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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이렇게 인사합시다. “누가(하나님께서) 오라고 해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오고 싶어서(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오셨습니까?” 누가 즉 하나님이 오라고 해서 왔다고 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있는 분들이시고, 또 스스로 왔다고 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책임으로 반응하시는 분들이십니다.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말씀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무슨 그릇을 만들든 그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인간에 대해 그렇게 하실 주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주권으로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로마서 10장은 인간의 책임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인간을 부르셨는데, 인간이 그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즉 내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무조건 그것을 들으시도록 하는 것이 믿음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마리아라는 처녀에게 와서 아기를 낳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아직은 처녀였던 마리아에게 그것은 놀라운 일이기도 하고,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계획이요 섭리이지만,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조금 억지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면도 있습니다. 논리적인 비약도 있습니다.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 자체가 자연의 이치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면서 수용합니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건을 자신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건을 나의 것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로서 마리아는 역사상 한 번밖에 없었던 유일한 하나님의 사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놀라운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교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나와 전혀 관계없이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오늘 나를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을 믿습니다. 그 순간 그것은 나의 사건이 되고, 나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설득으로 갖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를 자꾸 듣다보니 마치 세뇌되듯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인간의 지혜나 논리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있는 것과 믿음 없는 것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믿음 있는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 간에 별 차이를 보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믿음이 없는 사람과의 모습이 동일하거나 비슷합니다. 이것은 꼭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힘은 너무도 큰데,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성경은 오늘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해 잉태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어떻게 믿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그것을 상세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한동안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왔는데, 말씀을 듣고 복음을 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점진적인 사고의 변화가 아니라 마치 어느 순간 생명이 잉태되듯이 그렇게 우리 안에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현재 내가 믿음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위대한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들에게 먼저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자라게 하십니다. 처음에 그것은 아주 작은 씨앗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씨앗을 땅 속에 묻어놓으면 사람들은 그 안에 씨가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곳에서 줄기가 올라옵니다. 그리고 가지가 나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계획과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믿음이라고 하는 생명이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어렸을 때 꿈을 꾸었습니다. 그의 꿈은 그가 형제들과 부모님들 위에 서게 될 것이라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너무도 허무맹랑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고통과 시궁창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 밑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요셉이         남의 집 종으로, 그리고 급기야는 누명을 쓰고 감옥까지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에게 주신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꿈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꿈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를 어려움과 고난의 세월동안 지켜주었던 가장 큰 힘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가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 의해 점령당하고 망할 때 귀족의 자녀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으로 끌러가는 다니엘은 결코 자기 생애에 바벨론의 총리가 될 것을 꿈꾸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방 땅 바벨론의 이민 1세로서 총리가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 갖는 꿈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신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 꿈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믿음, 어떤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무슨 믿음을 주셨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아직 땅 속에 심은 씨앗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직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에게 과연 믿음이 있을까 의문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씨앗과 같아서 땅을 뚫고 땅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가지가 자라게 되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결국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길을 75세에 출발했습니다. 모세는 80세에 비로소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을 이 교회에 모이게 하시고,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이 믿음의 길을 걷는 기쁨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 믿음의 길이 때로는 험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믿음의 길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아픔의 길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꿈과 소망은 처음에는 크지만, 갈수록 작아지고 초라해집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의 길을 걷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과 소망은 처음에는 작지만 갈수록 커지고 분명해지며 확실해집니다. 이 길은 승리의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가 택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걷게 하시는 길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의 길을 걷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17절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믿음이 자라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을 때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 자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바로 갖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두 가지만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아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로마서가 쓰일 때까지 약 2000년 간이나 하나님을 알던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4절과 15절 상반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불평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려면 누군가를 보내주셔서 말씀을 전해 주셔야 들어보고 믿게 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굉장한 항의이며 반항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었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52장 7절의 말씀,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하는 말씀을 알지 못하느냐? 이미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면 참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메신저를 보내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제가 지금 여쭈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일마다 아니 날마다 나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믿음은 들음에도 난다고 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들음’이라는 말이 오늘날 같으면 읽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잘 못 본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인쇄술이 발달해서 성경책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듣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더 익숙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말씀을 듣지 못해서 못들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안식일마다 회당과 성전에 가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런 말씀은 들은 적이 없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 속에 나오는 문자로서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들음은 단지 마이크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목사의 목소리로서의 들음이 아닙니다. 성경책 속에 쓰여 있는 문자를 통해 그리고 설교자의 음성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아픔 가슴을 싸매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인생에 높은 삶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으로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소망의 말씀, 용기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까지 나와서 그 말씀을 듣지 못하고 가면 우리의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귀머거리나 다름없습니다. 그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본문의 유대인들과 동일한 영적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순종을 통해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삶의 우선순위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너무나 많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에 깊이 귀를 기울일 시간과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결국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을 갖게 되지 못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순종해 보십시오. 기도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말씀을 읽는 일, 헌금하는 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 등등에서 진실로 순종의 삶을 시도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런 삶의 순종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놀라운 계획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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