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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초대교회가 한참 번성해갈 때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당시 매우 총망 받는 유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이라는 학자에게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가말리엘이라는 랍비는 힐렐이라는 랍비의 손자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힐렐 학파라는 것이 있을 정도로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그의 손자 가말리엘은 랍비보다도 더 높은 칭호였던 라반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의 교훈은 당시 율법 해설서인 ‘미쉬나’에도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말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가말리엘 밑에서 교육을 받은 청년 사울은 당시 부인할 수 없는 진골 유대인이었고, 율법에 정통한 자라는 뜻입니다. 반듯하고 정통한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회의 엘리트였습니다. 자기의 삶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자기 사명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유대 사회를 율법의 틀 위에 견고하게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민족이 모세로부터 받은 율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민족은 수없이 짓밟히고 고난을 당했지만, 그들에게 율법은 그들을 지탱해 주는 힘이었고,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무시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라는 청년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사울은 이런 소문을 들으면서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를 좀먹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때부터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를 오염시키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했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없애버릴 계획이었습니다.

어느 날 다메섹이라는 도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던 도중 길 위에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사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갑자기 천지가 뒤바뀌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동안 철저하게 믿던 자기 인생철학과 가치관, 삶의 목적, 이 모든 것들이 한 순간 철저하게 허물어져 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자기 전 인생을 바쳐서 열심히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지금 내가 가고 있던 길이 잘못된 사인을 보고 달려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열심히 달려왔다는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열심히 달려왔다면 달려온 만큼 잘못 온 것입니다. 그것은 자랑도 아니며, 영광도 아닙니다. 온 만큼 되돌아가야 하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한 번쯤은 자기 인생의 방향이 잘못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것을 깨닫는 시점은 대부분 죽기 직전입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 이르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자존심도 필요 없고, 물질도 필요 없습니다. 좋은 집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좋은 자동차가 무슨 영광이 되겠습니까?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자신을 가장 정직하게 보게 됩니다.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지금 그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문화와 유대교라는 종교에 철저히 헌신하여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자신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확신과 신념, 종교는 허상이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철저하게 배우고 지키며 가르치던 율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 민족 유대인들을 보니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율법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열심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확신과 신념으로 살아가지만, 거기에 생명은 없었습니다. 인생의 끝까지 살아간 후에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3절 말씀을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이고, 자기의 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자기의 의는 자기가 세우는 의입니다. 자기의 행위와 수고를 통해 이루어 가는 의(성취)입니다. 율법은 대표적인 자기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는 그런 의도로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자기의 의를 이루어 가려고 부단히 애썼습니다.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법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통해 광야에서와 광야와 같은 고된 삶의 현장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자신의 신앙의 수준을 측정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그것이 마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자격을 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시켜주셔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교만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영적 존재인 인간에게 기도는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를 통해 내적 치유를 받고, 관계가 회복되고, 때때로 받는 스트레스도 이기게 하십니다. 성도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요 특권입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기도가 자신의 신앙의 수준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정말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랑이요 계급과 같이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 학기마다 오고 가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 정착지원부를 두어 오시는 분들을 정착을 돕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곳으로 오시기 전부터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집을 구하는 것부터 오셔서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먼저 오신 분들이 뒤에 오시는 분들을 돕는 좋은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공항 라이드를 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가능한 샬로츠빌 공항으로 오시도록 권면하고, 부득이 워싱턴공항으로 오시게 되면 택시나 렌트카를 이용해서 오시도록 권면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한 사람이 하루를 온전히 다 비워서 봉사하는 것이 다소 무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워싱턴 공항까지 우리 성도님들이 몇 번 갔습니다. 저도 그 중 한번을 갔었는데, 제가 라이드 한 분은 예수도 잘 믿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두 주 나온 후에 다른 교회로 가야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고 여쭈어보니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가 별로 없는 교단이었는데, 이곳에 같은 교단교회가 없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같은 교단의 교회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이번 주에 교회 한 번 와서 교우들에게 인사만 하고 가시라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님 오시기 전부터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모이면 이름을 불러가며 언제 오냐고, 어떻게 오냐고, 어디로 오냐고 서로 이야기했는데, 섭섭하니까 한 번 와서 인사하고 가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점잖게 했지만, 마음은 몹시 서운했습니다. 그래도 목사가 라이드를 했는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봅시다. 만약 그 분이 우리 교회 나오는 것을 조건으로 제가 라이드를 했다면 그것을 봉사나 혹은 섬김이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마음으로 섬겼다면 그것은 섬김이 아니라 흥정이고 거래였을 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기 때문에 당신은 나에게 이러한 응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논리는 섬김도 아니고 봉사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도 여러 분의 성도님들이 수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메일을 그 분들에게 보냈습니다. 저는 이렇게 돕는 손길이 참 아름답고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 분들이 우리의 도움을 받고 교회를 지속적으로 출석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들의 수고가 헛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우리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력을 부정적으로 받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이런 일들을 통해 그 분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정말 간절합니다. 이 일을 앞장서서 하시는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너무나 많고, 또 상대적으로 수고하고 난 후의 결과(?)에 마음 허탈하실까 조금 염려되었습니다. 정착지원부의 사역을 위해 수고하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리며서,,,


6-7절은 이런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하늘을 두루 다닐 필요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부활시키려고 죽은 자들에게로 갈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모든 은혜와 구원의 길은 이미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어떤 새로운 일들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기 위해 어떤 업적이나 공적을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기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우리가 끌어오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도님 개인의 기도보다 좀 더 기도하는 목사의 기도가 더 능력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고의 깊은 저변을 생각해보면 그 안에는 목사가 마치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해서 목사의 (기도의) 능력으로 하늘 저편 멀리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삶의 길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영혼은 맑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낙관을 이기고 새로운 능력을 주시는 통로입니다. 우리 자신이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친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삶의 답답한 문제로 고민할 때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기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은 나의 노력이나 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회 안과 밖에서 하는 봉사와 섬김은 어떤 공로를 쌓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주신 은혜와 복으로 인한 감사의 응답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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