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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서로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시는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예배의 감격이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바로 예배하는 일입니다. 목사래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은 우주의 창조주시며 우리를 지으신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의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요13:1).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본문 2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즉 하나님이 한번 부르시면 후회하시거나 돌이키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우리를 택하시면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위험 가운데 빠져도 우리가 고난 가운데 빠진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우리가 잘못을 한다고 해도 주님은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금방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번 택함 받으면 그 후에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됩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어느 실업가가 있었습니다. 우연히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여기 저기 뜯어보고 있는데, 왠지 맘에 들었습니다. 똑똑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번 믿고 일을 맡겨볼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실업가가 그 청년을 불러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나는 자네가 무척 맘에 든다네. 내가 이제부터 자네에게 투자를 할 생각이야. 자네 한번 비즈니스 해 볼 생각 없나. 기억하게나. 나는 한번 밀어주면 끝까지 밀어준다네. 실패해도 괜찮아. 여러 번 실패하는 것도 괜찮아. 사람이 살다보면 적잖이 실패할 수도 있지. 실패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게나. 몇 번을 실패해도 전혀 책임을 묻지 않고, 자네가 성공할 때까지 밀어 줄테니 걱정하지 말고 한번 열심히 해 볼 생각 있나?

자! 이 말을 듣고 이 청년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 실패해도 된다니 나는 책임이 없어. 그러니 이제부터는 놀 거야, 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해보지 않을까요? 이게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아마도 밤을 낮처럼 새우면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나의 사업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는 새로운 일에 투자할 때마다 두려워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염려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신뢰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고 밀어주시는 분이 있기 때문에 내가 용기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합니다. 도무지 바뀔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는 후회하거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택하시면 끝까지 변개치 않으십니다. 예정론을 들으면서 다시 질문하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죄를 맘 놓고 지어도 되냐 하는 식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예정론을 논리적인 사고로 들어서는 안 되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신뢰하시고 그래서 그 신뢰로 말미암아 나를 밀어주시고 끌어주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실패를 묻지 않고 나가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를 결국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감격스런 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찬송 하나 합시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29절에 은사와 부르심이라는 두 단어가 나오는데, 은사는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언급이고, 부르심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그들을 향한 구원의 계획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로마서를 쓸 당시 유대인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가장 강력하게 핍박하는 세력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한번 부르셨기 때문에 변개치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28절에서 유대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이중성입니다.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지금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원수 된 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때부터 생각해 보면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택함을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엄청나게 받았던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가 바로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입니다. 한편으로는 복음에 대해 핍박자요 박해자로 서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랑하려니 핍박자요 원수 같은 이들을 사랑하기 힘들고, 내치자니 아직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저들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인간관계의 이중성’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우리가 갖는 모든 인간관계는 대부분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고, 멀리 하기에는 그럴 수 없는 관계가 서로 간에 얽혀 있습니다.

우리교회에는 대학원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는 성도님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조금씩 알 수 있었습니다. 박사가 되는 공부이니만큼 그 공부가 수월하다면 말이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어려워야 하고, 또 그렇게 힘들게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때로 깐깐한 지도교수를 만나면 이건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지도교수가 학생을 지도하는 방법이 좋은 학자를 만들기 위한 강한 요구를 넘어서 인간적 감정이 개입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면 정말 난감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대학원에서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어려운 공부를 지도해 준 교수는 평생 단 한 사람과 맺는 인간관계가 될 것입니다. 평생 유치원부터 만나는 수많은 스승들이 있겠지만, 그 어떤 스승보다 더 값지고 좋은 관계가 되어야 할 스승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려운 상황으로 몰려가면 학위를 받아도 인간관계에 상처가 남게 됩니다. 신뢰를 가지고 관계를 지속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내치자니 아직 학위 과정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좋아야 할 관계가 그렇지 못합니다.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할 관계가 깨어져서 원수처럼 지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보게 되는 모습입니다. 가까울수록 이런 아픔은 더 크고 아플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가 그럴 수 있습니다. 같이 살자니 매일 싸워야 하고, 갈라서자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가족관계가 그럴 수 있습니다.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한 교회 안의 성도 관계가 그럴 수 있습니다. 자주 만날수록 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그들도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만 사랑하시면 되는데, 그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만 되시면 되는데, 그의 편도 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딕 호잇(Dick Hoyt)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은 릭 호잇(Rick Hoyt)입니다. 아들 릭이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기는 바람에 뇌에 산소공급이 중단되면서 이 아이는 뇌성마비와 경련성 전신마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릭은 혼자 움직일 수도, 혼자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식물인간처럼 살아야 하는 릭을 국가기관에 맡기고 포기하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위한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릭이 12살 되던 때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아들을 위해 500만원을 들여 특수 컴퓨터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릭은 손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머리를 움직여서 모니터 화면 위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릭이 처음 쓴 글씨는 “Mother, Father"가 아니고, “Go Bruins!"였습니다. 당시 브루인즈는 그가 살고 있던 보스턴 지역의 하키 팀 이름이었습니다. 아들은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던 아버지는 그가 15살 되던 해 아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아빠! 저와 같이 8km 자선 달리기 대회에 나갈 수 있어요?”

지금까지 달리기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않았던 아버지는 아들을 휠체어에 태운 채 밀면서 달린 끝에 뒤에서 두 번째의 성적으로 완주를 해 냈습니다. 그 완주 후 아들은 이렇게 메시지를 썼습니다. “아빠, 달리니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몸의 장애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달리기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 지역의 대회에 출전을 하면서 꿈과 힘을 키워 온 아버지는 1981년 아들과 함께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나기보다 슬펐습니다.” “사람들은 같이 뛰고 있는 우리들을 부담스러워 했고,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으며 이상한 눈으로 바라 보고만 있었습니다.” 이들은 1년을 준비한 끝에 1982년 다시 보스턴 마리톤 대회에 참가하여 완주에 성공했습니다. 그 후 이들은 여러 번의 마라톤에 출전했고,마라톤 최고 기록은 2시간 40분 47초였습니다.

마라톤을 시작한 지 4년 뒤부터 아버지는 수영(3.9km), 싸이클(180.2Km), 마라톤(42.195Km)를 해야 하는 철인 3종 경기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달리기도 해 본 적이 없던 그는 마라톤을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수영을 배웠고, 싸이클을 타고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가장 힘든 스포츠 중 하나로 손 꼽히는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수영(3.9Km)을 할 땐 아들 릭을 고무보트에 태운 채 허리에 끈을 달고 바다를 헤엄 쳤고, 싸이클(180.2Km) 땐 아들이 위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수 의자에 태우고 용암지대를 달렸고, 마라톤(42.195Km) 땐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며 완주를 해 냈습니다. 마지막 테이프를 향해 달려 나가는 그들의 모습에 관중들은 오랜 기다림으로 지켜보다 모두 기립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16시간 14분,,,,

아들: “아버지는 나의 전부입니다. 아버지는 내 날개 아래를 받쳐 주는 바람입니다.”
아버지: "경기완주 테이프를 끊을 때마다 릭은 세상에서 가장 큰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이것은 릭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아들: “아버지가 없이는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아들이 없었다면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관계의 이중성은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때때로 우리가 정말 힘들어 간절히 기도하는 그 문제가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관계의 이중성을 넘어서게 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으신 징검다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릭이라는 아들을 자기 인생으로 그대로 끌어안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짐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딕(Dick)이 쉽게 그 결심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릭(Rick)을 그냥 버려두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너무도 뚜렷하게 그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는 핍박 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아마도 지도교수가 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가 자기 아내요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의 동업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나의 부모일 수도 있고, 나의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런 이중적인 인간관계를 우리에게 허락하실까요? 그것을 우리는 아버지 Dick과 아들 Rick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루어내는 정말 멋진 승리를 하나님은 기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도 동일하게 그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로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살도록 촉구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점검해야 합니다. 30-31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이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는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인생의 목적을 발견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고난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감격을 생각하면 모든 고난이 눈 녹듯이 다 사라집니다. 본문 표현대로 한다면 ‘유대인들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즉 그들의 핍박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이방인들이 얻은 그 복음의 감격을 유대인들도 누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인간관계에 놓여있는 자들에게도 내가 겪은 고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와 복음의 감격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고난을 그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보면 믿음을 훈련시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초 신앙자를 고난과 아픔의 장으로 몰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섬김과 사랑일 뿐입니다. 만약 고난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만약 아픔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섬김과 사랑, 그리고 우리가 받은 복음의 감격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의 이중성을 잘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는 언제나 베푸는 자이고, 상대방은 언제나 수혜자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입장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바로 그 고백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우리에게 이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으로 오늘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 없어서 고민할 때는 언제나 답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받아들이라는, 그리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도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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