오르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기쁨에 가득 차서 주님을 찬미하면서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오.’라는 말은 베드로에게 일어나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2세기 말엽에 소아시아 혹은 로마에서 씌여졌을 것으로 보이는 외경 베드로 행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이 내용에 근거해서 1896년 폴란드 작가 핸리크 셴케비치가 ‘쿼바디스’라는 소설을 썼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행전에 나오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다 사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상황이 어려워서 로마를 떠나려고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돌아오는 모습은 흡사 그가 젊었을 때 모습과 흡사합니다. 이 이야기가 상당 부분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당시 로마에 있었고, 네로 황제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순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베드로후서는 그가 순교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로마 도성을 빠져나가려다가 주님을 만난 후 다시 로마로 돌아온 후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의 열정에 다시 사로 잡혔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고스로 데려가리라(요21:18).” 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는 자신의 죽음을 직면한 상황에서 쓴 편지였고,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을 더 가깝게 느끼면서 쓴 글이었습니다. 그는 12절부터 15절까지 매 절마다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다시 한 번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을 다시 깨우쳐 주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이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의 목적은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르는 것을 새롭게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다시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사도 베드로는 고난 받는 교회 공동체에 두 가지를 기억하도록 당부합니다.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 혼자 살 때는 두려워하고 초조해하고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았지만,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럴 듯하게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분은 참으로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 분을 의지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 분으로부터 나오는 신비한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을 꿈꿉니다. 안되는 일을 꿈 꿉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꿈이라면 그 꿈을 마음에 품습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어도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계속 들어보십시오. 이 이야기는 공교히 만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친히 주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으로 더불어 높은 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변화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때 주님의 변화되신 모습은 하나님 바로 그 분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고,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는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분명 하나님이셨습니다. 감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굶주린 자의 배를 채우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업 잘되게 하고, 공부잘하게 하시는 요술 방망이는 아닙니다. 바이올린을 처음 배우는 학생에게 중요한 것을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를 바르게 하면 학생은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기 편한 대로 하게 되면 바이올린 실력은 계속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능력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분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우리를 통해 다시 흘러 오게 됩니다.



두 번째 사도 베드로를 통해 주님께서 생각나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입니다. 즉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입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여기서 ‘날이 새어’라는 말씀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그 때가 되면 샛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 다시 오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세상의 종말은 분명히 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은 세상의 돌아가는 현상만 보면서도 세상이 끝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개인적인 종말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수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종말을 맞았습니다. 이 세상에 왔다가는 모두가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합니다. 금방 다가옵니다. 벌써 스무살 되었고, 벌써 마흔 살 되었고, 벌써 육십이 넘으셨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오심에 대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계획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계획 안에 없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불과 수 년 혹은 수 십년 후에 맞을 분명한 사실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함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이 사실을 기억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언젠가는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강림을 말씀합니다.

또한 베드로는 이 땅에서의 삶을 “장막”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장막을 벗을 때가 임박했다고 고백합니다. 장막이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걸치고 다니는 것들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 근심, 고민, 과제, 목표, 명예, 지위, 물질, 관계 등을 말합니다. 주님 오시면 이 모든 장막을 벗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옷으로 우리를 지어 입히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 옷은 이제 벗어 버리고 내가 새롭게 지어주는 옷을 입으라고 할 때 기꺼이 그 분의 부르심에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에 대해 말할 때마다, 종말에 대해 말할 때마다 우리 중에 얼마나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자체를 거부하려고 합니다.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본능이 그것을 거부합니다. 일단 삶이 풍요로워야 합니다. 삶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냐고 질문합니다. 이대로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들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일단 그 이야기가 지나가면 다시 빠르게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체중이 10파운드만 빠져도 우리의 몸이 얼마나 가벼운지를 경험합니다. 나라갈 것 같습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삶의 무게 중심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10파운드만 옮겨져도 우리는 정말 엄청난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우리 삶의 무게중심을 둬 보십시오. 사업과 학업, 직장, 가정의 무게중심을 하나님께 옮기십시오.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가 있는데, 어떻게 감사하냐고 우리는 질문합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무게 중심을 옮겨보면 거기에는 무한한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신앙입니다. 그곳에 무게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무게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너무 강하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오늘 이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것을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아는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다시 반복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이십니다. 능력의 하나님, 그 분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입니다. 다시 오실 분, 우리에게 종말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언젠가는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멸하기 위함이 아니라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곳에 우리 삶의 무게중심을 조금만 옮겨도 우리는 엄청난 자유를 경험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몸이 가벼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능력이 생깁니다. 지혜가 생깁니다. 없던 길이 열립니다. 모르던 길이 보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시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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