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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 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예수님과 성도 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처럼 서로 끊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당신과 성도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아주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연합의 관계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둘이 하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낯설게 보아야 합니다. 본문을 낯설게 보면 본문에서 매우 의아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점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분명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성도는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성도를 포도나무와 가지라고 비유하심으로서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표현한 성경의 다른 표현들도 역시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몸과 지체의 비유,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신랑과 신부,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양과 목자, 이 모두는 다 완전한 일체를 이루는 표현입니다. 양 없는 목자가 있을 수 없고, 목자 없는 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랑 없는 신부가 있을 수 없고, 신부 없는 신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몸과 지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전체로 하나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잘라져 나간 가지는 결국 죽습니다. 잘라지는 순간 곧 죽은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은 신비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얼마 전 주보 4면에 소개한 글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이 책을 먹으라”는 책에서 소개된 내용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한 성도의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안토니였고, 트럭 운전수였습니다. 그는 교육을 많이 받지도 못한 젊은이였습니다. 중학교만 졸업했고, 책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그는 KJV 성경을 한 해 동안 세 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내 메리도 남편을 따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메리는 모범적인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때때로 신앙의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안토니는 아내에게 성경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설명을 해 주는데, 때때로 설명하기 어려우면 자기 교회 담임목사이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을 초대해서 성경의 설명을 듣곤 했답니다.

어느 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비유에 대한 설명을 애써서 했지만, 잘 납득이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때 뒤에서 듣던 이 남편 안토니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메리, 그대로 살아야 돼. 그래야 이해할 수 있어. 밖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고, 그 안에 들어가야 돼. 아니면 그게 당신 안에 들어오게 하든가.”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든가, 아니면 내가 그 말씀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오늘 주님은 바로 그 말씀을 하십니다.(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과 아내가 한 집에 살아갑니다. 10년 혹은 20년 정도 살아보니까 이제는 내 아내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고, 내 남편이 내 안에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살면 살수록 그 속은 알다가도 모를 것 같습니까? 이 말씀은 주님과 내가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내가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분이 계셔서 그 분이 나를 주관하고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는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가깝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주님과의 관계를 적당히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너무 가까이 오면 부담스럽습니다. 그 분이 나의 삶에 너무 많은 것을 간섭하시면 아마도 상당히 귀찮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깊이 보면 그 말씀이 얼만큼 진실일까? 만약 그분의 말씀이 100% 진실이라면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5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그리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지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면 과실을 많이 맺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예수)을 믿고 안믿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일단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고, 그분께 날마나 나를 드러내는 것은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길입니다. 그분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많은 과실, 양질의 과실을 맺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게 영양을 공급하듯이 주님은 성도들의 삶에 계속적으로 영적인 생명력을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예수 없이 불가능하고, 예수 없이는 행복할 수 없으며, 예수 없이는 참된 기쁨도 감격도 삶의 목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삶을 살아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밖에서만 서성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정해 놓은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우리가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길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들어가면 갈수록 더 신비로운 주님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신앙에 의문투성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날마다 질문은 하긴 하지만, 아니 어쩌면 질문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서 안토니가 말한 것처럼 그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실제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아니 아주 깊이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고는 주님께서 주시는 그 풍성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을 경험이 아니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그 예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 진짜 은혜를 얻지 못하고, 그 분 안에서 누리는 참된 은혜를 누리지 맛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정말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손실도 감수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산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나도 주님 앞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도대체 주님 안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온갖 손해를 감당하는 것이며, 주님 안에서 무엇을 얻었기에 그들은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들이 거기에서 얻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주교 신부님들은 결혼을 하지는 않지만, 결혼상담, 부부상담, 그리고 결혼주례도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그렇게 하면서도 결혼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부부생활에 대한 궁금함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신부님들과 친하게 지내는 목사님들이 함께 대화를 해 보면 그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묻지 못하지만, 개신교 목사님들께는 부부생활에 대해 질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경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혼을 안해 보고는 알 수 없는 신비가 그 안에 있습니다. 평생 왠수라고 말하면서도 같이 사랑하며 사는 그 신비가 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 안에 잠기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론은 그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일 뿐입니다. 그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기갈과 갈증으로 피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을 누리십시오.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그분께 온전히 전적으로 붙어서 그분으로부터 받는 영적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께 붙들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가지고 내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형식적인 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II.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그러나 본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시지만, 1절에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농부는 포도원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포도원 농부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많이 맺게 합니다. 그 주된 일이 바로 전지(가지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죽은 가지를 제거하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하기 위해 깨끗하게 합니다.

죽은 가지를 그대로 방치하면 병충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농부는 열심히 죽은 가지를 잘라버립니다. 때로는 과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살아있는 가지를 잘라내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가지가 많거나, 잎이 많으면 열매의 질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지작업(가지치기)는 가지에게는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그러나 더 실한 과실을 맺기 위해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하신다고 합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에서도 필요없는 가지를 잘라내십니다. 그것은 사실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것을 가로막는 죽은 가지를 잘라내십니다. 그렇게 가지를 잘라냄으로 막혔던 혈관을 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수혈하십니다. 그 생명의 공급을 통해 새 힘을 얻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로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잘라져야 할 죽은 가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믿기 전에 다 죄로 인해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심장이 멎었을 뿐만 아니라, 혈관과 모든 맥박은 멈춰 있었습니다. 팔과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온 몸은 모두 제 기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그분의 심장을 넣어주셨습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박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생명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으로 그 사람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심장에서는 강하게 피를 뿜어내고 있지만, 혈관이란 혈관은 다 막혀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가 흐르지 못합니다. 곳곳에 죽은 피로 혈관을 막고 있습니다. 죽은 가지들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왜 예수를 믿으면서도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전지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삶의 습관은 여전히 죽은 자의 모습입니다. 상황에 반응하는 것은 죽은 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심장 소리를 들으면 분명 산 것 같은데, 다른 모든 기능은 죽은 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겨우 입을 움직이지만, 그의 언어는 죽은 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겨우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만,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뭔가 생각을 하는 것 같지만, 그는 여전히 창조적인 사고를 하지 못합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심장에서 뿜어 나오는 그 혈액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영양을 공급받고, 삶의 영동적인 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심장이 뛰어야 하고, 섬김의 손과 다리가 움직여야 하고, 바른 언어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목적히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중요한 사실은 우리 주님의 심장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그 분 안에 있으면 우리는 결국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팔과 다리가 움직임으로 섬길 수 있고, 우리의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옴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차가운 다른 이의 가슴을 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그분 안에 거하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지치기를 통해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천국의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천국의 삶을 연습해야 하고, 이곳에서 천국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천국을 누리지 못하면,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로 직접 들어감으로서 그분이 주시는 그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 안에 거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치기를 하고, 깨끗하게 하시는 과정을 거쳐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넣어주십니다. 그분의 혈액이 온몸을 타고 흘르도록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막힌 곳을 뚫고 때로는 수술을 통해서, 가지를 자르고, 봉합수술을 하면서 사정없이 길을 뚫습니다. 그런 아픔이 있고 난 후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의 혈액이 심장으로부터 흘러 나갑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심장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갑니다. 우리의 팔이 제대로 섬김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우리의 다리가 진정한 전도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렇게 움직이는 팔과 다리, 우리의 입술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언어가 흘러 타고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흥분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분명 우리로 하여금 전에 체험해 보지 못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그 은혜, 그 약속, 그 능력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십시오.그리고 그 은혜를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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