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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예배>
[여전도회 오디오 찬양] [남전도회 오디오 찬양]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목적을 다섯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데, 1. 예배, 2. 교제, 3. 그리스도를 닮아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면서 먼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졌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이겠습니까?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조물주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이 진리를 들으면서도 놀라지 않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세상의 보통 종교들은 인간이 자기의 신을 움직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신에게 motivation을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신의 마음을 감동시키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예물과 정성으로 신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보통 종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motivation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움직이고, 감동시키시고, 감사하게 하십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삶의 순간순간마다 인도하심을 체험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모양과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바로 인간을 감동하게 하시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옆 사람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해 봅시다. “당신을 보니 하나님을 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온갖 시기와 다툼과 미워함과 살인과 욕심과 투기 등으로 가득 찬 인간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하나님 자체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지만, 인간은 이미 하나님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완벽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후 4: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래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세 번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회복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런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보셨나요?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닮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하면 우리는 일단 거부감 혹은 부담을 갖습니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 같고, 아니면 40일 정도는 금식을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위협과 협박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때로는 목숨을 거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 아니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어에는 강조형을 표현할 때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고 또 좋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 그리스도를 닮은 인간의 모습은 먼저 하나님께서 보시고 좋아하십니다. 엄청나게 좋아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이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하나님께서 그에게 배우자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결혼 주례를 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결혼 예식장으로 나와서 신랑의 손에 딸을 넘겨주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그들과 동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인생을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십니다. 그들의 필요를 살피시고, 그들의 인생을 부요하게 하십니다. 아름답게 세워주십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인간의 모습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이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창2:24-25).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이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참 아름다운 모습,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바로 부부 사이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 성경은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릴 것이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다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친한 친구에게는 깊은 비밀도 털어놓습니다. 서로간의 친밀감과 신뢰가 쌓일수록,  또 상대방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상대방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만큼 신뢰와 사랑이 쌓이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지면서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서 입어야 했습니다. 그냥은 부끄러워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들은 나무 뒤로 숨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불행한 삶의 자리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은 다시 회복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당연한 목적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그 본래의 목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새롭게 하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처음 만드실 때의 그 모습으로 바꾸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에 흥분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감동시키시고, motivation 하시는 종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닮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태어남으로 닮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은 것은 부모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닮아도 근본적으로 닮을 수 없습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꼭 빼닮았는지 그것은 정말 신비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닮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 관원인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니고데모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다시 태어난다는 말인가?’ 유대 관원 니고데모가 의아해 하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이 말씀에 니고데모는 이해를 했을지 모르지만, 여기 앉아있는 우리들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어떻게 태어납니까?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아기가 힘써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힘써서 아기를 낳는 것입니다. 아기는 자기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기는 사실 태어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는 자기가 태어나는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태어난 후에 자신의 출생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내 엄마의 얼굴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자라가면서 자신의 엄마를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출생의 신비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엄마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동일한 이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태어날 때 우리의 어머니가 산고의 진통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의 짐을 지고 산고의 진통을 하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죽음의 자리에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대신해 고통을 겪고, 또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어머니 아버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수고하신 그 어머님과 아버지를 보면서 감사를 돌리는 것이 필요하고 마땅한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첫 번째 방법은 바로 태어남으로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그 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분들이 바로 나의 어머니요 아버지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 분들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영적으로 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고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그리스도를 닮은 첫 번째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방법은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육신의 부모님이 우리를 낳으셨지만, 우리가 그 분들과 함께 살지 않는다면, 그 분들로부터 양육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온전한 자녀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 분들을 닮아 가는데 상당한 제한을 받게 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어려서부터 끊임없는 교제와 대화, 사랑을 주고받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우리는 부모님을 닮아가고, 감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산고의 진통으로 낳는 복을 얻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분과 교제하고 대화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지속적인 과정이 필요합니다.

태어나는 것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닮아가는 과정은 나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 분께 집중함으로 그 분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시선이 언제나 다른 곳에 머문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그리스도를 닮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성화(sanctification)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점점 더 거룩해져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라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복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기도 해야 하지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적어도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말씀으로 인한 변화입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교육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온전하게 하도록 이끄신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불어넣고, 믿음을 만들며, 변화를 일으키고, 귀신을 떨게 하며, 기적을 행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인격을 형성하고, 유혹을 이기며, 희망을 주고, 권세를 줍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고백합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6-17절의 말씀으로 변화되어 종교개혁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2절의 말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지나온 방탕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했는지에 대해 어느 학자는 말하기를,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로도 훌륭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로 인해 정말 행복했던 사람은 그와 동시대에 살면서 그의 삶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말씀으로 하여금 나에게 말씀하도록 하십시오.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의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사람들과 상황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게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살다보면 여러 가지 상황들과 사람들을 통해 어려움과 환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고난을 당하는 이유들 중 대부분은 사실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상황들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느끼는 많은 이유들은 대부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조급하거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만을 보면서 미리 염려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려운 상황이 이르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었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 이긴 싸움에 참여하는 군인들과 같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두려움들은 사실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물리치십니다. 이런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복 받고 상황이 좋아지고, 성공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고통이 있고, 환난을 당하고,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도록 우리를 조각하시고 다듬는 일을 하십니다. 태어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통한 산고의 진통으로 낳지만, 자라는 것은 고통과 아픔이 동반됩니다. 돌을 깎고 다듬는 석공의 정에 맞는 돌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다듬으시는 손길이 아프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들, 인간관계이 갈등, 물질적인 어려움, 진로의 막힘 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이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듬으시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맡기면 그 분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완벽하게 만드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가 태어나고, 환난과 고난을 통해 자라감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도,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를 만드신 그 놀라운 형상을 회복하는 은혜가 성도님들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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