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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믿음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중요한 확증은 십자가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십자가에 대한 의미를 한층 더 깊은 단계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언제부터 사랑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일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믿을 때부터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본문은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둘째,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셋째, 10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라고 말씀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병들고 사업에 실패하고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부터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경험하거나 사고 소식을 듣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은 후 고백하기를 사고가 나자 자기의 잘못을 생각하며 후회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의 잘못을 아시고 고난을 주신 것처럼 느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길을 잘못 가지 않게 하시려고 어떤 경우 경고의 사인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세상의 그 어떤 권세 있는 자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병에 들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사업에 실패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비록 학교에서 학점을 잘 못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시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한 번 작정하신 이상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에 대해 오해합니다. 내가 잘못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멀리 하신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생각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면 나도 그를 싫어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샤머니즘을 보면 인간의 본성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샤머니즘이나 고대 근동의 종교를 보면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감동 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자기들의 신을 감동시키기 위해 제물을 드리고, 고행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제물과 고행에 감동한 신은 그제야 사람들의 간구를 듣는다고 믿습니다.

즉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이 먼저 자기 신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신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간구에 의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변화시키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던 것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바뀌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믿음 생활을 해도 진정한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해 얻는 기쁨도 없습니다. 삶의 유익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해 중에 하나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활동에 참여하고, 때로는 제법 많은 헌금도 드리고, 그런 과정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사랑하셨습니다.
6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연약할 때’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경건치 않은 자’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상태는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성경은 ‘무기력한 상태’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정말 더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예수 믿기 전에는 연약했고 무기력했는데, 예수 믿은 후에는 반대로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고 나니까 전에 느끼지 못한 힘이 막 생기나요?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게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알고 난 후에 이전부터 훨씬 더 능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 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를 모르다고, 예수와 상관없다고, 당신들이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하던 제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지,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은지 판단해 보라고 담대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는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어기고 그가 만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풀무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마지막으로 준 기회를 마다하고 그들은 끝까지 절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왕에게 말합니다. “왕에게 우리가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뜨거운 풀무불에서라도 우리를 건져 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금 신상에게 절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담대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담대한 삶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고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약함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담대하게 살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나는 아직도 약한 믿음을 지녔습니다. 예수를 믿긴 믿지만, 기도를 하는 것을 봐도,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의 삶을 봐도 신통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산다고 말하기에는 아직도 너무 부족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주님은 우리도 역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우리가 약할 때, 즉 예수를 믿기 전의 모습을 보시면서 사랑하시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이 연약한 자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여기에 감격이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과 기쁨을 가지고 다만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신분을 바꿔줍니다.
세상에서는 자격을 요구합니다. 직장에 들어가려면 직장에서 요구하는 자격을 갖춰야 합니다. 학교에 진학하려고 하면 학교에서 요구하는 성적과 여러 가지 품행과 활동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에게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격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입니다. 자격 없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냄새나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과 딸로 여겨 주셨습니다.

하루는 왕이 평복을 입고 민정시찰을 나갔습니다. 길거리에서 한 어린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그 아이는 힘없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부모도 없고, 잘 집도 없고, 당장 저녁 먹을 음식도 없는 아이였습니다. 물론 입을 옷도 없었고, 목욕도 하지 못했으며, 그의 몸에서는 냄새만 진동합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왕은 그 아이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불쌍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 아이를 왕궁으로 데려옵니다. 목욕을 시키고 왕자의 옷을 입히고 왕의 음식을 먹게 하고, 왕자의 침상에서 자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왕의 양자로 삼습니다. 왕은 그 아이에게 왕자다움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를 사랑했고, 그에게 왕자라는 신분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조금씩 그 아이는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변해갑니다. 누가 요구하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을 왕자로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왕은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본래 죄인이었습니다. 아니 아직도 죄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왕자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 우리에게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왕자로서의 왕궁의 향기보다는 독한 냄새가 몸 한 구석에서 진하게 나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왕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지금부터 하나님의 아들(딸)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 너는 언제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기억해야 해. 그리고 힘들겠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 처음에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것이 너의 삶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줄지 네 스스로 경험하게 될 거야.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신분을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냄새나는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사실은 자격을 갖추게 한 후 신분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신분을 바꿔주시고 자격을 갖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내내,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주시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10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만들어놓으신 질서를 깨뜨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편에 서서 살아왔습니다. 미움과 전쟁과 시기와 악을 행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과 원수를 맺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먼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화해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십니다. ‘나를 좇으라’라고 하시자, 마태는 하던 일을 놓고 주님을 좇는 제자가 됩니다. 얼마 후 마태는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 기뻐서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하고, 또 자기 친구들, 세리와 죄인들을 초청했습니다. 마태는 자기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주님은 ‘술을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양자됨을 누리게 하기 위해 당신이 스스로 비난 받는 일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은 죄목도 없이 십자가에 달리 죽으셨습니다. 온갖 모욕과 수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케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의 손을 잡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실수와 잘못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을 바꾸셨습니다. 우리를 왕자로 삼으셨습니다. 왕이 먹는 음식을 먹고, 왕이 자는 침대에 자게 하시고, 왕의 품위와 자존심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손 내미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고 교제케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얻게 되는 은혜는 기쁨입니다.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먼저 손 내미시고, 보내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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