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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권 성경 전체에서 가장 사랑받던 성경을 꼽으라면 단연 로마서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사랑했고, 로마서를 통해 변화되었으며, 로마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로마서 중에서 가장 정상에 해당하는 장을 말하라면 그 장은 바로 8장입니다. 로마서 8장은 로마서 전체 중에 가장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치 성경이 다이아몬드 반지라면 로마서는 다이아와 같고, 로마서 8장은 다이아 끝(가장 중요한 부분)과 같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을 세 번에 나누어 설교할 예정인데, 빠지지 말고 함께 귀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그리고 설교하는 목사를 위해서도 말씀을 잘 준비해서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2절을 함께 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2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하나님의 법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섭리이고, 긍휼입니다. 반면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그리고 율법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지만, 율법은 우리를 죄인이라 판결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결국 우리에게 대해 죄와 사망을 가져오는 법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율법과 죄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지만,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잘 이해하기 힘든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받던 로마라는 도시는 본래 법이 발달한 도시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상당히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법이나 죄라는 개념보다는 ‘정’과 ‘의리’ 같은 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던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향과 기질을 우리는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우리의 형편에 맞춰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죄와 사망의 법은 ‘운명론’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분들은 사주팔자나 관상, 좀 더 고상한 것으로는 역학 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주는 태어난 연월일시를 말하고, 팔자는 사주의 간지(干支)가 되는 여덟 글자 즉 生年 生月 生日 生時를 말합니다. 즉 생년월일시를 알면 그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태어나는 그 순간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관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 집에 시주하러 온 스님이 그 집의 큰 아들을 보고는 양 눈썹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면서 돈은 많이 모을 상인데, 형제간 우애는 좀 없을 것 같다고 했답니다. 그의 어머님이 가끔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좀 걱정이 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돈을 별로 많지 않고, 형제간 우애는 큰 아들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동생들, 누님들 잘 챙기시고, 정말 우애 있게 지내십니다.

요즘은 ‘역학’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역학은 미신이 아니라 ‘통계학’이라고 말합니다. 통계학이라는 말은 상당히 근거가 있음을 실증적으로 증명됐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잘 생각해 보면, 그것도 운명론입니다. 나의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운명을 보고 그것이 길하면 좋은 일이고, 만약 나의 운명이 흉하면 피해 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 운명에 순응하고 잘 맞춰 살자는 것입니다. 운명은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운명을 피해가기 위해 부적이나 다른 주술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을 운명론으로 본다는 것은 인간을 기계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의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길을 따라 산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동차와 같은 원리입니다. 어떤 회사에서 만든 자동차는 매우 견고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져서 20년 가까이 타고, 20만 마일을 달릴 정도로 좋은 차로 출고되는가 하면 어떤 회사의 차는 10만 마일만 넘어도 고장이 잦고 문제가 많이 생기는 차도 있습니다. 즉 이미 운명을 타고 나는 것입니다. 인간도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위대한 일을 하도록 태어났고,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도부터 소시민으로 살도록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개척해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나의 운명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운명론이고, 우리의 사고 저변에 깊게 깔려있는 생각들입니다.

요즘 월드컵이 한참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16강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쉽게 선수들이 돌아왔지만, 16강이 다 결정되고, 지금은 8강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펠레의 저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펠레는 브라질를 세 번이나 월드컵에서 우승시킨 훌륭한 축구선수였습니다. 펠레의 저주라는 말은 펠레가 잘 할 것이라고 예측한 나라나 선수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통계학입니다. 통계적으로 그가 한 말은 모두 반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나라의 월드컵을 이렇게 예상했습니다. “한국은 예선을 통과할 자격이 있고 프랑스와 한국이 16강에 나란히 진출할 것 같다.” 신기하게 반대로 한국은 16강에서 탈락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펠레의 저주의 사슬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펠레 자신은 ‘펠레의 저주’라는 신드롬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맞는 것은 말 안하고 틀린 것만 말한다고’

인류의 대 예언가로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16C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일만 있으면 그의 이름이 올라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스페인이 이길 것이라고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2006년 6번째 달 끝에 스페인의 왕이 군대를 끌고 피레네산맥을 넘을 것이다. 악마의 군대는 중앙 유럽의 벌판에서 전쟁을 기다리고 있다. 파괴와 패배가 악마 추종세력에게 떨어질 것이다. 성스러운 성배는 승리를 거둔 왕에 의해 스페인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내용대로 라면 중앙 유럽의 벌판은 바로 독일이고 전쟁은 월드컵 대회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스러운 성배는 바로 월드컵 우승트로피인 FIFA컵이라는 것입니다. 스페인이 이미 16강에 올라갔으니 그의 말대로 정말 우승을 할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설령 그 예언이 맞는다고 해도 그것은 운명론일 뿐입니다. 노력한 것도 아니고, 수고로 얻은 것도 아니고, 단지 운명으로 받을 것뿐입니다. 스페인의 축구역사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손 안에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을 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시계 공장 기술자가 시계를 만들어서 한 번 맞춰놓으면 고장 나지 않는 이상 그대로 흘러가는 것같이 가는 시계의 운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언제나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십니다. 운명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잘 봅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전에 우리의 인생은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여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전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의 운명을 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를 절망하게 했고, 낙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우리를 해방했습니다. 그것을 3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가 져야 할 운명의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어떻게 끊으셨나요? 그것은 놀랍게도 우리의 운명의 짐을 대신 지심으로 끊으셨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죽음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5장 12절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6장 23절에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의 사슬에 매이지 않고, 더 이상 죄에 얽매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여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을 좇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영(성령)을 좇는 길입니다. 5-6절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자의 종말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매일 내 운명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만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열심히 산다고 해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운명론적인 사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작은 어려움만 있어도 ‘그러면 그렇지’ ‘그게 나 팔자지’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7-8절에 육신의 생각을 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 특징에 대해 말씀합니다. 첫째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다르게 정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개입하셔서 우리의 운명을 바꾸시고 새롭게 하시는 그 역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은 단순히 약한 믿음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운명론을 믿는 사람입니다. 운명론을 믿는 사람은 이미 정해진 자기의 운명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점을 치고, 미아리 고개를 넘나듭니다. 점쟁이에게 돈 두둑이 주고 좋은 이야기 듣고 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만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운명을 주관하신다는 진리를 인정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헤치고 나올 수 없는 절망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런 절망의 늪을 능히 건너갈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의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도해도 참된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의 믿음의 행위는 모두 헛된 것일 뿐입니다.


운명론적인 삶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과는 만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평안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로하시며,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기도 하십니다. 성령의 또 다른 이름은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counselor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상담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격려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음 주에 더 자세히 나누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자’가 됩니다.(10절) 우리의 몸이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말은 운명론적인 삶의 그림자가 여전히 우리를 드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약했습니다. 우리가 본래 실망도 잘하고 낙심도 잘 하는 기질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받은 스트레스를 주로 술로 풀던 사람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전히 술 생각이 납니다. 조금 안 되는 것 같으면 온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 일어설 기력을 잃어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운명론적인 사고가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이 죄로 인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영은 의를 인하여 살아납니다. 성령의 은혜와 도우시는 능력으로 새롭게 일어설 수 있게 하십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넘어지지만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팔과 다리에 영적인 근육이 붙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영적 허벅지가 축구선수들처럼 굵어지기 시작합니다. 넘어져서 쉽게 일어납니다. 축구경기 전후반 90분을 뛰어도 지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우리의 몸도 결국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11절 하반절입니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결국 우리의 몸도 살아납니다. 본래적인 의미에서 이 말씀은 우리의 육체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후에 주님 오실 때 우리가 부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우리의 영혼만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지만 오늘 말씀의 의미는 죽은 후의 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운명이 새롭게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해진 운명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6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비록 세상적으로 약한 존재라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어부를 불러서 위대한 주님의 사도로 세우신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연약한 우리를 들어서 주님의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는 역사입니다. 이런 소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냐! 저건 단지 목사의 말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육신의 생각을 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결국 사망입니다. 사망이란 결국 그렇게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모든 것을 가장 확실하게 확증해 주는 세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바란 아버지의 애칭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가깝게 다가오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신뢰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두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성령께서 증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진짜 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친히 증거해 주십니다. 몇 가지 경우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증거는 우리 자신에 대해 증거 해 줍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증거 해 주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하고 말입니다.

세 번째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입니다. 17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를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영광을 함께 누릴 하나님의 후사가 됩니다. 그것은 정말로 엄청난 은혜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우리는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사람들인데, 그 영광을 누리려고 한다면 이 땅에서 고난 좀 받을 수 없겠는가? 라고 말합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난 받는 것에 대해 문제 없습니다. 성도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광을 바라보는 자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 좀 받는 것은 오히려 그 영광을 더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기뻐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운명론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의지합니다. 운명을 바꾸시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도 우리의 운명을 거스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난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태풍이 불면 독수리는 태풍을 피하기 위해 집을 버리고 태풍을 뚫고 태풍 위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곳은 평소 독수리가 날아다니는 고도보다 훨씬 더 높은 곳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태풍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그런데 태풍을 뚫고 올라갈 때 태풍이 독수리의 날개 짓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수리의 날개에 힘을 주어서 더 높은 창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한답니다. 태풍이 없으면 제아무리 잘 나는 독수리라도 그렇게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답니다. 그런데 태풍이 독수리를 그렇게 높이 날개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는 환난은 우리를 더 높이 날게 합니다. 이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두려워맙시다. 움츠러들지 맙시다. 고난을 당당히 받아들입니다. 그러고 힘들면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읍시다. 주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힘을 얻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승리하는 길은 오직 이 한 길밖에 없습니다. 이 길로 달려가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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