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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만 전 알 카에다의 이인자로 알려진 알 자르카위가 미국의 공습으로 죽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는 무슬림에 의한 국제 무장 세력 네크워크입니다. 소위 이슬람 원리주의 자들인 이들은 반미, 반유대를 표방하는 세력입니다. 1990년대 이래 주로 미국을 표적으로 하는 테러행위를 자행했습니다. 이들은 2004년 김선일 씨를 살해하는데도 직간접으로 연관이 되어 있었고, 지난 2002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있었던 월드컵에서도 테러공격을 계획했었는데, 두 나라에는 이스람 교도가 적고 협력자를 구하기 어려워 계획이 백지화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알 자르카위가 죽음으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 결국 테러 공격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하지만, 벌써부터 알 자르카위의 후계자 알 무하지르는 후계자로 지명된 지 하루만에 미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그것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선포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그들의 마음 안에 있는 분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수 없이 죽이면서도 애통하거나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잘못이나 미성숙함, 혹은 죄에 대한 인식이나 자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일들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세시대 기독교는 이슬람이 점령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정작 처음의 목적과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비기독교적인 행태만 자행하고, 역사 속에 쓴 기억으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잘못보다는 명분과 실리를 위해 자신을 방어하고 정당화하기에 바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그런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였던 유대교를 위해 사람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나 그 일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치 그런 일을 위해 이 땅에 부름 받고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것만이 그의 삶의 이유였고, 목적이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그것은 마땅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죽는 자들은 그 앞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떳떳했고,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분노에 차서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그 청년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삶이 변화되었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어 갔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지식의 발견이 아닙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의 최고의 엘리트로서, 이미 많은 것을 배우고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많은 변화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에 대한 이해의 변화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마치 범죄자를 다루듯 하던 그가 죄로 인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민감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더 깊게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늘 당당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을 떳떳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기쯤 되니까 이런 일도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오면 그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악으로 인해 고민합니다. 19절에서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더 많은 죄를 발견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더 깊은 죄의 실체를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주님을 위해 자기 생명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왠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안에서 튀어나오는 악의 소욕을 또한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오랜 세월 그렇게 주님을 따르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백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랫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이 말씀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앙의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왜 이런 고백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의 상태를 고백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본문의 위치와 문맥이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바로 이 시점에서의 고백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서 있는 신앙의 자리를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그가 바로 빛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빛이십니다. 주님 앞에 서는 자는 자신을 다 드러내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9-2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악을 행하는 자는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하여 빛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나아옵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사도 바울은 바로 빛 앞에 서 있는 자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전의 그는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악을 행하면서도 그 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주님의 빛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앞에 자신의 허물을 여지없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믿기 전보다 더 많은 자기 죄를 발견합니다.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끊임없이 발견합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인간적이고 육적인 정욕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21절의 고백처럼,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느끼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선 자의 모습입니다.

참 신기하게도 그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는 죄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행하는 것을 죄라고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죄는 곧 그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는 죄 안에 있었고, 죄 가운데 있었음으로 그가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면서 그는 자신이 죄의 세력에 의해 그동안 끌려 다녔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8절의 고백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그는 드디어 죄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빛 앞에 섰을 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밤에 다니면 옷이 좀 더러워도 괜찮습니다. 얼굴에 뭐가 묻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밝은 곳에 갈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옷도 단정해야 하고, 얼굴도 깔끔해야 합니다. 선을 볼 때도 절대 밤에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자동차를 살 때도 밤에 다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흠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의 단점과 흠을 잘 보지만, 자신의 허물은 잘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의 중심에는 다 나 자신이 서 있습니다. 내 눈으로 내 관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판단의 기준은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빛이 나를 비추면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나 중심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에서 나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고민이 시작됩니다. 내가 보던 것이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내가 제일 고생하는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내가 제일 바르게 사고한다고 여겼는데, 빛 앞에 서고 나니 나의 생각도 많이 왜곡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고민하게 됩니다.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 내 인생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나를 무슨 목적으로 만드셨는가?

하나님을 알기 전의 고민이 우리 중심적인 고민이었다면 하나님을 알고 난 다음의 고민은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믿기 전의 고민이 성공을 위한 고민이고, 부자가 되기 위한 고민이고,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고민이었다면, 믿음을 가진 후의 고민은 자신의 중심의 이동으로 인해 오는 새로운 시야로 인해 생기는 고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민은 더 거룩해지기 위한 고민이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좀 더 닮아가기 위한 고민이어야 하며,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중심에서 볼 때는 모든 것이 옳았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떠나 나를 바라볼 때 내 뒷모습은 매우 추했음을 보게 됩니다. 내가 남겨놓은 언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겨 놓았습니다. 내가 받은 상처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뿌려놓은 상처가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고 나니 사도 바울이 절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24절에서 이렇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놀랍게도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스랍들(천사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이사야는 놀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우리가 생각해보면 이사야가 얼마나 위대한 경험을 했습니까? 다음 주 주일예배 시 설교를 하면서 내가 며칠 전 기도하는데 하나님을 보았노라고, 그 하나님의 모습이 얼마나 휘황찬란한지,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었노라고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이사야 선지자를 존경하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앞에서 한없는 자신의 추함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메리카의 인디안을 위한 선교사였던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1740년 10월 18일자 일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의 아침기도 시간에 나는 나의 영혼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내 속에 있는 사악함과 타락함을 목격하고 나는 깊이 울었다.” 그는 선교사였습니다. 주님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뭐가 그렇게 사악했고 타락함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날 아침 주님의 광채 나는 빛 앞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영혼의 옷에 묻은 작은 먼지조차도 보면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더 위대한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옷을 입으면 그것이 조금 더럽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낮에 더러운 옷을 입으면 눈에 잘 띱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영적인 일도 동일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수록 우리는 우리의 흠과 허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앞에서 우리 자신의 더러움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 선 자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들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세리는 감히 그 옆에 서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이 두 그룹의 사람들 중에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의 모습입니까? 바리새인들은 날마다 다른 사람들의 삶만을 드려다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 선 자는 그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남의 잘못을 볼 새가 없습니다. 다른 이의 허물을 들출 여지가 없습니다. 내 옷에 묻은 더러움을 정결하게 해야 하고, 마음에 있는 죄된 생각을 정결케 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와 같이 아침마다 탄식하며 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부르짖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라는 탄식이 오늘 우리의 탄식이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없이 진정한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모두 이런 고백으로 이끄시기 원하십니다. 진정으로 빛 앞에 서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탄식은 그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중요한 소원을 갖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계속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정말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16절). “내 속에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절). “내가 원하는 바 선는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절).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으면서 정말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자신도 그러기를 진심으로 원했습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를 닮고 싶은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 열망이 너무도 컸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했습니다. 보통 사람들도 열망이 있습니다. 소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세상 사람들의 소망은 좀 더 높아지고 싶은 열망입니다. 좀 더 편하게 살고 싶고, 좀 더 권세 있게 살고 싶고, 좀 더 존경받으며 살고 싶은 소망입니다. 좀 더 많은 재물을 얻고 싶은 소망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난 후 사도 바울의 소망은 그리스도를 닮고 싶은 소원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소망이 생깁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그의 가슴이 솟아오릅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되면서 사도 바울은 상대적으로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전에는 그가 하는 일에 만족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다메섹으로 소아시아로 열심히 달려 다니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만족했고, 자기의 신분과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존재의 목적을 거기서 찾았습니다. 한 명의 예수쟁이를 찾아 감옥에 가둘 때마다 그의 존재의 가치는 더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해 일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것을 정말 절망적인 일입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못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른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 이것이 진정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졌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심한 영적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만이 느끼는 절망입니다. 성도는 최고의 윤리, 최고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로 인한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를 고민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최고의 삶을 추구하기 위한 고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

이런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뜨거운 열망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열망이 없는 사람은 문제 있는 성도입니다. 주님을 향해 타오르는 소망이 우리의 삶을 이끌고 가도록 해야 합니다. 전도에 대한 열정, 사랑에 대한 열정, 섬김에 대한 열정, 그런 일들을 하고 또 해도 다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신기하게도 교회에서 정말 잘 섬기는 사람은 늘 입에서는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저는 약합니다. 제가 뭐 하는 게 있나요? 다 주님께서 하시는 거요. 은혜로 하는 일이요. 주님께서 힘주시지 않으면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바울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점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지금 빛 앞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빛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합니다. 빛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누추함과 부끄러움을 발견합니다. 또 하나는 자신에게 새로운 원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신이 원하는 상이 자신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닮고 싶은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그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입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시작해야 하는 성도로서의 삶의 출발점입니다. 빛 앞에 서 있는 성도, 그래서 자신의 허물을 감출 수 없는 성도, 그리고 ‘내게 원함은 있으나’ 라고 한 것처럼         진정한 소망이 있는 것, 세속적인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갖게 된 참소망에 붙들리는 것, 그것이 성도로 살아가는 진정한 출발점입니다. 이것이 없이 우리는 아무리 많이 달려간다고 해도 헛된 달음질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열망과 빛 앞에 서 있는 절망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로 이 지점이 오늘 우리가 달려가야 할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 모두 이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롭게 나아가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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