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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호흡은 육체의 생명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호흡하지 않는 생명체는 불과 5분을 넘기지 못하고 죽습니다. 호흡은 생존의 불가결한 것이며,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호흡은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운동을 할 때도 호흡을 잘 해야 운동의 효과가 있고, 노래를 할 때 호흡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합니다. 또한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도 역시 호흡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에 발성법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몇 개월을 했는데도 발성을 이해하고 훈련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느꼈었습니다. 발성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아무리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대가 나란히 두 개가 있어서 이것이 서로 부딪치면서 떨림으로 소리가 나는데, 이것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소리를 내기가 어렵고, 너무 가까이 붙어있으면 너무 강한 소리가 나서 나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내라고 하는데, 어떤 때는 잘 되는 것 같고, 또 어떤 경우는 내 입장에서는 똑 같이 소리를 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감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발성습관은 여간해서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조차 발견하기가 어렵고, 또 안다고 해도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호흡과 같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도가 그들의 오래된 종교적 관습이었고, 생활화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고, 주관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만큼 철저하게 기도하는 민족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기도가 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했지만, 기도가 익숙해진 민족이었지만, 그들의 기도에는 아주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신화, 잘못된 전통, 습관, 관점 두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첫 번째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신화는 기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만큼 화려하고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6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기도에 감동을 받으면
곧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화려한 수식어와 미사여구를 도원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애를 쓰곤 했습니다. 기도를 잘하면 확실히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 차이가 너무도 작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사람들도 그 기도에 감동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본질적으로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와 사람이 감동을 받는 것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지금 “사람에게 보이려고 거리에 서서 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없다”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두 번째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신화는 기도로 하나님을 설득시켜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당시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중언부언했습니다.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뜻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주로 주술적이었습니다. 주술은 그냥 그 말 자체에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주문의 의미를 모르더라도 그냥 그 주문을 반복적으로 외우고 말하면 그로 인하여 자기 신이 그 기도를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시키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간해서 인간의 기도에 잘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본문에서도 이방인의 습관이라고 지적하고 있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다분히 토속신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 신은 매우 마음이 강퍅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런 마음을 갖습니다. 완고하신 하나님, 여간해서 우리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고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큼 화려하고 감동적이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시켜야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그런 분도 아니십니다. 이것은 그들 안에 있는 잘못된 신화입니다. 우리 안에도 그런 생각들이 조금씩 들어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감동을 받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실 것이며, 하나님을 설득시키기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겠는가? 의심합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우리가 구하기 전에 먼저 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감사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신다면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도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신다고 하시면서, 실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또 내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하나님은 좀처럼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느낌으로 살아갑니다.

이 말씀은 양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모르시는 나의 필요와 고통을 주님게 아뢰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아파하는 인간이 그 고통을 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준비해 놓으시고 기다리시는 그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가 내 안에 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하시고, 그 나라를 경험하고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이끄심을 주기도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구하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전반부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무슨 기도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어디에서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까? 바로 이 땅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동일하게 그렇게 내가 사는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우리는 아직 사실 하나님 나라를 잘 모르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시대에,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우리의 마음에 부분적이지만, 임재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이시고 보따리에 기도의 응답을 싸서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임재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여야 합니다.


또한 11절의 기도를 봄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좀 더 분병히 알 수 있습니다. 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기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일용할’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일용할’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단어는 “에피우시온”입니다. 이 말은 사실 매우 난해한 단어이고, 매우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의 번역들을 보면 어떤 일치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에피우시온”은 ‘일용할’, ‘간절하게 필요한’, ‘영원한’, ‘앞날의’, ‘내일의’ 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여기서 간구하는 양식은         간절하게 필요한 양식이고, 영원한 양식입니다. 앞날의 양식, 내일의 양식입니다. 즉 11절을 다시 해석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시옵고” 혹은 “오늘 우리에게 영원한 / 간절하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의미입니다.

이 기도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 기도는 바로 종말적 양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일을 위한 양식’이 아닙니다. 내일 먹을 양식을 오늘 주셔서 내일 걱정을 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종말의 양식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먹고 누릴 영원한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오늘 이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누릴 그 영원한 양식을 맛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즉 종말에 주의 나라에서 경험한 그 영원한 양식을 먹으며 주님 안에 거하는 기쁨을 누리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초점은 모두 종말이고, 그 종말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임할 때 우리의 모든 필요는 완전하게 채워집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함으로 그 나라의 영광을 오늘 이 자리에서 누리게 해 달라고 간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오해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만큼 화려하고 감동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나라 전체가 온전히 임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움에 빠진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종말의 양식을 먹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감격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 가운데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잘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음식을 먹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 아니 “간절하게 필요한 양식”, “영원한 양식”, “내일의 양식”, “그 나라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에 대한 이해가 바뀔 때 비로소 우리는 바르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통해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에 당신의 풍성함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기도자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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