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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독일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쓰일 응원용품을 팔기 위해 출국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집에다 여권을 놓고 나왔습니다. 집으로 다시 가서 가지고 와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비행기 시간에 맞출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협박전화였습니다. 그는 항공기의 출발을 지연시키기 위해 휴대폰으로 인천공항 안내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대만으로 가는 항공기에 폭발물이 설치해 놨다고 협박했습니다. 경찰은 항공기를 수색했으나 폭발물은 발견되지 않았고, 협박전화를 한 사람은 출국장에서 검거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을 안 겪어봤으니 다행이지, 얼마나 당황되고 어려웠겠습니까? 놀러가는 것이었다고 해도 안타까웠을 텐데, 더구나 사업차 가는 길이었으니 그의 마음은 더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지 못함으로 인해 생기는 손실은 얼마나 될지 상상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이런 상황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나오는 행동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 사람의 기질과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우선순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업의 성공이었을 것입니다. 사업에만 성공하면 그에게 어떤 것도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business를 위해 출국도 하지 못하고 경찰 유치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아마도 그의 전략대로 검거되지 않고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대만을 다녀왔다면 그는 그 일을 자랑삼아 떠벌리고 다녔을 것이고, 그는 제 이, 제 삼의 협박전화를 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의 계획은 30분 만에 들통이 났고, 그의 신세는 초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행동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짐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모든 인간들은 무엇인가에 얽매어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에 얽매어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관계에 얽매어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이념의 종이 되어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명예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목표성취나 성공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좋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서면 그것이 우리를 종으로 만들고,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종속되어 살아갑니다.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면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이념이나 원리 혹은 물질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16절은 바로 그 원리를 사도 바울 시대의 종의 삶을 통해 설명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종은 자기 시간이 없었습니다. 잠시도 자유로운 시간이고는 없었습니다. 그는 완전 그 주인에게 완전히 독점적인 소유물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잠시도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한 주인만을 섬겨야 했습니다.

이 비유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 달가운 비유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이것처럼 적절한 비유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비유를 보면서 오늘 우리의 삶을 보면 정말 중요한 삶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아니면 기관에 고용될 때 우리의 삶 전체가 고용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시간의 일부만을 고용주를 위해 일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 자신의 자유로 사용합니다. 삶도 동일합니다. 어떤 경우는 믿음으로 사는 것 같다가도 또 어떤 경우는 전혀 믿음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선택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오늘 우리의 삶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현대인도 한 주인을 섬기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어 실례가 혹 될지 모르겠지만, 양해해 주시고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는 목사가 집을 사면 ‘목사가 무슨 돈이 있어서 집을 사냐?’라고 보통 말합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들어보니까 미국에서는 목사가 집을 사야 교회성도님들이 생각할 때 ‘아! 목사님이 이제 이 교회에 정착할 마음을 가지고 계신 가보다’라고 생각한답니다. 처음에는 잘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 와서 ‘목사님도 집을 사셔야지요?’라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습니다. 그 소리 듣는 것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집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주변에서 자꾸 바람을 넣으니까 제 가슴에도 한껏 바람이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을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현실은 저의 상황과 많이 멀었습니다. 저는 집을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더 정직하게 표현하면 집을 살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샬롯츠빌에 집값이 만만치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저 자신에게도 그것은 무거운 짐이 되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순간 제 마음이 참 많이 답답해졌습니다. 많은 것들이 이 부정적인 하나의 현실 앞에 놓였습니다. 모든 것이 이 하나의 사실에 근거해서 해석되었습니다. 이 하나의 불가능함은 저의 삶에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느낌을 갖게 했습니다. 결국 저는 이 하나의 사실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저의 삶을 해석하게 했고, 이 하나의 사실이 저를 절망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꼭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마태복음 6장 32-33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실 하나님은 저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이미 채우시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말씀해주시는 좋은 권면들과 미국에서 사는 삶의 방법들은 참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목사도 집을 사는 것이 좋다는 것과, 가능하면 빨리 사는 것이 여러 면에서 유익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미국에서는 신용만 괜찮으면 집을 살 수 있다는 점 등은 미국에 살면서 잘 알아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바로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채우시리라.” 이것을 깨닫고 나니 제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저는 더 이상 집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은 저의 삶을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소망이 생겼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평생 하나의 잘못된 삶의 원리나 철학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삶의 철학에 실패하면 다시 바꾸어보지만, 여전히 정말 중요한 삶의 길을 찾지 못합니다. 고난은 계속되고, 삶은 파괴되어 갑니다. 가정은 아픔을 계속 겪게 되고, 인생은 원치 않는 곳으로 치달아 갑니다. 왜 삶이 이렇게 고달픈지도 모른 채, 세상을 원망하고 정치를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삶의 아픈 상처는 어디서도 보상받지 못합니다. 사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섬기는 그 주인은 사실 내 주인이 아닙니다. 그는 나의 인생을 앗아갔습니다. 그는 정말 내 주인은 아닙니다. 그는 나를 위해 나의 인생을 인도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원리입니다.


17-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지금은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지면서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5절에서는 그것을 ‘은혜 아래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힘은 죄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힘에 의해, 은혜의 원리에 의해 지배받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주인은 죄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것은 놀라운 특권이자 영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죄의 종이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16절) 우리가 우리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복적으로 죄의 종이 되려고 하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자는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죄의 종이 되어 그에게 복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우리가 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당당히 우리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특권을 누리십시오. 미국에 와서 넓은 자연을 보면서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수 십 년씩 사시는 분들도 있고, 혹은 1년 혹은 2년에서 5-6년을 살게 되는 분도 있지만, 이곳에 사는 동안은 이 은혜를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물론 한국에 더 좋은 점도 있고 미국에 더 좋은 점도 있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은 이곳에서의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일하게 동일한 것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봐도 다윗 왕은 왕으로서의 영광을 누리면서 그의 인생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누린 영광이 다윗보다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왕의 자리를 내어주고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행위를 막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왕의 자리보다 더 귀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왕위조차도 언제든지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누렸던 은혜요 복이었습니다. 그는 밧세바를 범했지만 결코 죄의 종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넉넉한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누리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의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믿음의 고백 위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죄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죄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죄는 우리의 삶을 허물어 버립니다. 의의 종이 되십시오.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하나의 이유는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죄의 종같이 살아가려고 하는 또 하나님의 능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는 호흡과 같고, 말씀은 양식과 같습니다. 호흡을 하지 않는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고, 양식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도는 기도와 말씀을 통해 살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은 육적인 호흡과 양식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제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날마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의의 종인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더욱 더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읽을 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 말씀은 결국 우리의 인생을 지배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고, 의의 종이 되게 합니다. 우리를 필요 없는 죄책감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바른 가치관과 믿음 위에 서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가운데 가장 축복된 삶을 누리게 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19절에 보면 우리는 이어지는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하나님은 우리가 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까지 이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부정과 불법에 드려졌던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당시에 흔히 있었던 일입니다.

저스틴 마아터(Justin Martyr)가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에서는 원치 않는 아기 특히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내어던졌다고 합니다. 매일 밤 많은 어린 아이들이 광장에 버려졌습니다. 그 아이들은 매춘굴을 경영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데려다가 키워서 매춘굴의 창녀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도시에서 창녀로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때때로 그들은 알지 못하면서 그들의 아버지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뿌려놓은 죄의 씨앗에 올무가 되어 죄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의 죄의 실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방세계의 불법이었습니다. 사람의 정욕이 그들에게 단 하나의 법이었습니다. 죄는 죄를 낳고, 불법은 불법을 낳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법칙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나쁜 일을 할 때는 망설이거나 겁이 나서 떨면서 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그런 일을 할 때는 훨씬 더 쉬워집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면 힘이 안 들고, 죄는 그 공포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모습은 고대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그런 일들이 많이 행해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의 유익을 위해 비행기를 세우겠다는 발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런 발상은 비행기와 승객들에게 그리 큰 불편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행해진 일일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 생각을 했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런 생각의 씨앗들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죄를 짓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죄를 한 번 지었다면 조금 후에는 다시 그 죄를 반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할수록 우리는 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공포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죄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유혹이 있고,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죄의 종이 될 여지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주님 앞에 드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비유가 적절할 것입니다. 어떤 주인이 자기의 하녀를 위해 이런 법을 제정했습니다. 기상 시간은 반드시 아침 6시여야 하며, 7시까지는 집안의 모든 청소를 완료할 것, 그리고 8시까지 주인의 모든 식사 준비를 완료하고 9시까지는 자녀들을 위한 모든 뒷바라지를 끝낼 것 등등의 하루의 일정을 정하고 규칙대로 수행하며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추방하거나 매질도 가능한 법을 정했다고 한다면 그런 법아래서 행동하고 봉사하는 하녀들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하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둘은 결혼을 하게 되었고, 하녀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이제 주인의 아내가 된 이 여인은 더 이상 주인의 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사랑과 은혜 아래 사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지난날의 법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15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주인의 아내가 된 이 여인이 함부로 막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 6시까지 일어나야 했던 이 여인은 이제는 10시까지라도 잘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아마도 더 일찍 일어날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더 이상이 법이 필요 없지만,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는 삶입니다.


의의 종이 되십시다. 은혜 아래 사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성도가 됩시다. 오늘 여기에 있게 하신 하나님, 오늘 우리를 샬롯츠빌에 살게 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좋은 아내를 주시고, 좋은 남편을 주시며, 좋은 자녀를 주시고 부모님을 주신 그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윗은 다윗의 은혜를 누리고, 바울은 바울의 은혜를 누린 것처럼,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법아래 살지 않고 은혜 아래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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