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복종하라 (엡5:22-24) 2013. 5. 12 어버이주일예배

by 주병열목사 posted May 1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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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버이 주일(Mother’s Day)입니다. 예배 후에 남선교회 회원들이 어버이날을 기념해서 그동안 늘 수고하던 여자 성도님들을 대신해서 야외식사를 준비합니다. 수고하는 남선교회 회원들에게 감사드리고, 어머니들로서 수고한 여선교회 회원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어버이주일에는 부모님에 대한 설교와 부부관계에 대한 설교를 번갈아 가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올 해는 부부에 대한 설교를 하는데, 오늘은 아내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 두 주 후(5월 26일)에는 “아내를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할 예정입니다.


불공평한 명령

본문에서 우리가 갖는 질문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불공평함입니다. 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복종과 사랑이라는 매우 잘 어울리지 않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은 지당하고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은 이미 오래 전에 설득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과연 이 시대에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얼만큼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면에서 이미 유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답을 먼저 찾아야 다음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역사가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가장 많이 바뀐 것 중의 하나는 평등사상입니다. 모든 사람은 공평하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것은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공평한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고, 한국에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 것은 모두 그런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일들입니다. 이는 분명 고대 시대보다 문화적으로 훨씬 더 발전된 사회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혜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말씀과 같은 내용을 불편해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은 시대에 뒤떨어진 말씀이거나 아니면 고대 시대의 상황에서 선포된 말씀일 뿐이라고 말해 버립니다. 사실 성경도 이러한 평등 사상을 지지합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전 12:13, 골3:11) 인간은 분명 모두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주인과 종이 엄연히 분리된 시대에 초대교회는 그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은혜를 누렸었습니다.

하지만 이 평등 사상이 파생시킨 또 하나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공평하게 태어나서 평등하다고 말할 때 반드시 바로 이어서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은 곧 모든 인간은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권리가 무엇이든 평등한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소유하게 됩니다. 선거권이나 피선거권과 같은 권리가 주어질 때 인간는 평등한 것입니다. 옛날 미국 사회 같으면 동일한 버스를 탈 수 있어야 평등한 것이었고, 동일한 좌석, 아무 곳에서나 자기가 원하는 곳에 앉을 수 있을 때 곧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권리 주장에 대해 부정합니다. 인간은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처지는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인간의 권리를 전제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인인 인간의 운명은 죽음입니다. 권리가 있는 사람은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구원 받을 권리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인간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써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권리가 없었으며, 오직 은혜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었음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자꾸 우리가 어떤 권리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안타까운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의 구원을 드러내는 것’인데, 오히려 이 시대 사람들은 ‘십자가가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닌 존재인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며, 또한 그분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과 희생 위에 이루어진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가 인간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말과 인간이 너무도 소중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에 무게를 둔 것이고, 후자는 인간에게 자격/권리가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처럼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실 우리가 고백하는 말과 우리가 부르는 찬양들 속에는 그런 의미를 이미 많이 내포한 채 불려지고 고백되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볼 때 일단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 안에 숨어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내에게 복종을 명령한 이유

그러면 아내들을 향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을 다시 한 번 보기 원합니다. 22-24절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본문을 이해하는 키는 23절 중간에 있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렇다면 23절 가운데 있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려 6시간 동안 달리신 채 당신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자신을 내주시는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 말고 또 하나의 야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분은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마26:39, 42)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여기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의 이 기도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 이 순종을 통해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는 역사를 성취하셨습니다. 즉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당신 자신을 복종시킴으로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 구체적인 관계를 이 시간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마디로 이 말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한 본질, 즉 같은 본질을 지니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동일한 본질을 지니신 분이심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하기에는 삼위 하나님께서 각각 너무도 뚜렷하게 분리된 사역을 하심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절대로 다른 뜻이 갈리지 않고, 언제나 전적으로 하나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동일본질의 같은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런데 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행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발견하는 놀라운 사실은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시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으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즉, 여기서 놀라운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순종과 섬김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에 대해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고, 그래서 성부 하나님 앞에 이 잔을 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은 얼굴을 돌리셨고, 성자 예수님은 그 성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시고, 오직 성자 예수님의 사역을 돕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놀라우리만치 자신의 존재를 가리우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을 마치 인격이 없는, 어떤 능력의 발출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성령께서 근심하시고 한탄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동일본질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일본질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그리고 동일한 권위와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마치 동등한 권한을 지닌 분으로, 동등한 결정권을 가진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삼위 가운데 완벽한 하나 됨을 이루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는 철저한 복종과 나눔, 자신을 가리우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우리가 이해하는 신개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이런 신개념이 낮은 수준의 신개념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전쟁하고 시기하고 싸우는 신 개념도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철저한 섬김과 나눔, 명령과 복종의 관계 안에서 기꺼이 자원함으로 스스로의 복종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완벽한 평등, 공평의 권한과 힘을 가진 분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삼위의 하나님은 완벽한 평등과 공평의 개념에서의 완전성이 아니라 철저한 섬김과 낮아지심을 통해 이루시는 완전성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수없이 듣고 묵상하면서도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잘르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같이 눈과 코와 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것도 부분적으로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명령과 복종의 관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명령과 복종의 관계 안에서 완전한 하나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명령과 복종의 관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원적인 복종과 섬김을 통해서 완전한 하나, 일치를 이루어갑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그런 배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이 말씀을 주시는 주님의 기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분들 사이에서 누리던 그 아름답고 온전한 연합과 일치를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에 있어서 문제는 남편의 부족함입니다. 남편은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할 것은 남편에 대한 복종의 근거가 남편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편에 대한 복종의 근거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피조된 인간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인간의 삶 속에서 회복하시기를 원하시는 강력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지, 남편에 대한 순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 즉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는 아내에 대한 명령은 남편이 사용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될 명령입니다. 보통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설교를 하면 부부가 집에 가서 꼭 싸우게 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거봐! 목사님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잖아!”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남편은 이 말씀에서 귀를 닫아야 합니다. 남편은 이 말에 대해 전혀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남편이 이용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의 회복을 원하시기 때문에 주신 명령입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인으로 섬겼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남편의 권위를 강요하거나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요구로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 이삭을 괴롭히고 히롱하자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으라고 요구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따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점에서 공처가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스마엘도 자기 아들인데, 어떻게 그 시대, 고대시대에 한 가정의 남편이 아내의 말을 그냥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로 섬겼다는 말씀과 본문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아내에게 주시는 명령이지, 남편이 엿들이라고 주신 말씀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여전히 아내들에게는 이 명령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편의 불완전함 때문입니다. 그렇게 멋있게 보여서 혹~해가지고, 세상이 이 남자만 있는 줄 알고 결혼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남편의 흠은 더 커 보이고, 그렇게 멋있었던 모습은 점차 쪼그라들고, 힘 없고, 작아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릴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WalMart에 가서 return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남편이 내가 복종할만한 능력이나 가치가 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결론

제 아내가 가끔 저에게 ‘당신은 가진 것이 없어서 이혼을 하더라도 위자료도 받을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평생 같이 살아야겠다’고 농담할 때가 있습니다. 농담이지만,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면서 서로 의존적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부부가 서로 개체로서 완벽하다면 같이 살아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몸은 참 신비합니다. 몸의 모든 지체들이 모아졌을 때 몸은 온전한 하나의 몸이 됩니다. 몸의 지체들 중 아무리 작은 지체라도 없으면 온전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몸의 지체는 서로 강한 의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있음으로 그가 온전하게 되고, 그가 있음으로 내가 온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질서가 있고, 이 질서를 위해 순종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순종한다는 말은 지배한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손과 발은 머리의 지시를 받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손과 발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서로 돕는 관계, 돕는 전제 아래에서 명령과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로운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아내로 하여금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명령이 그 본래의 의미로 들을 수 없는 이 시대가 참 안타깝습니다. 가정마다 온전한 주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신비로운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가정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