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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세 주간 동안 인간의 죄에 대해 지적하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주는 세상적인 죄들에 대해 지적합니다. 윤리적인 죄와 성적인 타락,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죄들에 대해 신랄하게 도전했습니다. 두 번째 주는 도덕주의자들의 죄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들은 도덕과 윤리를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이었지만, 남을 판단하는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고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 번째 주는 유대인의 죄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인의 죄입니다. 종교인들이 쉽게 짓는 죄는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고 남용하며 악용합니다.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유익을 구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간음에 대한 계명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부부가 이혼을 해야 할 경우는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주어서 그가 다른 곳에 가서도 창녀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게 해서 그 사회에서 불행하게 되지 않도록 율법적으로 당시 약한 여성들을 배려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남자들은 이 법을 악용했습니다. 아내가 싫증이 나고 다른 여인에게 관심이 갈 때 그들은 언제든지 이혼증서만 써 주면 이혼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있을 때 이혼증서를 써 줌으로써 그들은 합법적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유대인들, 즉 종교인들의 율법 남용의 일은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주 위와 같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너희들이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라 자부하지만, 표면적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면적 할례가 중요하며,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몸에 하는 것보다 마음에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게는 언제나 유대인들의 도전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도전들 중에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로마서 3장을 시작하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 혹은 도전을 로마서에서 언급하면서 그에 대한 답변을 줍니다. 그 첫 번째 도전이 1절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만약 바울의 말처럼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우리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우리가 할례를 받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냐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 다음 질문으로 가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징검다리 질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받은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유대인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의 후손을 통해 주신 언약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 되지 않겠냐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은 아브라함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셔서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언약)은 그의 후손,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표증으로 이스라엘 백성 남자들은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언약을 외적으로 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몸의 할례의 흔적을 보면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새롭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볼 때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려운 고난을 당할 때도 자기 몸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야’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 하셔’ 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랑만 남고, 삶은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부심은 남아있는데, 그 자부심은 교만이지 삶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남을 우습게보고, 저들은 할례 받지 못한 백성이라고 상종조차 하지 않던 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 너희의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강하게 도전하는 말씀을 2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실제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의 말대로 할례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할례의 언약과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유대인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은 모두 무엇이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실패하실 때가 있느냐는 질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특권이고, 귀한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할례를 받았지만, 할례에 따라오는 삶이 없다면 그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그들은 할례를 통해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할례를 받을 때는 할례의 흔적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하고 느끼고 고백하고 그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할례를 자랑만 했지, 그에 따라오는 고백도 없고, 삶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의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냐고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날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믿는 부모님들은 아기로 하여금 유아세례를 받게 합니다. 유아세례라는 것은 부모님의 신앙고백으로 아이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 아이를 나의 아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아이로 키우겠다는 서약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귀한 고백입니다. 유아 세례를 받고 자란 아이는 장성해서 부모님의 신앙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기도를 받으면서, 우리 아기 나중에 커서 훌륭하게 자라고 하나님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귀한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받고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내 부모님이 나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키워왔음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의 유익을 더 크게 확장시키는 은혜를 누릴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반드시 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나중에 믿은 사람들보다 더 못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유아세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유아세례는 그 자체로서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유아세례를 소중하게 여기며 부모님의 신앙을 내가 이어받지 않는다면 유아세례가 자신에게 아무 것도 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랑할 일이 못됩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는 목사의 사역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아이에게 목사 된다는 소리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목사 됨이 그렇게 감사하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목사가 되면서 처음 적응되지 않았던 것은 주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도 보내고 싶고, 가정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은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토요일 늦게까지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수고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목사 됨을 지켜나가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것이 목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없고 가운 입은 목사라는 사실 자체로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들로 봉사할 기회가 있습니다. 성가대와 꽃꽂이와 주방봉사와 청소봉사 등, 우리교회는 참 할 일이 많습니다.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 자체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서 남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자리가 나에게는 기쁨이요 감사요 감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기쁘고 감사해서 그로 인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드리는 수고가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도라는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할례를 삶의 고백 없이 다만 자기들의 자랑으로만 사용했던 유대인들의 이중적인 신앙생활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살펴보고, 믿음의 고백과 삶의 기쁨으로 주님께 응답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5절부터 8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성경(공동번역)을 통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 또 "나의 허위가 오히려 하느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을 받아야 하느냐?" 하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예 선을 드러내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 하는 말이 나옴직도 합니다. 사실 내가 바로 그런 말을 한다고 하면서 나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단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마태복음 20장 28절의 말씀대로 사람들을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 땅에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일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왜 그가 벌을 받아야 하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궤변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이런 논리적 함정에 빠질만한 이야기는 더 많이 있습니다. 요셉이 두 번의 꿈을 꿉니다. 한 번은 꿈에 밭에서 추수를 하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자기 단에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꿈에서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별에게 절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그 미움이 결국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넘기는 증오를 갖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요셉은 애굽에 팔려갔고, 그로부터 13년 동안 종살이와 옥살이를 하고 난 후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요셉이 누구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죄 가운데 멸망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인간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셨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온갖 과일 나무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한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의 열매만큼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대한 원인제공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 짓는 자들의 핑계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냈다면 내가 왜 심판을 받아야 하냐고 항의합니다. 8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사람들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아서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왜 그들의 행위를 나쁘다고 해야 하느냐는 도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굉장한 도전입니다.

이런 도전을 오늘 우리들도 매우 자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신학교를 졸업할 때쯤이었습니다. 어느 동료 전도사가 졸업도 하기 전에 먼저 사역을 나갔습니다. 다소 지방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디든 간다는 마음으로 부름을 받고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담임목사님과의 갈등이었습니다. 주일 예배가 마치면 교역자들이 회의를 하는데, 보통은 밤 12시까지 하는 것은 보통이었고, 어떤 경우는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기도회를 할 때까지 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시간에 효과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담임목사의 왕국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목회하는 곳에 참여하면서 이 전도사님이 마음에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8개월 만에 그 교회를 나왔습니다. 여러 가지 만류와 회유가 있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 자리를 나왔습니다. 어디 가서 다시 목회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목회를 안 하면 안했지 이런 곳에서는 안한다고 결심하고 나왔답니다.

얼마 후에 그 전도사님에게서 다시 이런 고백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그렇게 교회를 나옴으로 그러한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책망하심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즉 나도 잘못한 것이지만, 나의 불의를 통해서 그의 잘못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의 말씀처럼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잘못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된 것을 가르칠 수 있다면 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깨달은 것은 그 분의 잘못은 그분의 잘못이고, 나의 잘못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의 잘못을 고치려고 내가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너그럽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진리의 칼을 드리대곤 합니다. 자신의 불의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 되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서 종교적 위선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없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자칫 우리에게 유대인들과 동일한 종교적 위선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살피는 근신하는 마음이 없이는 우리는 매우 자주 그리고 매우 쉽게 이런 위선과 오만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소중히 여기자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으면 그 할례의 의미를 깊이 새기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과 어려움 중에도 그것이 나의 삶에 힘과 소망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월성을 자랑하는데 사용하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 그리고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악을 합리화시키는 궤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나의 악한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면 내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냐고 논쟁하는 유대인들처럼, 우리들도 간혹 결과만 좋으면 동기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지적하면서 나는 오히려 법을 어깁니다. 세상의 악을 멸하기 위해 내가 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지적합니다.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 더욱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자신을 돌아보는 근신하는 자세를 지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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