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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일 전에 나는 길에 버려진 어린 아이를 주워 왔습니다. 얼굴을 보니 그 어린 아이는 몹시 배고파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며칠이나 굶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아이에게 빵을 주었더니 그 어린 것이 빵을 받아 들고는 잘게 부스러뜨리며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먹어라. 어서 그 빵을 먹어. 배고플 테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린 것이 나를 보고 ‘이 빵을 다 먹어 치우면 다시 배고플까 봐 걱정이 돼요.’라고 말했습니다.

굶주림의 고통은 끔찍한 것입니다. 이 어린 것은 어쩌면 그대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거나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를 굶주림의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는 그 사랑 때문에 상처를 입을 때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마더 테레사의 글입니다.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굶주림과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해 주는 글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중에 말씀하신 구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6장 1-18절까지 이어지는 전체 본문 중 일부로서,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에 대한 교훈 중 첫 번째 말씀입니다.

국어사전에는 구제를 ‘어려운 형편이나 불행한 처지에서 건져 주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저는 구제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구제란 ‘하나님의 것을 어려운 이웃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구제는 현대인에게 그리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구제는 내가 여유있고 넉넉할 때 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제는 우리 자신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문(2-4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제가 나와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나팔을 불면서 구제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제는 은밀하게 하라. 그래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제는 나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상은 내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명령입니다. 구제는 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복을 받는 길이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구제하면 그런 사람은 이미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구제할 때는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60억 인구 중 7명 당 1명인 8억 4천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매일 24,000명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렇게 먼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북한은 지난 15년 동안 200만명이 기아로 죽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어린아이들이 끼니를 거르고 있고, 6백만 명이 정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3,700만명이 굶주림을 경험했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까? 구제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으로 들어가서 그 의미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27-28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시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두 가지 메시지를 줍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하셨다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렇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또한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의 이런 말씀을 보면서 모순이 발견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신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네 형제들 중에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여러 가지 장치를 해 놓았습니다. 농사를 지어 추수할 때 밭의 네 모퉁이 곡식은 베지 말고, 떨어진 것도 줍지 말아서 가난한 자와 나그네들을 위하여 버려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칠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그 밭을 갈지 말고 그냥 두어서 거기서 나는 곡식을 가난한 자들이 먹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십일조를 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신명기 26장).

여기서 가난한 이웃을 돕고, 곡식을 남겨서 그들을 먹고 살도록 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불완전한 사회를 그대로 방치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창세기 1장 27-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해 놓고서는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니 그들을 돕고 구제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복을 선포해 놓으시고는 실제로 인간의 삶은 그렇게 굶주리고 있으며 기근과 기아의 고통에 허덕이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답을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또한 그보다 그분의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무엇이든 만드실 수 있고, 주실 수 있음으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실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전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의 나누고 베풀기를 좋아하시는 성품으로 인해 인간의 삶은 풍성해진다는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인류의 기아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먹을 것을 많이 쏟아부어주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능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World Vision의 보고에 의하면 기아는 식량 생산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전쟁이나 자연재해 때문도 아니라고 합니다. 전쟁과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 세계는 식량이 남아돌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의 기아 문제는 식량의 부족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생산되는 양식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먹고 남기에 충분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적어도 지구상에 있는 인구의 1.5배의 인구가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전히 굶주리고 있는 것은 나눔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태로라면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양식을 두 배, 세 배를 더 주셔도 지구상에는 그것을 빼앗기 위한 더 많은 전쟁과 살육, 그리고 더 많은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분량적인 면에서의 풍성함이 아니라 나눔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복을 주셨는데, 그것을 누리는 방법 중에는 바로 이런 나눔을 통해서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나눔에 대한 본래적 성품을 잃어버렸고, 그로 인해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의 탐욕만을 채우는 이기적 존재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결국 스스로 불행해졌고,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고, 결국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지난 해 여름 한국에 잠시 갔을 때 건강검진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무슨 일로 건강검진 결과표를 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무관심하게 보았는데, 그날은 결과에 대한 것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다른 것은 문제가 없는데, 갑자기 한 부분에 눈이 확 들어왔습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비만입니다. 비만은 각종 만성질환의 발생확률은 높이는 주요한 위험인자입니다.”

기분이 아주 나빴습니다. 우리의 비만 기준에 동의하지 않았고, 또 저는 그래도 체중을 잘 조절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지금 체중은 17년 전 결혼할 때의 체중과 같습니다. 그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때도 그렇게 뚱뚱했어요?’라고 하긴 하더구만요.

아무튼 그날은 그 건강검진표를 보면서 아주 불쾌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목사가 비만이라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점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Rich Warren 목사님도 비만인데, 다이어트를 하다가 실패한 것을 고백했고, Oprah Winfrey(오프라 윈프리)도 다이어트를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개인적인 모습이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위로를 받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다이어트는 확실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는 먹을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을 줄아지 못하는 고민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없어서 못먹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구 저편에는 먹을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쪽에서는 많이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해서 생명이 단축되고 있지만, 지구 저편에는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누지 못하는 것은 결국 양쪽 모두에게 죽음을 가져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일의 근본적인 해법은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앞서 창세기에서 주는 교훈을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분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함을 주시고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은 나눔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배부르도록 먹는 것은 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옆에 한 사람이 …C주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너무 먹어서 비만이라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까? 다만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이 먹음으로 인해 오는 질병과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의미에서 믿음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다이어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꼭 체중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다이어트 되어야 합니다. 물질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며 함께 나누는 다이어트입니다.


또 하나는 그 풍성함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앞서 이스라엘에는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도 드리도록 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요구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생명과 모든 물질과 시간,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데, 그 중에 십분의 일을 주님께 드리라는 것이 십일조의 의미이며 목적입니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넘어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일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말3:8).” 십일조는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일조 안에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까지 넣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구약시대에 십일조는 크게 세 개로 나눠집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있는데, 그것을 드려 아론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장을 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신26:12). 즉 구제는 십일조의 개념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구별해서 드리고 남은 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집을 렌트로 산다면 쓰고 남은 것으로 렌트비를 내지 않습니다. 먼저 렌트비를 내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구제도 내가 배불리먹고 남은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일부분을 항상 구제항목으로 떼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에 대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삼조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헌금을 말합니다.

두 번째 십일조는 부모님과 이웃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부모님과 가난한 이웃들을 보면서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으며 그들을 섬기는 일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순수히 내가 얼굴도 알지 못하고, 이름도 모르는 이들을 위한 나눔입니다. 물론 그분들 중에는 선교사님들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고, World Vision과 같은 기구를 통해서 나눔이 가능할 것입니다. 나는 아직 형편이 어렵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 못먹어서 고통을 받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수입의 십일조로 구제하기가 어렵다면 우리가 먹는 생활비의 십일조는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썬다 씽(Sundar Singh)은 시크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특별한 체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일생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티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에 힘썼던 그는 어느 날 눈이 쌓여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사람이 길에 쓰러져 얼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썬다 씽은 그 사람을 등에 업고 산 아래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춥고 미끄러운 비탈길을 죽어가는 사람을 업고 가려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함께 번갈아 업고 가자고 부탁을 했으나 그 사람은 "나도 잘못하면 죽을 판인데 내가 왜 그 짓을 합니까?"라고 말하고는 부지런히 앞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썬다 씽은 포기하지 않고 혼자 그 사람을 업고 열심히 산길을 내려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마에 땀이 흘렀습니다. 한 참을 가다보니 두사람의 열기로 인하여 얼어 죽어가던 사람의 몸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땀이 나면서 썬다 씽도 그 엄청난 추위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더 가다가 또 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혼자만 살겠다고 앞서 길을 갔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서는 이런 삶의 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구제는 이미 너무도 본질과 멀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삶의 다이어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생명력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다이어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십시오. 십일조를 하나님께, 그리고 부모님과 이웃들에게, 그리고 내가 모르는, 지금도 지구 저편에서 굶주리며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위해 내 삶을 나눕시다. 적어도 이 세 가지 영역은 내가 침범해서는 안 될 영역입니다. 몸이 비대해지면 건강을 잃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비대해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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