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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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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교회의 성도가 늘어가면서 봉사의 일손이 더 필요한 상황이 되어갑니다. 그런 일들을 잘 감당해오는 임원들과 회원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여전도회 회장님은 비즈니스 일로 팔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지난밤에도 늦게 NOVA에 올라가서 치료를 받고 새벽에 내려와서 오늘 다시 나와 예배를 드리고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여전도회 임원들을 특별히 축복하길 원합니다. 여전도회 임원들을 일어나시고, 축복송으로 함께 축복합니다.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너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 된 백성
너의 영혼 우리 볼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너의 영혼 통해 큰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지난 몇 주 동안 여전도회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주일 친교를 준비하는 일이 너무 힘에 버거워서 얼마간 쉬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의견들이 있음을 저에게 말씀하셨을 때 목사로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친 교를 꼭 해야 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그대로 쉬라고 하기에는 ‘대학부’ 학생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여전도회 회원들이 함께 기도하면서 힘들긴 하지만 조금씩 더 수고하자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정말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믿었던 것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주십니다. 그 말은 실패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승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교회와 인생의 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너무나 놀라운 약속입니다. 이 시간 서로 인사합니다. “성도님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이 사랑은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8장 35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리고 이어서 3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리고 다시 39절 말씀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마음에 한 가지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장기 전도여행을 무려 세 번이나 했습니다. 그는 가는 도시마다 먼저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바울은 번번이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한 번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베뢰아로 내려와서 복음을 전하는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그곳까지 내려와서 바울을 핍박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 던짐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들이 복음에 대해 너무 강퍅한 반응을 보이자 바울도 스스로를 이방인의 사도라고 언급하고 이후로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갈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그럴 만큼 바울은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혹독하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처음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전해질 때는 하루에 삼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오기도 했지만, 얼마 안 있어 예루살렘은 큰 핍박이 왔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많이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유대인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고집과 아집으로 주님을 믿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가 AD 30년경이었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때가 AD 57년경이었습니다. 그리고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 장군은 시리아 군과 연합한 군대 8만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아이 밴 자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땅에 메어쳐 죽이는 잔인한 학살이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려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성지 예루살렘은 그 때부터 이방인에게 짓밟히게 된 것이다. 이 전쟁으로 110만 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을 지키고자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모였을 때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런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3-44절의 말씀입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 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누가복음 23장 28-30절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누가23:28 - 30)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태 23:38).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원수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민족적으로는 영적 암흑기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다 썩어가고 있었으며, 영적으로 황폐화되어 시대의 등불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복음이 이방인을 향해 나아간다고 선포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시 언급합니다.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는 유대인의 구원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황폐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비전이 없습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민족의 앞날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것을 바울은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시면서 사역하실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말씀도 기억납니다. 과연 무엇으로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런 중에도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1-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것이 바로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자기 동족을 향한 바울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핍박하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던 그 동족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바울입니다. 영혼 구원은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애타는 마음, 불타는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 사랑이 없는 복음 전파, 사랑 없는 교회의 성장은 모두 허물어질 수밖에 없고, 또 허물어져야만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영혼에 대한 사랑보다 교회 교세의 확장에 대한 꿈을 먼저 꿉니다. 사도 바울 당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 교회가 잘못된 동기(목적) 위에 세워짐으로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멋진 건물과 넓은 주차장으로 그 위세를 당당하게 자랑하는 교회들 뒤에 영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는지를 두려움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다른 교회를 비판하기 위함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보기 위해 나누는 말씀입니다. 우리교회도 교회 건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site plan을 승인받는 중에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지만, 모든 일들이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때때로 주보에 교회건축에 지연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제목을 내 놓는 것은 앞으로 지연되지 않기를 구하는 기도이지, 이미 지체된 상황을 놓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교회의 건축은 지금까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교회 건축에 대한 일들을 너무나도 선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모든 일들이 우리의 염려보다도 앞서 한 걸음씩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정말 아름답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제 안에는 두려움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교회가 과연 교회건물의 웅장함을 그리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쉽게 대답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는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는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는 교회는 친목단체일 수는 있어도 교회는 아닙니다. 아무리 멋있는 교회의 이름과, 수많은 교인들이 몰려들고, 멋지고 웅장한 예배당이 있다고 해도, 그 안에 영혼에 대한 타오르는 사랑과 열정이 없다면 이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자기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동족을 향한 사랑에 까지 이르러야 함을 사도 바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받은 대로 주고, 당한 대로 갚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모이 모임이 어떻게 교회일 수 있습니까? 바울의 고통은 사랑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그가 겪는 큰 근심은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인한 근심입니다. 동족을 사랑함으로 가슴 아리를 하는 바울의 그치지 않는 고통이 오늘 우리의 고통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영혼을 사랑하는 가슴 아리를 하고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민족을 그토록 가슴 아리를 하면서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6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이해하기에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땅과 후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마엘이고, 다른 하나는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들을 낳기 위한 수단으로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입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 없는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물론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도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본래 약속하신 그 복을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삭의 자손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삭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야곱입니다. 이 둘은 쌍둥이지만,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입니다. 그러므로 에서가 장자권을 이어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복은 야곱에게 갑니다. 그 이유는 두 아들이 태중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것을 뭐라 상관할 수 없습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사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모두 그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복은 언제나 제한적입니다. 성경적인 용어로는 ‘남은 자’만 받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역사는 그래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이 언약사상을 뒤집어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완전히 황폐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황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포기하신 백성입니다.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히 깨어져 버렸고, 폐하여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6절에서 이렇게 오히려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다르게 번역한 성경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황폐한 것같이 보이고, 그래서 얼마 안 있으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게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에도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고, 이삭의 자손들 중에도 하나님의 복을 유업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게 이스라엘 민족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제한적이라는 말은 멸망당할 사람도 제한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유대백성들을 보면서도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지속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사건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떠난 것 같지만,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그러한 확신이 바울로 하여금 자기 민족을 그토록 간절히 사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영적 사랑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가장 큰 소망을 가진 바울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상황만 보고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현재의 상황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달려드는 동족들을 보면서도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것이 바로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하게 바울이 가진 믿음의 눈을 가지길 원합니다. 바울의 믿음을 소유하기 원합니다. 바울의 놀라운 믿음의 고백에 근거하서 오늘날 모든 신학자들과 교회는 이스라엘이 다시 믿음으로 돌아올 것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많은 선교사들을 이스라엘로 보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의 고백이 이렇게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모든 일들이 다 어려워지고 있고, 하나님의 역사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계속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서, 우리 가정을 보면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수고와 땀을 흘리며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저 높은 창공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꿈꾸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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