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조회 수 3802 추천 수 28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깊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장면을 멀리서 보면 상당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부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 다락방 강화와 이어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끝나고 나면 유대 병정들에게 잡혀서 심문을 받고 이튼날 아침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카메라를 가가이에 대고 근접 촬영을 하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유월절 식사를 즐깁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듣고 답변하는 방법으로 긴 강화를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믿음입니다. 외적으로는 위기가 엄습해오지만, 주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는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환란과 위기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강화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절).” 빌립이 이 말씀에 이어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절).” 빌립의 질문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뭔가를 직접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보는 데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을 보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의지도 보입니다. 셋째, 그동안 말씀해 주시고 가르쳐 주신 주님의 말씀은 뭔가 2%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배운 것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봐야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과연 무엇입니까?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 신앙인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직접 보면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말씀도 시원치 않습니다. ‘제가 직접 보겠습니다. 그러면 족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눈으로 보는 것에 신뢰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그렇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첫 눈에 알아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본래 여러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두 번 봐서 파악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잘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땅에 선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의 인생을 더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 알기

이런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간이나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여행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자고, 함께 살았습니다. 에수님의 말씀을 매일 들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주님의 능력을 옆에서 보고 체험했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장면,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능력, 죽은 자를 살리는 신비로운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지 못했습니까? 주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면서 그의 손을 덥석 잡는 모습입니다. 나병환자는 손과 발이 썩어들어가는 병입니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병환자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8: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병만을 고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의 고통, 즉 정신적인 치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영적인 치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의 회복, 즉 사회적인 치유를 먼저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바다를 향해 꾸짖으시는 주님의 모습은 깊이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을 함께 바다에 수장시키고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함정을 만드는 사단의 음모를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의 분노가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당신의 생명까지 십자가 위에 내어놓으실 것을 작정하고 오신 주님의 분노하시는 마음을 제자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그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외치시던 주님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러나 무덤 앞에서 조용히 비통한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을 제자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영혼을 위해 안타까워며 흘리시는 주님의 눈물을 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사건에 초점이 있지 않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주님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3년 동안, 이렇게 오래 주님과 함께 있었다면 마땅히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또 주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몰랐습니다. 그래서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늘 잡힐 듯, 이해할 듯하면서도 여전히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알기

예수님은 다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0-11절).” 이것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일치입니다. 두 분이 섞이는 것은 아니지만, 두 분은 서로를 구분할 수 없을만큼 마치 한 분처럼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확하게 보면 그분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알게 되고 서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만날 때마다 더 깊은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을 더 깊이 알아갑니다. 부모, 형제, 성장배경, 가치관 등을 나눕니다. 그를 깊이 알아가면 그의 부모님을 알게 되고, 또 부모를 알면 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교회 교우들 중에 몇 분은 제가 부모님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만나면 아마도 매우 친근하게 느끼게 될 분들도 있습니다. 이미 제가 그분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에 대해서도 들었고, 그를 알아가면서 그의 부모님을 알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긴 만남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어린아기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알게 되는 사람은 엄마입니다. 갓난 아기 때는 아무나 안아줘도 방끗방끗 웃지만, 조금 더 크면 엄마를 알아보고 낯을 가리면서 엄마만 찾습니다. 엄마를 알기 때문에 엄마가 가까이만 와도 기쁘고 평온을 찾아 곧 잠이 듭니다. 엄마를 알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들이 처음 엄마를 알아보는 것은 냄새라고 합니다. 엄마의 냄새, 향기입니다. 젖을 빨고, 얼굴을 비비고, 그렇게 엄마나 부딪히면서 엄마를 알아갑니다. 이것이 진짜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기들은 엄마에 대해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엄마의 나이를 압니까? 엄마의 이름을 압니까? 아니면 엄마의 성격을 압니까? 오직 아기가 아는 것은 엄마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것은 경험적인 것이고, 직관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논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엄마를 알아가는 것은 더 깊은 것입니다. 성도도 하나님을 그렇게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논리와 추리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논리와 추리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그 앎은 이미 변질되어 있고, 타락한 앎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는 게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아십니까? 어린아이는 위험에 처해 울다가도 엄마가 나타나면 울음을 그칩니다. 엄마가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를 얻고, 용기를 얻고, 평안을 얻습니다. 다락방에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밖으로는 위기가 감돕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울음을 그칩니다. 근심하지 않습니다.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을 알아가는 방법이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아는 방법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단지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꿰뚫어도 주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경험적으로만 아는 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각가지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빌립도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느낌으로만 알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아기의 느낌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알다’의 헬라어 원어는 ‘기노스코(ginosko)’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장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친구관계에서 인격적인 친밀감을 통해 깊이 아는 것을 말하고, 부부관계에서 성적인 연합의 관계에까지 이르는 친밀함과 깊은 나눔을 의미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며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알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겸손해야 합니다. 빌립의 질문에서 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교만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하나님을 봐야겠다는 시도는 분명 교만함입니다. 겸손함으로 나아갈 때 주님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신 주님을 아는 것을 성경의 표면적인 내용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 안에서 나병환자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매일 읽으면서 묵상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함으로 주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고 그분을 알아갈 때 우리는 주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알 때 마치 신기루 같이 있다가 사라지는 신앙이 아니라,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에게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1. No Image

    아들을 통하여(히1:1-3), 2010. 9. 12 주일예배

    Read More
  2. No Image

    결박을 푸는 금식(마6:16-18) 2010. 9. 5 주일예배

    Read More
  3. No Image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5-15) 2010. 8. 29 주일예배

    Read More
  4. No Image

    하나님이 갚으시는 구제(마6:1-4) 2010. 8. 22 주일예배

    Read More
  5. No Image

    기도의 특권(요16:23-33) 2010. 8. 15 주일예배

    Read More
  6. No Image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16-24) 2010. 8. 8 주일예배

    Read More
  7. No Image

    진리의 성령 (요16:5-15) 2010. 8. 1 주일예배

    Read More
  8. No Image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요15:18-16:4) 2010. 7. 25 주일설교

    Read More
  9. No Image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1-9) 2010. 7. 18 주일예배(권오국목사)

    Read More
  10. No Image

    내가 너희를 택하였노라(요15:12-17) 2010. 7. 11 주일에배

    Read More
  11. No Image

    나의 평안을 주노라(요14:27-31) 2010. 7. 4 주일예배

    Read More
  12. No Image

    보혜사이며 진리이신 성령(요14:16-24) 2010. 6. 27 주일예배

    Read More
  13. No Image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요14:12-15) 2010. 6. 20 주일예배

    Read More
  14. No Image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요14:7-12) 2010. 6. 13 주일예배

    Read More
  15. No Image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14:1-7) 2010. 6. 6 주일예배

    Read More
  16. No Image

    포로민에게 보내는 편지 (렘29:1-14) 2010. 5. 23 주일예배

    Read More
  17. No Image

    언약의 통로인 가정(창24:61-67, 엡5:22-28) 2010. 5. 9 주일예배

    Read More
  18. No Image

    말과 경주하는 선지자(렘11:18-12:6) 2010. 4. 11 주일예배

    Read More
  19. No Image

    열방의 선지자 (렘1:1-10) 2010. 4. 11 주일예배

    Read More
  20. No Image

    부활하신 그리스도(요20:11-18) 2010. 4. 4 주일예배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 41 Next
/ 4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