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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장 1-16절은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해 말씀합니다. 1-6절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라고 해서 모두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 다른 모양, 다른 재능, 다른 은사를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라고 7-1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12-15절에는 서로 다른 은사를 지닌 각 개인이 그리스도의 성숙함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도록 권면하고, 16절에는 다시 이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 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지난 주일 14절 말씀에서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말 것”을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은 교회 밖 세상에서 유혹해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속임수와 유혹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가 교회 안에 횡횡하고 있는 잘못된 가르침과 유행 등의 것들을 잘 분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진리를 분별할 것에 대한 권면입니다. 개인적인 성장에는 진리의 분별이 매우 중요합니다. 귀에 듣기 좋은 교훈이라고 해서 아무 것이나 추종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리란 본래 그것만이 옳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언제나 논쟁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진리인가를 찾다보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논쟁에 휘말리고, 본래 의도하지 않은 자리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서는 이 진리에 관한 언급에서 사랑을 결부시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먼저 진리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진리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항상 “이것이 진리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부합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할 때 대개 열심에 대해 권면합니다. 열정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열정을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열정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오늘날 교회가 복음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묵상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2-30년 전부터 많은 성도들이 큐티를 하지만, 이 역시 말씀을 사유화하는 식으로, 즉 말씀을 자기 유익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격려되는 말씀을 뽑아 기억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한 감동보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 모습을 보던 제자들은 그 십자가를 보고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겠습니까? 깨달음이 먼저입니다. 깨달음이 없이는 감동이 가짜일 수 있고, 옳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진리의 두 가지 특징

진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진리는 자유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본래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매일 고생을 통해 자기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산 속에 있는 수도원의 높은 계단을 매일 무릎으로 기어올라가면서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참고 고생을 통해 자기 죄와 죄책에 대한 짐을 이겨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로마서 1장 16-17절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는 복음이 곧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루터 자신의 고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행보다 더 큰 고난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의 죄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그는 더 이상 자기 죄를 해결하기 위해 고행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부정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는 당대의 학자였고 수도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종교개혁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무지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진리의 두 번째 특징은 칼날과 같다는 점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깨달음을 통해 자유케 하기도 하지만, 진리는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대로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칼에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가 깊게 뼈 속을 파고 들어갑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닭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가 나기 전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이 일로 베드로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배반했다는 사실, 진리를 거스렸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감히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릴리 바다로 되돌아 가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물고기를 숯불 위에 구어 베드로에게 주면서 말을 겁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런 대화를 통해 비로소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다시 나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칼입니다.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온전하지 못한 믿음, 말로만 외치던 허세를 사정 없이 드려내어 도려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2. 사랑에 대하여

그러므로 본문은 진리에 대해 말씀하면서 사랑을 결부시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진리를 좇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진리만으로는 거칠고 건조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논의는 자칫 논쟁으로 비화되기 쉽고, 거친 혈전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진리와 함께 사랑의 마음이 항상 필요합니다.

진리와 사랑이 가장 이상적으로 함께 나타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묵과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 사망을 선언해야 하실만큼 엄격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준비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십자가 위에 달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진리입니다. 누구도 예외를 둘 수 없습니다. 진리는 그만큼 날카롭고 예외없이 겨누는 칼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 위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 죄와 악으로 더러워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진리는 너무도 날카로워서 누구도 그 칼날을 피해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 자리를 당신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개혁을 외치는 한 기독교 사이트가 있습니다. 사정없이 교회의 치부를 들추어냅니다. 사명으로 여기고 그 일을 합니다. 그들은 ‘고통스럽지만 치부를 드러내야 교회가 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일부 동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다 보니 그 사이트는 한국 교회의 어떤 목사는 선한 목사, 좋은 목사이고, 어떤 목사는 나쁜 목사, 악한 목사로 구분짓는 일을 서슴없이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며(롬3;23), 그러므로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롬3:10) 선언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죄를 범하고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는 소위 “나쁜” 목사들, 소위 “나쁜” 성도들 뒤에는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마음을 속에 감추고 살아가는, 그래서 언제 어디서 그와 동일한 모습, 동일한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문제를 드러낸 사람들을 보면서, 그것이 마치 내 문제인 것처럼, 그 문제가 내 속에도 있다고 고통스럽게 회개하며 무릎을 꿇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보면서 안타까워해야 함을 잊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점에서 특별하게 드러나는 인물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주전 5세기 사람으로, 페르시아에서 고위직에 있던 유대인입니다. 예루살렘이 주전 6세기(주전 586년)에 멸망했으니까 약 100년 이상 지난 세대의 사람입니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나서 페르시아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루살렘을 다녀온 동생 하나냐가 가져온 소식을 통해 예루살렘의 성읍이 무너졌고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성읍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오랜 세월 그런 모습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통곡하며 이렇게 회개합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였습니다.” (느1:6하).

그는 사실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는데 아무런 책임도 없습니다. 그는 이방 땅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유대인이라기보다는 페르시아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조상의 죄를 고백하면서 자신을 거기에 함께 묶어 놓습니다. 자신의 내면에도 자기 조상들과 같은 죄가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좀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이 자기 민족의 죄를 대신 지려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6절에서 성도 개인의 성숙함에 대한 마지막 권면으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랑과 진리의 균형은 성숙한 성도의 가장 귀한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균형 있는 삶을 살아감으로 비로소 우리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3.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마지막으로 본문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라”고 말씀합니다. ‘범사에’라는 말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자라감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서 이미 결정된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곤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 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들은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이 말은 베드로와 요한이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특별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는 없다고 제한했던 그들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이상의 성장을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그의 사회적 신분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1905년에 전라북도 김제 옆에 있는 금산이라는 곳에 금산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L. B. Tate라는 선교사가 와서 세운 교회입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조덕삼이라는 마방 주인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고, 그와 그의 집에서 하인처럼 일하는 마부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함께 예수를 믿었습니다. 얼마 후에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뽑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던 조덕삼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교회가 술렁거렸는데, 조덕삼이라는 사람이 오히려 이 일이 하니남의 뜻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부 이자익은 금산교회 담임목사가 없는 사이에 설교하는 사역까지 하다가 결국 평양신학교에서 정식 신학교육을 받고 목사가 되어 금산교회 2대 담임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서서 도왔던 사람이 바로 조덕삼 장로였습니다.

교회에 꼭 이런 뒤집어지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작은 키재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다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는 일이며, 모든 한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세 가지 기억할 일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가진 개대보다 더 큰 기대와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것이 무엇이라고 해도 다 이루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그 계획은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복과 은혜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두려움으로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좋고 선한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있고, 또 우리 교회 가운데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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