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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인 13장까지 왔습니다. 지난 해 9월 12일부터 시작해서 오늘 33번째 히브리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12장에서 13장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주의 깊은 관찰이 필요합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가? 등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조명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분은 모세보다 더 위대한 분이시고, 그분은 천사보다 더 높은 분이시며, 그분은 대제사장들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그리고 13장에 오면서 형제를 사랑할 것, 나그네를 대접할 것 등의 아주 실제적인 권면으로 마무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인 고민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로마서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서신서 말씀들이 이런 패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앞부분은 복음이 무엇인가?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 와 같은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후반부로 가면 실천적인 권면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고민스러운 상황을 만납니다. 이런 삶에 대한 권면을 들을 때 우리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을 공부해 본 사람들은 다 한 번 이상 들어보셨겠습니다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거져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에 대한 말씀이 끝나면 다시 삶에 대한 명령을 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이 점에 대해 고민합니다. 열심히 살라고 하면 살긴 하겠는데, 아무튼 머리 속에서 깔끔하게 정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양자 사이에 아주 선명하고 분명한 설명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제 3의 율법이라는 표현도 했고, 또 어떤 학자들은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율법을 구분해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오늘 본문(히브리서 13장)에 다섯 가지의 명령이 나옵니다.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3.        갇힌 자를 생각하라.
4.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이 다섯 가지의 말씀은 꼭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 그것은 율법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주님은 왜 이런 명령을 굳이 하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12장까지 무사히 왔지만, 여기서 13장으로 잘 건나가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율법적 신앙으로 돌아가게 되든지, 아니면 아무런 맥없는 믿음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죽이는 일을 일삼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번은 사울이 다메섹(다마스커스)라는 큰 도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 가고 있었는데, 가던 도중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강한 빛이 하늘에서 비취었고,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청년 사울이 묻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히브리서에서 1장부터 12장까지는 “주님,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면, 히브리서 13장은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래서 13장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이 질문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님, 제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되어서, 이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겠습니까?” “주님, 제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질문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나왔을 때 이 말씀은 들려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모든 말씀은 다 이렇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때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회개했다고 성경을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14-36절까지 긴 말씀을 선포하자 그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형제들아,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십자가에 죽었는데, 우리가 행할 일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집을 나간 아들이 밖에서 고생하다가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혼자 다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런 고백이 바로 오늘 히브리서 13장에 관련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1장부터 12장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분의 존재와 사역과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히브리서 4장 15절의 말씀대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신 분이시고, 시험도 받은 분이심을 말씀하시면서, 히브리서 5장 7절의 말씀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즉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간절히 정말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할수만 있으면 정말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고, 그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당신의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12장까지 전한 히브리 기자는 “우리가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논의를 할 정도면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2장까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본문의 말씀을 듣고 묵상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질문을 가진 성도에게 주시는 답변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도 없고, 그런 질문도 없다면 그리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 없다면 오늘의 말씀을 우리를 지나칠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조금도 문제 될 것이 아닙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바로 이 질문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이들에게 주님은 다섯 가지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본문은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권면이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질문을 던질 수도 있는 권면입니다.

본문을 볼 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중에 누구도 그 자체로 충분히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저 사람이라면 내가 실망하지 않고 정말 사랑할만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한 번 지긋이 쳐다보십시오. 다 저를 보고 계시는군요! 제가 그렇게 사랑할만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함량 미달입니다. 본문에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는 권면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상대가 사랑받을만 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형제의 모습, 그의 됨됨이, 인격을 보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도, 목사도, 친구도, 자녀도 모두 사랑할만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형제 사랑에는 이런 단서가 없습니다. 어떤 형제만 사랑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형제 사랑은 자격을 전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 때문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장부터 12장까지 내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가기 힘든 그 길, 십자가의 길, 그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릴 수밖에 없으셨던 그 주님, 그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셨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가능성을 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사랑에 대한 감동과 기쁨을 누리고 살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사랑으로 주님을 닮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 마땅히, 반드시 그렇게 형제를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힘이 모자라고, 때로 그런 사랑을 하기가 힘들 때는 주님께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전심으로, 온맘으로 형제를 사랑하기를 작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의 품꾼의 하나로 보아 달라고 했지만, 어떻게 품꿈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품꾼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음에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작은 아들처럼 사랑을 받은 우리가, 사도 바울과 동일한 은혜를 받은 우리가 마땅히 형제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어떻게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은혜에 감격한 자로 살아갑시다. 이것에 얼마나 멋진 삶이겠습니까?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초대교회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디도서 1장 8절에서는 감독의 자격 중 하나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언급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나그네라 함은 주로 순회하는 복음 전도자들을 의미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인숙에서 묵었지만, 당시 순회 전도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여인숙에 머물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순회 복음 전도자들은 주로 성도들의 집에 머물곤 했습니다.

2절 후반부에 보면, 손님을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사건은 창세기 18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리의 상수리 나무 아래 있을 때, 여호와께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마침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이 있어 대접을 했는데, 이 세 사람이 바로 여호와와 두 천사였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년 후에 아들을 낳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데 있어서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주로 전도자들이었지만, 그들 중에는 가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규칙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들이 이틀까지 머물도록 하지만, 사흘 이상 머무는 사람은 가짜 전도자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도자들을 섬길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손님, 나그네를 대접할 것을 명령합니다. 본문은 그 당시 있었던 가짜 전도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회 전도자를 대접하는 것은 전도자의 자격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로 인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손님을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사람도 있고, 기드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부름을 받기도 했습니다. 마노아라는 사람은 손님을 대접하다가 삼손이라는 아들을 얻을 것을 약속받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잘 드려다 보면 그들이 처음부터 그들이 천사였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고 나서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었음을 깨닫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삶에 복을 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저는 한국에서 부목사로 목회할 때 10명의 부목사들이 주일 저녁예배가 끝나면 한 번씩 모여서 담소를 나누곤 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희 집에서 자주 모였습니다. 그러면 간단한 다과를 나누며 대화의 시간을 가지곤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목사님이 기도하고 함께 간식을 먹으며 대화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기도하시는 목사님들이 정말 간절히 풍성하게 복을 빌며 기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도를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 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저희 집에 누가 오면 가능하면 제가 기도하기보다는 오신 분에게 기도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그렇게 받은 기도가 저의 삶 가운데 다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고, 정말 귀한 은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한 이들도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을 주시기 위한 방편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꺼이, 온맘으로 섬기고, 그러는 중에 천사를 대접하고, 아들도 낳고, 가정에 은혜가 임하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갇힌 자를 생각하라

3절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당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살피고 함께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주님은 친히 그런 고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 말씀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다시 한 번 원론적인 말씀을 나눕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고, 그런 삶이 곧 주의 백성에게 합당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섬기던 고 윤덕수 목사님의 간증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분은 경상도 산골짜기에서 태어나서 학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겨우 다녔는데, 1년만 더 다니면 졸업할 수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중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젊은 학생을 잘 아는 어느 장로님께서 1년이나 놀고 있는 이 학생을 안타까이 여겨서 지금의 한남대 총장에게 소개를 했습니다. 이 학생을 꼭 1년만 이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 후는 당신이 알아서 결정해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채 대학 시험을 보지도 않은 채 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떻게 공부했겠습니까?

거져 받은 은혜란 이런 것입니다. 거져 대학을 갔다고 거져 졸업을 시켜준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계속해서 그렇게 그런 모습 그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갇힌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고통 받는 자를 돌아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4. 결혼을 귀히 여기라

네 번째는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주님 앞에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이렇게 주님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서 주님의 뜻을 묻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결혼을 귀히 여기고 네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복음적인 삶입니까? 복음적인 삶은 바로 결혼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을 잘 지키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음행은 결혼 관계 안에서 순결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간음은 결혼 관계 외에 모든 면에서의 순결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성적인 순결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성도가 순결을 잃어버리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순결을 잃어버리면 받은 구원을 잃어버립니까? 아닙니다. 성도가 순결을 잃어버리면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순결을 지키려는 마음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는 아예 처음부터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점이 두려운 것입니다.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순결에 대해 무감각하다면 마치 둘째 아들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품꾼의 하나로 살겠다고 해 놓고는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구원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자신을 깊이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5. 돈을 사랑하지 말라.

마지막 다섯 번째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로 족한 줄로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과 누가복음 16장 13절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말씀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고, 디모데전서 6장 6-8절에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에는         사도 바울이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이렇게 계속해서 말씀하는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고백하며 체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를 1장부터 12장까지 읽고 묵상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던 율법과 전통, 모세와 천사, 대제사장으로 통해 오던 성전 제사, 이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을 히브리서를 통해 만났습니다. 그분은 통곡하며 눈물로 인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몸을 온전히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바로 그 분이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 재물로 인해 염려하지 말라. 네 노년을 위해 걱정하지 말라.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현재와 장래를 붙들고 계심을 믿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장래를 주님께 맡길 수 있다면 오늘 현재 하루 하루를 얼마나 신나고 힘있게 살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노후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현재 우리가 얼마나 마음의 여유와 풍요함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막쓰고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기꺼이 주님을 신뢰하고, 기꺼이 이 말씀을 믿고 살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주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그 사랑에 겨워 주님과 함께 주의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물질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첫 번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나의 재물, 나의 재정적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첫 번째 신앙고백입니다. 십일조는 믿음의 마지막 결단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께서 나의 재정적인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숨길 수도 없고, 거짓으로 할 수도 없는 첫 번째 신앙의 모습입니다.



결론

우리는 히브리서 1장부터 12장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했습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모세나 천사나 대제사장들보다 더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이 되시고 친히 제물이 되셔서 지성소로 나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당연히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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