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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습니다. 때로는 링컨과 함께 사건을 맡은 적도 있었는데, 이 사실을 모르고 법정에 나갔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마다 그와 함께 ‘저런 시골뜨기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하며 나가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매사 링컨을 무시했습니다. 정치 일선에서도 그들은 자주 맞섰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 스탠턴은 링컨을 향해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까지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은 스탠턴은 가장 중요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합니다. 대통령의 참모들이 그의 결정에 놀랐습니다. 참모들은 대통령에게 재고해 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스탠턴은 각하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 버려야지요!’ 참모들의 말에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하지만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후에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결국 링컨은 그의 사랑으로 평생의 원수 사이였던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회복시킨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서는 크게 다섯 단락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인간의 죄 성에 대해 지적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도덕주의자들과 유대의 율법주의자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이것을 로마서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 20절에서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표현합니다.  죄의 한계, 죄의 크기보다 은혜의 크기가 더 크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죄가 아무리 강하고 크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모든 죄를 덮고도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바로 링컨의 사랑이 스탠턴의 비판과 무시, 그리고 정치적 대적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과도 같습니다. 링컨의 사랑이 스탠턴의 적개심보다 컸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이 미움보다 크고, 은혜가 죄보다 더 능력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로마서는 이 사실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 컸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를 덮고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하지만 이 말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남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크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를 덮고도 남는다면 우리는 계속 죄를 져도 되는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을 남기게 됩니다. 사랑엔 언제나 약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인 것 같으면서도, 왠지 약한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사랑으로 사람을 계속 용서하면 무질서를 낳는 것 같습니다. 죄도 묵인하면 범죄를 가능해 한다는 측면에서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죄를 지으면 당장 심판하고 꼬집고 바로 비판을 해야지, 용서하면 더 많은 죄를 범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도 동일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이런 반론을 제기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크다면,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죄를 다 덮고도 남는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자’라고 사람들이 말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크고 놀라운 능력이 있다면 우리가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보다 차라리 불의를 행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의와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크고 놀랍기에 우리의 그 모든 죄와 더러움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와 같이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죄를 져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절) 우리의 몸을 의로운 도구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역사를 드러내는 선한 도구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죄를 질 수 있겠다고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셨으므로 이제 우리 자신을 의로운 도구로 하나님의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의롭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가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이유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부터 우리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셔서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은혜를 누리는 자로서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이유 세 가지를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써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들입니다. 이 말은 죄가 우리 안에서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고백을 하고 믿음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죄의 세력은 여전히 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죄에 대해 계속적으로 죽도록 노력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죄에 대해 이미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몸이 물속에 들어가면서, 혹은 물을 머리에 뿌리면서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 죽은 존재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행위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리의 존재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젊은 남녀가 서로 교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사랑이 싹터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결혼을 결심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고민과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과 함께 때로는 과연 최선의 선택일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국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 이 두 사람은 다른 남자, 다른 여자에 대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예쁜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사람이 최고입니다.

길을 가다가 예쁜 여자를 보면, ‘어! 예쁘네’ 하고 지나가야지 그 상황에서 고개가 돌아가면 문제 있는 것입니다. 신문에서 능력 있는 남자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연봉이 얼마고, 직장은 어떻고, 자동차는 무슨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더라.’ 이런 남자와 사는 여자는 어떨까? 거기까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서 더 나가면 그것은 문제 있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괜찮습니다. 이런 남자가 좋을까? 저런 여자가 좋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난 후는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이것은 그런 남자나 여자에 대한 유혹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유혹을 안받도록 노력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런 남자나 여자에 대해 죽은 존재와 같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전과 같이 우리의 삶을 스쳐지나가는 죄의 세력들에 대해 포위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마치 결혼한 후 다른 남자나 여자와는 상관없는 거처럼 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우리의 존재를 깨달아야 합니다.

결혼 생활에서 다른 남자, 다른 여자에 대해 상관없는 (죽은) 자인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들임으로 죄와 더 이상 상관없는 자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결혼을 한 후 ‘나는 최상 없는 남자, 혹은 여자가 온다고 해도 그 남자, 그 여자는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이제 우리는 죄와 상관없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에 헌신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써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8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성경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죽음으로 갚아야 할 모든 값을 지불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가 짊어 져야 할 모든 죄의 값을 다 지셨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죽음 후에는 부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당연히 그분이 죽으셨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또한 그 분이 죽으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연합하여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앞서 설명 드렸듯이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죽은 것은 아주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죽을 뿐,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를 대하여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신비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육신의 죽음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죄에 대해 죽으면, 온갖 많은 이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 같은 두려움이 빠집니다. 죽으면 영영 다시 못 살아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 후에는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죽음은 반드시 다시 살아납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는다고 사도 바울을 강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죽는 일을 두려워 마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에 대해 다시 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의미에서 죽을 때 누구도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고통을 당할 때 죽어 보십시오. 자존심이 상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죽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으십시오. 얼마 안 있어서 하나님에 대해 산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시고 높이시고 존귀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비난하는 사람도 많고, 다시 깎아 내리려는 사람도 많지만, 하나님께서 높이시면 누구도 우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 산 자입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는 죽었다고 선언하십시오. 죄는 나와 더 이상 상관없다고 여기십시오. 동료가 나를 험담할 때 나는 죽은 자라고 스스로 선언하십시오. 때때로 교회나 가정이나 직장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 자신을 향해 죄에 대해 죽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써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음으로 새 생명의 삶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한다는 말은 가장 행복한 삶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말들 중에 하나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 있어 산 것이 아니라 관계가 살아 있고, 영이 살아 있고, 삶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아기를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합니다. 아기를 돌보는 과정에서 모든 수고를 다 합니다. 밤잠을 자다가도 아기가 울면 일어나 돌아봅니다. 아기를 위한 일이라면 온갖 더러운 일들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일을 오히려 기쁘게 여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고, 삶이 있고,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명 있는 증거입니다. 목숨만 붙어있고, 숨을 쉬고 있다고 생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을 누리고 산다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모든 죄,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까지도 다 용서하실 만큼 엄청난 사죄의 능력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전히 죄에 거해야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를 몽땅 다 사해주신 후 이제 우리들의 삶을 정말 아름답고 멋지게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죄의 용서, 거저 받은 은혜, 한없는 죄를 다 덮을 수 있는 주님의 은총, 그런 것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멋지게 만드시기 위해 주님의 기초 작업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병기(도구)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죄에 대해 죽은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감을 누리십시오. 목숨이 붙어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결혼식 올리고 산다고 다 부부가 아닙니다. 내가 낳았다고 다 내 자식이 아닙니다. 정말 부부의 사랑을 누리고, 정말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있어야 하고, 산다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느끼고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그런 삶을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축복이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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