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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유월절(逾越節) 며칠 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월절은 오순절과 초막절과 함께 이스라엘에 있는 세 개의 큰 명절 중에 하나입니다. 유월절은 모세가 애굽에 들어가 바로 앞에서 속박과 고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서 그 기원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애굽에 있는 장자들이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이 때 당시 애굽에 노예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재앙이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려진 조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어린 양을 잡아서 집 문설주, 즉 문기둥에 양의 피를 바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천사가 애굽에 내려와서 모든 장자들을 죽일 때 대문 기둥에 피가 있으면 그 가정에 있는 장자는 동물이든 사람이든 죽이지 않고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애굽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유월절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뜻은 ‘넘어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사건을 기억하고 계속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 유월절은 어린 양을 잡아 자기들의 죄를 속하는 예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유월절만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그 예식을 행하는 것이 그들에게 영광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사는 사람들은 평생에 꼭 한 번만이라도 유월절 기간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월절 제사를 지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약 30년 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한 총독이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잡는 양의 수를 세어 봤는데, 그 수가 무려 256,500마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통 양 한 마리가 열 명 이상의 이름으로 드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는 적어도 2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 양을 잡아 대신 죽게 함으로 죄 용서를 받은 것을 확인하는 예식입니다.

그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갔습니다. 유대 사회에 대한 예수님의 영항력과 유대의 기득권층이었던 종교세력들과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갔습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기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반체제인사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유월절이 되기 얼마 전 유대인들이 모여서 예수님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를 죽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대안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수배하는 공식적인 절차를 밟았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7절에 보면, 당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유월절 얼마 전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에 대한 소문은 더욱 더 무성하게 번져갔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얼마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주로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많은 사람들은 모두들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분이 과연 이번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나타나겠느냐 하는 것이 그들 대화의 주된 화제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한 동안 듣지 못한 사람들은 이번 유월절 기간 동안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 지도층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명수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출현한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방법으로 예루살렘에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귀를 타고 지극히 공식적인 방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겉옷을 펴서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였습니다. 나귀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고귀하게 생각되던 짐승이었습니다. 당시 왕들은 전쟁에 출전할 때는 말을 타지만, 평화의 때에는 나귀를 탔다고 합니다. 즉 예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왕 되심, 즉 평화의 왕으로 오심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백성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 분이 왕이 되시면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워줄 것이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려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이 모습을 보자 모든 사람들이 다 달려 나와 예수님을 보면서 소리를 칩니다. 겉옷을 벗어 예수님의 나귀가 가는 길에 깔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 들고 흔들면서 외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주전 167년 시리아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는 유별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제의 부하 장군이었던 안티오커스가 계승한 시리아 제국의 네 번째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의 문화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 그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가는 곳마다 폭력으로라도 다른 민족들을 압제하고 문화를 전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침략해서 여호와를 섬기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에게 예배하도록 하고, 그 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불결하게 생각하는 돼지를 번제로 드렸습니다. 더욱이 성전 뜰에 둘러 있는 방들은 매춘굴로 만들어버렸고, 유대인들의 신앙을 말살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 때 유다 마카비 형제가 일어나 반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이 일로 해서 그들은 안티오커스를 추방하는데 성공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고, 이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가장 크게 지키는 ‘하누카’라는 절기입니다. 이에 대해 제1마카비서 13장 51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수금과 심벌과 다른 현악기를 연주하며,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요새에 들어왔다. 그것은 이스라엘로부터 대적이 멸망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마카비 형제가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군대를 무찌르고 돌아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손에 들고 환호하며 환영하던 것이 바로 종려나무 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당시 ‘만세’ 정도의 의미로 소리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말 자체로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분위기과 ‘호산나’라고 외치는 백성들의 외침은 너무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즉 지금 그 상황은 진실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전체를 뒤집을 만큼 매우 적절한 상황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면서 ‘호산나’를 외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불과 200년 전쯤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을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지 않고,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정복자로서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을 들어가고 계십니다. 2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효과적으로 말씀을 전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서 당신의 오신 목적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왕 되심입니다. 그 분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정복자로서의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이 땅에 평강을 주는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주님은 이 때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을 보면서 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일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그야말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이지 않을 만큼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역사가에 의하면 예루살렘 도성 한 가운데를 쟁기로 밭을 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주님은 이런 예루살렘과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는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니라.” 평강의 왕으로 오신 그 주님을 맞이하는 마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두 번째,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보여주는 의미는 주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9장 2절과 신명기 21장 3절에서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멍에 메지 아니한 짐승은 신성한 목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짐승이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고 계신 나귀는 바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짐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징이었습니다. 실제로 드려진 이는 나귀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아셨습니다.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유대 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명수배하고, 그를 보는 자마다 신고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은 곧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이 친히 평강의 왕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준비하시고 계셨습니다. 불과 닷새 후면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로마 군사의 손에 잡혀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다른 절기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유월절 절기를 통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월절 전날 유월절에 드려지는 어린 양과 같은 모습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이며, 그 그림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약의 유월절의 실체이며 완성입니다.

그 분은 그동안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때로는 기적으로, 때로는 섬김으로 본을 보이시면서 천국을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 분은 예루살렘에 움집한 2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향해 친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심으로서 구속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단지 역사 속에 나오는 한 인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해 그처럼 고난을 당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평강의 왕으로, 십자가의 길을 향해 담대히 나가셨다는 사실이 어떻게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정말 놀라운 사건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완벽하게 당신의 길을 걸으시고, 구속의 길을 열어 놓으셨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묵상하면 할수록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려주일을 맞아 이 놀라운 감격에 참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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