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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말에 우리교회의 교인분포도를 조사해 봤습니다. 주민 세대수가 34세대(46명), 방문세대가 33세대(51명), 그리고 대학부 학생이 34명이었습니다. 물론 그 후로 성도님들이 더 오시기도 하고, 또 한국이나 다른 곳으로 가신 분들도 있습니다. 대학부는 가을에 신입생들이 많이 왔습니다. 아무튼 우리교회가 나름대로 상당히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거의 3분의 1씩 성도님들이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주민들 중에도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들과 직장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나누어 보면 다시 더 세분화됩니다. 방문세대도 1년간 계시는 분들에서부터 2년 이상 5-6년까지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학생도 있고, 방문교수들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또 가치관과 삶의 스타일도 다양합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우리가 정말 서로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도님들 간에도 서로 다름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마다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이곳이 바로 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말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모여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격려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바라기는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불편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실 저도 때로는 이런 우리교회의 모습이 목회하기에 참 불편하고 어려운 조건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대학부는 대학부대로 전혀 별개입니다. 열심히 찬양단으로, 성가대로 봉사하지만 목사의 입장에서는 전혀 별도의 목회영역입니다. 주민들과 방문하신 분들의 생활패턴과 가치관도 상당히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이해하려고 하는 의지적인 노력이 없으면 하나 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사람들의 형편과 관심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력을 갖기에는 상당히 취약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교회의 구성원은 가장 교회다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한 단체도 아니고 세상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한 집단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모인 가장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 어디에 가도 교회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연세 드신 성도님들까지 그리고 다양한 사회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모여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정말 기대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와 같은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는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저처럼 이렇게 다양하게 모인 교회 구성원이 조금 불편하게 여겨지셨던 분들은 이제부터는 그것을 긍정적인 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복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할 수 있고, 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우리교회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로마 교회에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에는 음식과 절기에 대한 규정들을 철저히 지키는 전통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전통이 기독교에 그대로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음식과 절기(날)를 지키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즉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음식에 대한 규정들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이 쓰인 당시에는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면 그 음식을 먼저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하고 먹습니다. 심지어는 시장에서 파는 음식조차도 그렇게 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시장에서 파는 음식조차도 사먹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먹어도 상관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음식을 사 먹을 땐 ‘묻지 말고 먹으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고전8:12-13). 만일 내가 먹는 음식으로 다른 사람이 실족케 된다면 나는 평생토록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로 실족치 않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다시 음식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절) 이것을 보면 초대교회 당시에는 어디서나 이런 음식과 절기를 지키는 문제가 매우 중요한 신앙의 issue가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아무 것이나 잘 먹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고 먹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아직도 여전히 유대교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어떤 음식을 먹을 때는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음식을 가려서 먹으려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아직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어떤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가 곧 그들의 신앙의 잣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거나 혹은 어떤 규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큰 문제는 위에 나오는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는 믿음 있는 사람이나 혹은 음식을 가려서 먹는 사람들이나 모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음식을 가려 먹는 사람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3절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믿음이 없는 자라고,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먹는 것을 가리는 사람을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부류의 사람들 중 어느 한 쪽에 힘을 실어주지 않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가 동일하게 서로를 인정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모습일 뿐인 것처럼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서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제 주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절기를 중요하게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절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함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천편일률적인 획일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 그냥 놔두라는 것입니다. 굳이 자기 맘대로 고치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부자 사이에 갈등이 매우 심했습니다. 나중에는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서로 말도 안하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들이 마음이 괴로워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실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와 보니까 아버지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려와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두 부자는 서로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용서를 구하게 되었고, 그날 밤 부자는 서로 화해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가 어려서는 여행도 함께하고 운동도 함께 하며 좋은 사이였었지”라고 말했습니다. 아들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버지, 제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함께 집 근처의 호숫가에서 초록색 보트를 타고 놀던 것이 생각나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니야, 그 보트는 하늘색이었어” 아들은 초록색이었다고 우기고, 아버지는 하늘색 보트였다고 우겼습니다. 두 부자는 다시 싸움이 붙어서 갈등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때때로 서로 다르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함께 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서로 다름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총 천연색으로 만드셨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게 하셨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라 더욱 축복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다투면서 가정을 세워갑니다. 처음에는 참 힘들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갑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만나 가정을 이루어사는 것은 인생이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축복 중에 하나입니다. 결혼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부부간에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있어도 이것은 축복이야 하고 외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3절 하반절에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를 용납하셨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다가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받아들입니다. 아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그에게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줍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생은커녕 아버지와도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 큰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로 인해 아프고 괴로울 땐 주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넉넉히 서로 다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기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서로 다른 칼라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것은 결코 어렵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고 즐기십시오.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함께 나누는 기쁨이 더하도록 기도합시다. 학생들만 있든지, 사업하는 분들만 있든지, 군인들만 있든지, 할 수 없이 그렇게 모인 교회도 있지만, 사실 우리교회가 복된 교회입니다. 이것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제 7절 이하에 보면, 또 하나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 됨입니다. 일치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하나는 같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목적입니다. 우리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교회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서로 달라도,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인생의 배경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회, 우리 인생의 목적은 같아야 합니다. 7절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목적이 달라졌다는 것은 가치가 달라진 것이며, 의미가 달라진 것입니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목적이 달라지면 다른 물건이 됩니다.

예를 들어 칼을 들 수 있습니다. 똑같은 하나의 칼이지만, 사람을 해치는데 사용될 수도 있고,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것이든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관계에 있습니다. 즉 ‘그릇’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릇은 그 속에 무엇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릇이 어떤 물질을 담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은 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즉 자신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인간은 무슨 목적인가를 위해 쓰임 받아야 합니다. 목적이 없는 인간은, 또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바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가정은 우리에게 하나의 목적일 수 있습니다. 가정이 있어야 아침에 일찍 일어날 이유가 생기며, 부지런할 이유가 생기고, 돈도 벌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정이 없으면 일해야 할 이유가 희박해집니다. 주부가 가족들을 위해 밥을 매일 짓습니다. 많은 주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 있으면 밥을 짓지만, 혼자 있을 때는 사실 밥 한 끼 하는 것도 귀찮아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적으로 남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 우리 마음이 이런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아! 내 인생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구나. 삶의 더 큰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만, 그것은 기쁨으로 감당하려고 할 때만 최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8절에서 이렇게 인간의 목적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인생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는 것까지도 목적을 가지고 죽는 것입니다. 할 수 없어 죽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죽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사람이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목적이 있어서 왔다가 목적이 있어서 죽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의 목적은 사람이 바꿀 수 없습니다. 이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다르지만,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나 살아가는 스타일이 다를 수 있지만, 인간의 목적은 동일해야 합니다. 목적이 다른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산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살려고 발버둥 칠수록 실제로는 죽어갑니다. 교회 안에 서로 다른 지체들이 모여 믿음의 삶을 나누지만 우리의 목적은 같아야 합니다. 목적이 틀린 교회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때때로 교회생활을 하면서 직분을 맡는 것이 좋아보여서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믿음을 가졌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구원의 감격도 있었습니다. 남을 섬기는 것도 좋았었고, 때로는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봉사하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직분이 좋고, 남들이 인정해 주는 것을 즐깁니다. 믿음의 고백은 잃어버리고, 봉사의 감격은 빼앗겨 버리고, 존경받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잘못된 목적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교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헌금했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사건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목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교회도, 우리 스스로도 우리 자신에게 변질된 목적을 허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는 교회, 오직 주의 복음만이 전파되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면서 누리는 기쁨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정말 귀 기울여야 할 말씀이 나옵니다. 10-12절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대 앞에 서면 모든 혀가 하나님 앞에 자백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2절에는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모두가 일단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심판대를 통과한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심판대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에 보면,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즉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경고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천국을 성도들이 누릴 안전장치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10절 말씀은 믿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네 형제를 판단하려고 하기 전에 네가 장차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바라보고 더욱 근신하여 자신을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살피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볼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놓고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누리기 위해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자신의 일을 등한히 하는 사람이 남의 일을 참견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 시비를 걸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다른 사람을 참견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을 살피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가정 공동체 안에서, 회사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그리고 성도님들 가정이, 그리고 삶의 일터에서 다르지만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큰 기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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