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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방을 하면서 성도님들과 오랜 시간 대화를 하다가 마치게 되면 대부분 성도님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목사님은 성도님들의 문제를 들어주시려면 참 힘드시겠어요’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저는 꼭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성도님들에게 문제가 있어야 제가 목회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산다는 것 자체가 곧 문제 가운에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목사에게 가지고 올 정도가 돼야 목사와 성도님 간의 관계가 제대로 형성됩니다. 목사에게 문제를 가지고 올 수 없다면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목사는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목사도 동일한 문제 가운데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공감도 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고, 때로는 상담가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성도님들은 목사의 눈에 죄인처럼 보여야 목회할 수 있습니다. 즉 성도님들의 문제가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지금 무슨 문제로 인해 고민하는지 모르면 바르게 목회할 수 없습니다. 늘 허공을 치는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나 삶의 문제로 부딪히고 고민하고 아파합니다.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생각 없이 ‘멍’하게 사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뭔가 바르게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를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좀 잘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고민도 많고 장애물도 만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고민하고 방황하는 인간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력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이러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님들께서 목사를 찾아와서 삶의 문제를 함께 나누는 것은 목사 개인을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삶의 문제를 내어 놓기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가장 잘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 앞에 나아가면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가장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부족함 사이에 부조화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불평합니다. ‘당신이 나를 창조하셨다면 좀 제대로 만드시지, 왜 이렇게 만드셨나’고 말합니다. 키가 좀 더 크게 하시든지, 혹은 머리 좀 더 좋게 만드시든지,혹은 얼굴 좀 더 예쁘게 만들어 주시지, 혹은 좀 더 건강하게 만들어 주시지 라고 말합니다.

좀 더 나아가서 자기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왜 나만 이렇게 고난을 당하게 하냐고 불평합니다. 어떤 형제가 1년 전쯤 교회를 나왔습니다. 몸이 몹시도 아프다는 것입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사람들을 불공평하게 만들 수 없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형제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있지 않냐고, 형제가 그런 어려움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없는 것을 형제가 가지고 있지 않겠냐고, 형제가 UVA까지 와서 공부한다면 그것으로도 얼마나 큰 복이 되겠냐고, 하지만 그 형제는 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원망하며 사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환경을 탓하고, 부모를 원망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고,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본문 19절이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는데, 우리가 더 이상 어떻게 살 수 있냐는 것입니다. 나는 본래부터 허약한 체질로 태어나서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늘 불리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물질적인 후원을 받지 못해서 더 나은 인생을 준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을 탓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을 탓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상처와 아픔에 대한 보상을 어디서도 받을 수 없다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이 말씀은 거의 싸울 태세로 하는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가상의 독자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독자들이란 하나님을 향해 매우 오만하게 대드는 사람들입니다.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하나님에게 따지는 사람들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퉁명스럽게 대꾸합니다.

그러면서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예레미야 18장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분위기에서 이 말씀은 상당히 험한 분위기를 갖는 말씀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하나는 귀한 그릇을 만들고, 또 다른 하나로는 천히 쓸 것을 만들었다면 그게 무슨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에게는 마땅히 그런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자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간을 어떤 자는 건강이 안 좋게 만들고, 또 어떤 사람은 머리가 나쁘게 만들고, 또 어떤 사람은 성격이 괴팍하게 만들 수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비교는 못됩니다. 왜냐하면 진흙은 대구도 하지 못하고, 질문도 하지 못합니다. 진흙은 생각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괴로워하지도 않고, 고민도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민하고 아파합니다. 괴로워하고 슬퍼합니다. 만약 인간에게 말할 권리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폭군이지 아버지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진흙과 같이 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오늘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클레이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이 말을 하기 원했던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했다고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왜 이런 험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보는 법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해석할 때, 우리는 먼저 성경이 쓰여 진 당시의 상황에서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AD 57년 고린도에서 로마로 가는 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구원에 대한 교리를 말씀하던 중에 유대인들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원받은 자로 생각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을 구원하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바울은 유대인들이 유대인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금까지 왔다고 해서 그들이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언제나 제한적입니다.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다 언약의 백성이 아니라 이삭의 후손만 언약의 백성이 되고, 이삭의 후손이라고 다 약속의 후손이 아니라 야곱의 후손만 그 복을 누리게 되듯이, 오늘도 역시 동일하게 유대인이라고 다 선민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로마서가 쓰여 질 상황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결정하신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베푸시고 영광스럽게 만드셔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한다고 한들 너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성경을 볼 때 두 가지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 당시 상황에서 보아야 하고, 두 번째는 오늘 나의 상황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 말은 성경은 너무 멀리서 보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느냐 라고 질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 성경에 없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런 질문에도 충분한 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대한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접근은 신학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삶의 문제를 가지고 답을 찾을 때는 신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무슨 말씀을 주시는지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지는 이런 비유가 적절합니다. 나의 부모가 나를 낳으셨습니다. 나를 키워주셨으니 그가 나의 부모님인줄 압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게 될 때  우리는 보통 그 분들이 나의 부모님인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 그 분들이 나의 부모님이신 것을 확인하고서야 부모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는지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서 증명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더 분명한 확증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놀라운 소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약한 존재들입니다. 건강이 약하든가, 지혜가 부족하든가, 인간관계에 문제가 많든가, 아무튼 우리는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삶의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문제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문제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허물들과 부끄러운 모습들이 많이 있지만, 그런 것들을 가려 주시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아름답게 사는지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십니다.

호세아라는 선지자의 글에 보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는 가서 고멜이라는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서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십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멜이라는 음란한 여자를 찾아갑니다. 겨우 어디 구석진 곳에 가서 고멜을 데려와서 아내로 삼습니다. 그런데 얼마 살다보면 고멜은 선지자와 생활하는 것이 너무 답답해서 집을 뛰쳐나갑니다. 그러면 호세아는 다시 물어물어 찾아가서 고멜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또 같이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이 아기가 도대체 누구의 아기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그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뜻은 ‘이는 내 백성이 아니라’라는 뜻입니다. 내 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함께 사는 아내 고멜을 통해 나은 아이지만, 이 아이는 호세아가 낳은 아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아이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그 아이의 이름을 고쳐주십니다. 이제는 ‘로암미’가 아니라, ‘암미’라고 고쳐주십니다. 그 의미는 ‘이는 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본래는 그 아이가 내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 백성이 되었습니다. 아니 내 백성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동등한 특권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본문 25-26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자격이 없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의 말씀처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즉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은혜 받을 자리요, 축복의 자리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삶의 불행이 과거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과거를 원망합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하고, 남편/아내를 원망합니다. 우리의 삶은 과거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한 그 곳에서, 바로 우리가 불행하고 아프고 괴로워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고 은총으로 함께 하십니다. 이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27-29절의 말씀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인용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는 다 죽을 존재이지만,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남은 자/그루터기/씨)를 살려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법대로 한다면 우리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다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살았으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늘까지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재앙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는 홍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중동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전쟁 중에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계속되는 내전과 기근과 기아로 수많은 인명이 죽거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들 중에 한 사람처럼 오늘이라도 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있음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고요. 왜 어떤 나라에 사는 사람은 날마다 죽어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더 훌륭하게 사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 사냐고요. 어떤 사람은 전쟁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살아있는지 잘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라고 그들보다 살 자격이 더 있어서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아픔과 고통에 대한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가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살아있음으로 인해 삶의 빚진 자임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자기 잘못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은혜로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의 빚을 진 자들이고, 또한 이미 죽거나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빚진 자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신 하나님, 자격 없는 자를 자격 있게 하신 하나님, 본래부터 부족하고 흠이 많으며, 성격도 괴팍하고, 날마다 고민과 방황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재난과 고통으로 죽음을 당하고 고난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고통의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의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왜 그런 은혜를 누릴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를 발견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은혜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그럴만한 조건이나 자격이 안되는데 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은혜가 너무나 놀랍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위를 돌아보니 어떤 사람들은 이유 없이 고통과 죽음을 당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아픔의 현장을 찾아갑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아픔을 감싸주려고 내 몸을 바칩니다. 나의 의로 말미암아 얻은 생명이 아니기에 내가 거저 받은 은혜로 이렇게 사는 것을 고백하면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뛰쳐나가서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살아갑니다. 마치 빚진 자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깁니다. 대가를 요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30절의 말씀대로 ‘의를 좆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것은 믿음으로 얻은 의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생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살면 불평할 것도 없고, 원망할 일도 없습니다. 그저 오늘 사는 것 자체가 은혜요 축복입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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