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샬롯츠빌한인교회

주일설교

조회 수 12638 추천 수 203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예루살렘은 지난 한 주간 내내 복잡하고 시끄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한 상황 그 자체였습니다. 진리와 불의가 가장 치열하게 대립되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대제사장들이 뒤를 봐주는 동전 바꾸는 자들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고, 성전에서 내 쫓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런 책망은 많은 종교인들을 분노하게 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은 3년 동안 훈련하고 함께 지낸 제자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없는 시간, 조용히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간 시간에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군중들이 없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체포당하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밤새도록 무려 다섯 군데나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받으시고, 이른 새벽 빌라도 앞에서 십자가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모든 일들은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다 끝나버렸습니다. 이른 아침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까지 그 위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당신의 생명을 다하셨습니다. 모든 일들은 그렇게 끝나 버렸습니다.

월요일까지만 해도 성전에서 호령하시면서 책망하시던 그 주님의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화요일까지만 해도 유대 종교적 귀족층들을 향해 날카롭게 질책하시던 그 주님의 예리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목요일 저녁 제자들을 모아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내가 너희 선생으로서 이렇게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신 말씀이 귀에 살아옵니다.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의 말씀을 다락방에서 전해주시면서 마지막에 주신 말씀은 아직도 제자들의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지만 이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분은 제자들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유사 이래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강은 건너갈 수는 있어도 건너올 수는 없습니다.

불과 삼일 전만해도 자신들과 함께 하시던 그 주님께서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너무도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이번 유월절에 뭔가 대사를 이루실 것 같으시던 그 주님께서는 힘없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갈 길로 가버리고 있습니다. 어부들은 다시 바다로 가고, 어떤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문을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고, 가룟 유다는 자신의 계획의 실패로 목을 매고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두 제자는 실망과 낙담을 가지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 방향으로 25리(약 7마일) 정도 되는  거리에 있습니다. 그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지난 한 주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제자들 옆에 또 한 사람이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분이 누군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지금 자기들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금의 그들의 마음의 고통과 낙심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관심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두 제자 중 글로바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대답합니다. ‘아니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오시면서도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무슨 일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글로바라는 제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최근에 예수라는 분에 대한 엄청난 일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분은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던 분이셨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는 구약성경에도 외경에도 그리고 다른 어떤 문서에도 나오지 않는 지명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의 한 작은 성읍이었습니다. 갈릴리 지역이 예수님 당시 모두 경멸받던 지역(요7:41, 52)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나사렛이란 동네는 경제적으로도 빈약했고, 예수님 당시 가장 경멸받던(요1:46) 성읍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을 멸시하기 위해 표현할 때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또한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이단’(행24:5)으로 취급될 때 ‘나사렛’이란 단어는 비방과 모욕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자들이 예언했다고 했는데, 그 말은 예수님께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대부분의 예언자들의 예언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바로 ‘나사렛 예수’로 알고 있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오신 주님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당시 가장 훌륭한 종교인들도 예수님 앞에서 번번이 진리에 대한 논쟁에서 물러섰습니다. 또한 병든 자를 살리며, 물 위를 걸으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세 번째, 그들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음모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정당한 재판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의로우셨고, 진리를 선포하셨으며, 불의에 대해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 분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정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이미 약속되었던 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어느 날 갑자기 인류를 구원하겠다고 나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미 오시기 700년 전부터, 아니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준비해 놓으신 길이었습니다. 다섯 번째, 몇 명의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지금 실망과 낙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말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그들에게 전혀 힘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나사렛 예수’로 오셔서, 고난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 약한 자를 사랑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천국에 대한 복음을 주셨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주님에 대한 앎이 그들에게 전혀 능력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두 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무덤은 대제사장들이 보낸 병사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무덤에 갔던 사람들은 병사들에 의해 제지를 당해서 무덤을 드려다 보지 못했든지, 무덤에 들어갔다면 분명 예수님의 시체를 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으로 봐서 무덤은 분명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체는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 이후에 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믿음이란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돼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논리적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황을 이해하면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 대학생들이 제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요즘 인터넷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신 것이 사실은 얼음 위로 걸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답니다.’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가는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했다는 사건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얼음 위로 걸으셨다면 배는 어떻게 얼음 위로 노를 젓고 갔을 것이며, 풍랑은 어떻게 얼음 위로 일어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바로 대학생들이 한 질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5-26절).” 성경에 수없이 주님의 오심과 그 분의 왕 되심과, 그리고 그의 고난당하심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말씀들 속에서 당신 자신에 대해 주시는 말씀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바로 메시야였으며,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주는 복이 바로 메시야였으며, 야곱과 씨름하던 자가 메시야였고,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자가 바로 메시야였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모세보다 더 큰 선지자라고 한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며,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또한 메시야였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궁극적인 기업 무를 자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보다 더 큰 왕으로 오실 이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시편 22편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며, 시편 23편에 나오는 선한 목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잠언에 나오는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솔로몬의 아가서에서 사랑하는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멸시를 당하시고, 고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은 목적지까지 다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들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주님께서 식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분이 바로 그들의 스승이요 구세주로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서 그들은 조금 전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실망과 낙심으로 내려왔던 길을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다시 올라갔습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이제는 그들을 잡아 이어지는 십자가형을 당할 위험 속으로 담대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 두려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하늘로부터 주시는 소망과 능력으로 가득한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담대함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바로 이와 같은 부활의 능력과 소망이 필요합니다. 삶에 지치고 낙심한 우리 마음 안에 주님께서 주시는 이 부활의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삶에 지친 우리의 심신에 부활의 능력을 덧입는 것은 우리의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말씀을 들을 때 회복됩니다. 오늘 주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말씀은 그동안 듣던 말씀과 별다른 말씀이 아닙니다. 27절을 다시 봅시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설명하시니라.” 주님은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단지 창세기부터 내려오는 메시야에 대한 말씀들을, 성경 그대로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 제자가 그 말씀을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어려서부터 말씀을 듣고 또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다 아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새롭게 들을 때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지며, 깨닫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앞서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분이 말과 일에 능하신 분이라고도 알았고, 합당치 않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음도 알았고, 이스라엘을 구속할 구원자라는 사실도 알았고, 죽었다고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까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으로부터 다시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함께 식사하실 때, 그 말씀이 제자들의 눈을 밝게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좋은 설교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은 그렇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TV 앞에서 소파에 앉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내가 원하는 대로 클릭하면서 껐다 켰다 하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좋은 설교집을 보면서 밑줄 거가며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함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들어야 합니다.

요즘 목사님들마다 설교집을 책으로 내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설교를 잘 하시는 어느 목사님에게 어떤 분이 찾아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모아 설교집을 하나 내시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극구 그것을 사양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말씀은 그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을 떠나면 더 이상 설교일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의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TV를 통해 말씀을 들으면서 회개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스데반이 설교할 때 사람들은 돌을 들고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스데반은 그 설교를 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여기서 말씀이 얼마나 사람들 마음속에 강하게 역사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듣는 청중들을 회개케 하든지, 아니면 돌을 들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두드리는 말씀의 능력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지만 TV로 말씀을 듣던가, 테입이나 혹은 인터넷으로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말씀 가운데서 불편함을 느끼면 채널을 바꾸거나, 다른 데를 클릭함으로 더 이상 말씀과의 부딪힘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배웠다고 하더라도 오늘 이 삶의 현장에서 말씀과의 부딪힘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들은 성경을 정말 잘 압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말씀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너무도 잘 알고,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문제는 말씀이 그들의 가슴에 꽂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27절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설명하다’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텍스트를 향해 가까이 찌르다’라는 뜻입니다. 즉 말씀의 내용을 피상적으로 알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나하나 찌르듯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왕 예수를 믿고 부활의 능력을 얻어 살아가려고 한다면, 좀 더 저속한 표현으로 말해서, 예수 믿고 덕 좀 보려고 한다면 예배 중에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나의 삶 속에 살아있도록 하려면 예배 가운데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자복하며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든지, 아니면 말씀을 선포하는 이를 향해 돌을 들고 달려들든지 양단간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삶의 변화시키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오늘 이 부활주일 아침, 사랑하는 성도님의 삶 가운데 부활의 소망가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No Image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 (엡3:19-21) 2013. 4. 28 주일예배

    Read More
  2. No Image

    사랑으로 결속된 관계 (엡3:17-19) 2013. 4. 21 주일예배

    Read More
  3. No Image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엡3:17) 2013. 4. 14 주일예배

    Read More
  4. No Image

    강건한 속사람 (엡3:17) 2013. 4. 7 주일예배

    Read More
  5. No Image

    예수의 부활과 부활 신앙 (마28:1-10) 2013. 3. 31 부활주일설교

    Read More
  6. No Image

    십자가 앞에 선 예수 (눅14:32-42) 2013. 3. 24 종려주일예배

    Read More
  7. No Image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 (행 16:6-10) 2013. 3. 17 주일예배

    Read More
  8. No Image

    복음의 증인이 되는 성도 (벧전3:13-17) 2013. 3. 10 주일예배

    Read More
  9. No Image

    주님의 선교 명령(마28_16-20) 2013. 3. 3 주일예배

    Read More
  10. No Image

    선교하시는 하나님 (빌2:5-11) 2013. 2. 24 주일예배

    Read More
  11. No Image

    교회로 말미암아2 (엡3:10-13) 2013. 2. 10 주일예배

    Read More
  12. No Image

    교회로 말미암아1 (엡3:10-13) 2013. 2. 3 주일예배

    Read More
  13. No Image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엡3:7-9) 2013. 1. 27 주일예배

    Read More
  14. No Image

    나의 환난, 곧 너희의 영광 (엡3:1-6,13) 2013. 1. 20 주일예배

    Read More
  15. No Image

    비밀의 계시 (엡3:1-6) 2013. 1. 13 주일예배

    Read More
  16. No Image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 (사6:1-8) 2013. 1. 6 주일예배

    Read More
  17. No Image

    교회의 비전2 – 함께 하는 공동체 (행2:43-47) 2012. 12. 30 주일예배

    Read More
  18. No Image

    놀라운 그 이름 (사9:6-7) 2012. 12. 25 성탄예배 (이필립목사)

    Read More
  19. No Image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 (눅2:25-35) 2012. 12. 23 성탄축하주일예배

    Read More
  20. No Image

    내가 온 것은(3)-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마9:9-13) 2012. 12. 16 주일예배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 41 Next
/ 4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