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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를 통해 구원 받음은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가치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많은 죽음의 소식들처럼 여기곤 합니다. 또한 우리의 구원의 소식도 수많은 행운들 중 하나쯤으로 취급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라는 복된 소식은 아무나 받을 수 있다는 식의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에게 예수의 십자가 희생만큼 귀하고 가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가치만큼 구원받은 인간을 통해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목적은 무엇이며, 인간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을 무엇을 기대하실까요?

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군주국가 시대 한 백성이 왕을 만나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왕을 만나는 것과 왕이 나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내가 왕을 만날 때는 나의 문제를 가지고 왕을 찾아갑니다. 억울한 일을 풀어달라는 것이든, 혹은 가정, 직장, 혹은 마을의 일을 위해 왕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이 나를 만날 때는 내 문제를 거론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럴 때는 나의 문제를 왕 앞에서 거론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왕이 나라의 경영에 관한 계획을 나누기 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나를 나라 경영에 참여시키거나 특별한 게획을 시행하는 일에 나를 사용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왕의 부름을 받았을 경우 우리 개인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지만, 아무튼 그것을 먼저 고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 말씀에는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주도권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계획도 그분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행하십니다. 주님의 계획과 의도는 내 생각과 내 경험, 그리고 내 비전과 필요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자꾸 우리의 계획을 먼저 꺼내려고 합니다. ‘내가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보다 내 문제가 먼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면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부요함이 너무도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그 부요하심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채로 다만 하나님의 부요케 하심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대해 수없이 말씀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초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얻어지는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계획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바로 그 구원의 목적이 그거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첫째, 주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것은 제자들을 당신의 친구로 삼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왕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왕이 그를 부르신 이유는 왕께서 그의 비밀을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함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로 삼으셔서 아버지께 들은 것을 그들이 알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아주 친밀하게 지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사41:8, 약2:23).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을 방문합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99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방문한 여호와 하나님과 천사를 최선을 다해 대접합니다. 그는 급히 장막으로 가서 자기 아내 사라에게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도록 부탁합니다. 그리고 또 가축 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직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면서 급히 요리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완벽한 종의 모델입니다. 그는 앉지 않았고, 음식을 나무 그늘 아래 차려 놓고, 그들이 다 먹을 때까지 아브라함은 그 옆에 서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8장 후반부로 가면 분위기가 바뀝니다. 아브라함은 조용히 여호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눕니다. 그는 여전히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친구로 대화자가 되어 갔습니다.

17절 이하에 가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나누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강대한 민족을 이룰 것과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을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획을 함께 나누고, 그 역사에 참여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잘 알지 못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들은 당황했고, 알아듣지 못했으며, 혼란 가운데 자주 빠지곤 했었습니다. 더 높은 자리를 탐내고 있는 동안 주님의 음성은 그들에게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실 장래의 복은 그들이 탐내고 있는 더 높은 자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은혜와 특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제자들과 같을 지 모릅니다. 아니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방황합니다. 뭔가 얻으려고만 합니다. 주님의 음성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친구과 되면서 그들은 주님의 뜻을 아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그분의 뜻을 따라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실 때는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 혼인 잔치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 참여하셨고, 그곳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인들이 주님이 명령을 따라 큰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워넣었습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하나님 나라의 이 비밀을 아는 특권은 오직 종들만 누렸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하인들이었습니다. 하인들은 주님의 명령을 직접 구체적으로 들었습니다. 물을 항아리에 붓고, 다시 그 항아리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갔다 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인들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말씀한 그대로의 순종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과 하인들의 친밀함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9절의 말씀처럼, 마땅히 상황을 알아야 하는 연회장은 모르고, 물 떠온 하인들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인들이 주님과 친구가 되는 과정입니다. 친밀함이 개발되는 중입니다. 아마도 연회장이 놀라는 모습을 보면서 하인들은 예수님을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더욱 친밀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해 친구가 되자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말씀하는 친구의 의미는 분명 그분과의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분과의 친밀함을 더 개발하기 위해 그분과 시간을 함께 하고, 그분과 비밀을 나누는 관계로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늘 서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 수 있다면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수요예배에도 함께 예배하며, 새벽에도 함께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과의 친밀함을 더 깊어질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이고, 목적입니다. 주님은 어떤 큰 프로젝트를 이루는 것보다 더 원하신 것은 바로 제자들 간의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은 악세사리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 투자하지 않습니다.

1) 사랑은 허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낭비의 성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습니다. 그 비싼 향유를 그냥 부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향유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발이 황금으로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드러나는 것은 오직 마리아가 예수님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그를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귀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허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사실은 인간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허비했습니다.

2) 사랑은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의 증거는 사랑한다고 느끼는 감정이 아니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은 가슴이 뛰지 않을 때조차도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예수님은 다락방 강화에서만도 계속 반복해서 서로 사랑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요13:34-35, 14:21, 23, 15:9, 12, 17).

3) 사랑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또 구원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 때문에 무엇을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합니다. 우리는 명예를 얻기 위해 어떤 일을 합니다. 우리는 부요함을 누리기 위해 우리의 에너지를 투자합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삶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랑을 위해, 사랑 때문에, 사랑으로 인하여 무엇을 한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4)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사랑을 알지 못하면,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보는 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요일4:8)”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5) 사랑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자유케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잠재력을 키우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모든 기능과 은사, 능력을 발휘하게 합니다. 어떤 일이든 사랑함으로 해 보십시오. 그럴 때 능력이 나오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생깁니다.

하지만 미움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합니다. 미움은 그 사람을 나쁘게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병들어 버리게 합니다. 미움은 자신을 파멸시킵니다. 미움은 생각을 정지시키고, 증오의 마음은 우리를 미움의 감정에 붙들리게 합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모하게 합니다. 모든 삶의 에너지를 미워하는 일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명령은 구약의 십계명을 요약하며, 또한 주님께서 새 계명으로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 무한한 주님의 능력이 분출됩니다. 마음껏 사랑하고, 힘써 사랑하고, 온 힘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사랑을 위해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마음과 중심으로 드리는 일을 아끼지 마십시오. 그런 수고와 헌신은 결코 인생을 헛되게 낭비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사랑의 힘을 잃어버렸고, 사랑의 소중함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능력을 받아서 예언을 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몸을 불살라 줄만큼 헌신하는 것보다 위대한 것이며, 사랑은 천사의 말을 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고, 사랑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갖는 것보다 더 귀한 일입니다.


그렇게 살 때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함이라.”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열매가 맺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열매, 전도의 열매, 삶이 부요해지는 열매, 우리 안에 숨은 은사가 개발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 놓은신 잠재력들이 살아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역동적으로 하니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하는 열매, 이런 열매들이 맺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열매들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열매는 주님께서 맺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따라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과 더욱 친밀해지고,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게 되면 주님께서 그러는 중에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을 일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 자체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함과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애에 주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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