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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볼 때 그 말씀의 맥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에베소서는 두 가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는데, 에베소서 1-3장과 4-6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른 바울 서신과 같이 에베소서도 전반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에 대해 초점을 맞춰 말씀하고, 후반부는 그에 따른 성도의 삶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래서 4장으로 들어가면 바울은 바로 권면의 말씀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바울은 권면의 말씀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고, 하나 돼야 할 이유를 말씀합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 되어야 할 이유는 이미 1-3장에서 다 말씀했었습니다. 그래서 4장의 권면으로 넘어온 것인데, 바울은 그 말씀을 다시 합니다. 물론 반복하는 것은 아니고, 또 다른 이유, 혹은 앞서 말한 이유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두 주 전부터 계속 보고 있는 17절 이하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17절에서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방인과 같이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고는 이방인의 삶에 대해, 그리고 성도는 그들과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성도가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와 이방인가 다르게 살아야 할 이유를 너무도 분명하고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흔히 바울이 그렇게 심한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전했던 것을 그의 성품이나 기질로부터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그는 본래 그런 신실함이 있었던 사람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베소서를 보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울의 헌신은 개인적인 성품이나 기질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분명한 확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통해 우리가 마땅히 살아가야 할 이유를 분명히 깨달아 간다면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헌신과 확신에 붙들린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면서 오늘 본문을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본문 이해

오늘 본문 22-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조금 조심스럽긴 하지만, 본문을 기록한 헬라어 원어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였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형으로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원어는 헬라어의 동사의 ‘부정과거 부정사 중간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어를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이 의미를 과거의 일회적 사건을 의미하며, 이 말씀이 앞선 21절 하반부의 “가르침을 받았을진대”를 수식합니다. 그리고 중간태라는 말은 그 행위가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함이 더 옳다고 여겨집니다. 즉 ‘너희는 ~ 옛 사람을 이미 벗어버렸고, 또한 ~ 새 사람을 입었다는 가르침을 이미 받았다’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아보입니다. 골로새서 3장 8-10절 말씀도 동일한 맥락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혼인잔치 비유(마22:1-14)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인 혼인 잔치 비유에서도 같은 맥락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에는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을 위해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두 번이나 반복된 초청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임금의 종을 박해하고 때려 죽였으며, 다른 핑계를 대고 오지 않자, 임금은 거리에 있는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를 초청했습니다. 잔치 자리에는 자격 없는 자들이 모두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임금이 나눠준 예복을 입었기 때문에 잔치는 초대받은 개인의 허물와 신분 낮은 사람의 부족함은 다 가리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그 사람이 임금에게 보이자 그는 밖으로 끌려 나가 어두움에 던져지고,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감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늘의 맥락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임금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모두 자격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예복이 그들의 허물을 덮어 주었습니다. 즉 그들은 모두 임금의 자비와 은혜의 예복으로 인해 개인적인 자격 없음을 가리고 임금이 배설한 영광스런 잔치에 마음 놓고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자기가 입고 온 옷이 왕이 주는 예복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고, 그렇다면 그는 왕의 호의를 무시하고, 거절하는 악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왕의 호의를 무시할 수 있지만, 그런 자는 왕의 잔치에까지 올 자격은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여기서 왕의 예복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죄 용서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의의 옷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복 입은 자의 특권

여기서 우리는 왕의 예복을 입은 자들의 특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왕궁에 있는 동안 예복을 입었기 때문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 왕이 배설한 모든 잔치에 참여해서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동일한 기쁨과 특권,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밖에서는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영광이었으며, 기쁨이었습니다. 왕궁은 왕의 통치가 가장 확실하게 미치는 곳입니다. 그곳은 잔치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안전이 확보되며, 삶의 모든 필요를 공급받는 곳입니다. 그 안에서 굶주리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 먹을 것을 걱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곳은 이 땅에서 가장 풍요하고 풍성한 곳입니다.


영광으로 인해 고난도 받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믿음으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되고 누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영광의 자리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런 영광의 은혜 때문에 또한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깊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높아지고 명예로와지고, 탁월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선포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가 고난을 받고 아픔과 박해,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그들의 슬픔을 충분히 이기게 하고, 충족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땅에서는 비록 초라하고 부족하고 볼품 없이 산다고 해도 그가 장래에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그 영광이 더 크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충분히 이길 수 있음을 삶 속에서 보여주는 삶을 살기 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삶을 살기 원하시는 지 누가 이 땅에서 영광을 누리며 삶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지, 누가 이 땅에서 고난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영광이 큼을 드러내게 될 지는 우리의 결정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이 두 종류의 삶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양자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영광을 누리는 삶이며, 어느 한쪽 성도가 다른 성도보다 더 낫거나 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왕궁 안에서 동일한 예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초대를 받아 동일한 영광을 누리는 자이기 때문에 서로 동류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20절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거야 이론이지, 실제의 삶은 다르다.” 라고 말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이것은 이론입니다. 그러나 이론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론이라는 말은 가짜라는 뜻입니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깊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문제는 그것이 이론이냐 실제냐가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냐 거짓이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것이 어려운 문제다 라는 식의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그것은 믿음 있는 사람, 의지력이 있는 사람, 본래부터 오래 신앙생활을 해서 훈련된 사람의 몫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말씀을 전혀 잘못 듣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헬라어 문법까지 동원해서 하려고 했던 말씀의 요지는 그것이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그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즉 왕궁에 초대받은 사람이 임금이 주는 예복을 입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것을 입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일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임금의 초대와 그로 인해 이루어지는 모든 은혜의 사건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즉 내가 부정한다고 다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우리가 새 사람을 입고, 임금이 주는 예복을 입는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우리의 인생에서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왕궁에서 임금의 초대를 받은 사람으로 남은 모든 것들을 보장받고 사는 왕궁의 시민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복을 입으면

새 사람을 입으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예복을 입은 사람은 그 영광에 참여함과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남을 무시하려고 하고, 남과 작은 키재기를 하려고 합니까?  바로 이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남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하루 해가 지나가지 않는지 아십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이유는 그분의 은혜에 대한 깊은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마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 놀라운 구원의 비밀, 예복의 비밀을 알지 못한채 세상적인 원리를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사람을 입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왕궁에서 예복을 입고 임금이 주관하는 잔치에 참여하며 모든 특권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성도님들도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마음이 편안하면 그로 인해 다시 불안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평안 자체를 누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뭔가 계속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입니다. 어느 날인가 그것이 어디로부터 온 마음인 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완벽주의에서 오는 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열심과 부지런함을 근거로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마음이었습니다. 결국 자기 의로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의 믿음 안에서 교묘하게 침투해 들어와서 우리 안에 믿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하곤 합니다.

나의 완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열심을 통해 자신을 인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임금이 주는 예복이 아니라 내가 준비해 간 예복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예복을 준비해 간다고 한들 한 나라의 왕이 주는 예복만큼 좋은 것이겠습니까? 여기에 우리는 아주 큰 착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현재와는 다른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 정말 전에는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결론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바로 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사실 처음에는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무척이나 불안하게 하고, 때로는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기도 합니다. 믿긴 믿지만, 우리 내면에 자기 의라는 것이 뿌리 깊이 자라잡고 있기 때문에 강하게 거부하려는 작용도 만만치 않게 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려놓아야 할 내 의를 내려 놓지 못하다가 결국 주님 앞에 통곡하며 자신이 깨어지는 고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결론은, 결국 내려 놓아야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의 세계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의로움을 내려놓고, 오직 그분의 의로 새 옷을 입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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