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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을 모아놓고 성만찬을 하신 후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이 근심하지 말라.”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을 격려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그들에게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할 제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이 다락방 강화가 시작되지 직전에 그 자리를 떠났다고 요한복음 13장 30절에서 말씀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어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 수제자였습니다. 가장 열정이 있었고, 매사 앞장서서 주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드러내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이 근심할 이유는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요8;21, 13:33, 36).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과정이었지만, 제자들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랐습니다.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어쨌든 주님과 함께 하기로 나름대로 다짐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스승이 떠나신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실 때 그들은 그 의미도 정확히 모를뿐만 아니라, 그 말씀 자체만으로도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더 그분을 알지 못했다.’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주님과 함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심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근심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은혜, 인도하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할 때 근심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님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변함없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는 너머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향한 강한 신뢰만이 우리를 승리하게 합니다.

이 무지가 세속적 욕망을 갖게 합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정치적 욕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로마로부터의 해방, 부패한 유대 지도층을 향한 변혁, 그리고 예수님을 수장으로하는 새로운 정치세계를 이루려는 야망이 아직도 그들 안에 부글부글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욕망이 그들을 좌절하게 했습니다. 버리지 못하는 그들의 꿈이 그들을 너머지게 했습니다. 이점에서 오늘 우리들도 같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섭리와 계획이 우리의 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잊어버립니다. 주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속적 욕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무지가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알지 못하면 필요없는 욕심을 갖게 됩니다.

제자들의 꿈은 유다 사회를 로마로부터 해방해서 변화된 유대 사회, 유대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은 온 세상을 죄와 사망, 악한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가장 기쁘고 아름다운 주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야망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야 했습니다. 세속적 욕망으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계획이 더 크고 놀랍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해야 합니다.


I.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여기서 ‘믿다’는 동사는 둘 다 명령형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근심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 두려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일도 결국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성도님들은 구원을 믿으며, 부활을 믿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흔히 믿음을 지적인 동의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예! 저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라고 대답할 때, 이 말은 대부분 지적인 동의를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고 떤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지적인 동의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인격적인 신뢰이며 의지하는 마음을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은 그분의 사랑과 관심과 인격과 보호하심을 믿고,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인격과 더불어 그분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길이 때로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신리하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격은 약속과 함께 붙어 다닙니다. 떨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약속을 변개치 않으시는 분이시며, 당신 자신을 걸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어, 그러면 돼, 내가 다 책임질께!”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의 염려의 문제는 다 해결된 것입니다. 믿음이면 다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모든 염려와 근심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책임지고 계십니다. 다만 내가 맡기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근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승리하셨는데, 내가 맡기지 못함으로 내 안에는 여전히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마음의 평안을 누리십시오.


II. 천국은 약속된 실재다.

두 번째 주님께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천국에 대한 확실한 보장입니다. 2-3절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3절은 해석상의 문제가 있는 구절입니다. 그동안 번역상의 문제도 있었고, 또 천국에 대한 오해도 갖게 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것을 다 뒤로 하고 본문에서 보려고 하는 것은 천국의 확실성입니다. 천국은 약속된 실재라는 점입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양으로 되어 있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사실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는데, 그곳은 주님이 있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3절 하반절입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는 사실 천국에 대한 말씀에서 맨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면 커다란 맨션에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석하게 된 이유가 바로 KJV 성경에서 헬라어 라는 말을 mansion으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네)라는 말은 mansion이 아니라, 그냥 장소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집은 오이코스입니다. 이런 해석이 가져오는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넓은 맨션을 가지고 주님이 부르셔도 늦잠 자면서 일어나지도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분과의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천국을 당신과 여전히 함께 하실 곳으로 말씀합니다. 주님의 떠나심으로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영원히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바로 그곳을 준비하고 다시 너희에게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천국을 주님과 상관없이 상상합니다. 흔히 우리는 천국을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를 생각합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곳, 내 맘대로 하고, 하고 싶은대로 해도 우리 안에 죄가 없기 때문에 맘 놓고 할 수 있는 곳쯤으로 상상합니다. 또 다른 죄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주님과의 관계성에 여전히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해 관심이 없는 분은 천국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굳게 세워줍니다. 이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III.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4-6절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다고 설명하셨는데, 여기서 and로 연결된 이 세 단어가 헬라어에서 사용될 때는 보통 두 번째와 세 번째 나오는 단어가 첫 번째 나오는 단어를 보충해서 설명해 주는 의미로 쓰여집니다. 그래서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내가 곧 길인데, 그 길은 진리와 생명의 길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빌립이 질문한 것처럼 주님이 가시는 그 길, 즉 부활과 승천을 통해 아버지 집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 자체가 되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이 가시는 길을 압니다. 이것이 4절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알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이 가시는 길도 아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 말씀에서 관계가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다는 말씀은 그분의 유일성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여기에 길과 진리와 생명은 유일성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혼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잡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따라가면 됩니다. 주님만이 길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만 고정시키면 됩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너무도 쉽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만을 믿고, 그분만을 신뢰하고 가면 됩니다.

문제가 복잡하게 꼬일 때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면 됩니다. ‘그래, 길은 하나야. 오직 주님만 보고 가면 돼.’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돌아보면 됩니다. 거기에 어떤 논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거기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길되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바다 위를 걷다가 풍랑을 볼 때 바다에 빠졌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도 주님을 향한 시선을 잃어버리면, 즉 길되신 주님을 떠나면 당연히 차는 빠지게 되어 있고, 우리의 인생은 시궁창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그 길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진리의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은 곧 진리입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둘일 수 없습니다. 진리가 둘인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오직 하나의 진리, 유익한 진리로 오신 그분을 좇아야 합니다.

또한 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생명은 자라납니다. 생명은 성장합니다. 생명은 반응합니다. 생명은 기쁨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이신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마음의 근심이 있습니까? 염려가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갈 때 우리의 인생은 복될 수밖에 없으며, 은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은혜가 성도님들께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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