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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 두 번째 것을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인생의 두 번째  목적은 교제입니다. 교제란 말은 다소 협소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오해를 불어일으키기도 하는 말입니다. 함께 신앙생활 하시다가 2004년 말에 한국에 되돌아가신 한 성도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한 번 만나서 삶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신앙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자는 의미로 ‘만나서 교제 좀 합시다’라고 했더니, 교제는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들고 ‘교제’라는 말을 찾아보았는데, 그것은 꼭 이성간에 사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교제라는 말이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인생의 두 번째 목적을 설명하기에는 다소 제한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교제’라고 하는 단어의 원어(헬라어)는 koinonia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영어로는 흔히 fellowship으로 번역되어 있고, 때로는 partnership으로 번역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교제라는 말 외에도 ‘친교’, 혹은 ‘사귐’이라는 말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친교라는 말을 식사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있어서 처음 저도 우리교회를 왔을 때 다소 적응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표현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교제라는 말은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정도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전도회에서 보고 있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에서는 교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교제는 함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 진실한 나눔, 실제적인 섬김과 희생적으로 서로에게 베풀고 서로에게 위로를 주는 것을 포함한,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서로’에 대한 명령들이 포함되어 있다.’

성경에서 교제가 가장 잘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보여줍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초기교회의 모습은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서로 모든 물건을 통용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조금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욱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집에서 떡을 떼면서 대화와 격려, 그리고 위로의 시간을 가졌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즉 교제를 다시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사람들의 삶 속에서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첫 번째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천국과 같은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koinonia’라는 말로, 즉 ‘교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목적인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세워진 인간의 목적이라면 교제는 인간과 인간, 나와 이웃 간에 세워진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와 같은 삶을 이 땅에서 먼저 누리고 나누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옆으로 가로지르는 나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이 두 가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즉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교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는 공동체성입니다. 기독교는 공동체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혼자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보통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는다고 말합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내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흔히 농담처럼 나는 구원 받을지 잘 모르니, 마누라 천국 갈 때, 치마 자락 잡고 간다고 말하는데, 천국은 그렇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공동체적입니다. 함께 믿도록 되어 있습니다. 함께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았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어려운 성도들이 있으면 도와주기도 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가족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가족들입니다. 형제자매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7절에는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를 같은 형제와 자매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한 가족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동일한 자녀들입니다. 누가 더 높거나 낮지 않습니다. 누가 더 권세가 있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자녀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합니다. 어떤 사람은 눈과 같고, 어떤 사람은 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냄새 맡는 코의 역할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발이나 손의 역할을 합니다. 이 말씀에서 주고 있는 초점은 내가 어떤 역할을 맡았느냐 라든가  혹은 내가 맡은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직분인가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함께 부름 받는 성도들은 본질적으로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필요 없다 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살아가도록, 그래서 서로 피차 떡을 나누며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하셨으며, 그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분히 나누어주도록 의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며 성도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동체 안에서 치유를 경험하고 위로받고 새 힘을 얻고 돌아가는 것이 바로 교회의 참모습입니다.

2002년에 만들어진 ‘콰이 강의 기적’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영국군 장교인 고든이라는 실제인물이 주인공입니다. 그는 전쟁 중 해상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미얀마와 태국을 잇는 철로공사에 투입되었습니다. 포로들은 섭씨 50도 넘는 더위 속에서 태국의 정글 속에서 철로를 놓는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 간수는 포로들이 게으름을 부린다 싶으면 때려죽이거나 총검으로 찔러죽이거나 혹은 다른 포로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잘라 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죽는 군인들보다 과로와 영양실조, 그리고 각종 질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주인공인 어니스트 고든은 각기병, 기생충, 말라리아, 이질과 장티푸스가 한꺼번에 겹쳐 몸이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그는 마지막 더 이상 살 가망이 없자 마지막 죽음의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팔꿈치로 몸을 지탱해가며 부모님께 최후의 편지를 쓴 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포로들은 살기 위해 수프 조금을 가지고 다투었으며, 야채 몇 조각이나 쌀 몇 알을 놓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숙소에서는 절도가 흔하게 일어났고, 사람들은 야수처럼 변해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증오가 이글거렸습니다.

그런데 하루 저녁에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본군 간수가 하루 일과를 끝내고 작업 도구를 꼼꼼히 세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간수는 삽 하나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고함을 치면서 삽 하나를 찾아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만약 없어진 삽이 안 나오면 모두 죽일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포로가 앞으로 걸어 나와 차렷 자세를 취하고는 말했습니다. “내가 했습니다.” 화가 난 간수는 그 포로에게 달려들어 발로 차고 때렸습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간수는 총을 들어 개머리판으로 그 포로의 머리를 찍었습니다. 포로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지만, 간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신을 계속 걷어찼습니다. 마침내 구타가 그치자, 다른 포로들은 동료의 시신을 들고 숙소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작업 도구의 재고 조사를 다시 했을 때 간수는 실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삽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포로 중 한 명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장 13절)”라는 성경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죽은 동료가 자기들을 위해 대신 죽었음을 알면서 포로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어가는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죽어가는 모든 포로들에게 합당한 장례식을 치르고 매장을 한 뒤 각 사람의 무덤에 십자가를 꽂아 주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포로들은 서로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절도는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고든이라는 사람도 매일 찾아오는 두 명의 동료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 변화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한 명은 그의 다리에 난 종기를 열심히 치료했고, 위축되어 쓸모없어진 다리를 주물러 주었습니다. 다른 동료는 음식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배설물을 치워 주었습니다. 새로운 움직임이 수용소 전체에 퍼져 나갔습니다.

고든이라는 사람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죽음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다. 그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파괴적인 지배력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생명을 이루는 힘과 죽음을 이루는 힘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직접 보고 있었다. 이기심, 증오, 시기, 질투, 탐욕, 방종, 게으름과 교만은 모두 생명을 거슬렀다. 한편 사랑, 영웅적 행위, 자기희생, 동정, 자비, 인격과 창의적 믿음은 생명의 본질이고 단순한 생존을 진정한 삶으로 바꿔 놓았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선물이었다. 물론 증오도 있었다. 그러나 사랑도 함께 있었다. 죽음이 있었지만, 생명도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계셨고, 우리가 서로 교제하면서 신성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배신과 시기, 이기심과 질투, 게으름과 교만으로 서로를 할퀴고, 상처내고, 다투고, 싸우고, 헐뜯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죽음의 운명을 재촉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인간이 져야할 운명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 분이 우리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콰이 강의 기적’이라는 영화에서 한 포로가 나와서 간수의 발에 채이고, 손으로 때리고, 결국은 총의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으면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시체가 된 것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그렇게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는데, 그렇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 분은 나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삽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안 포로들은 동료 포로의 죽음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그들의 삶의 자세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의 기운이 있고, 역사가 싹트기 사작합니다. 자기들을 대신해서 죽는 동료 포로를 보면서 그들의 삶이 바뀌고, 원한과 증오와 시기심과 탐욕과 싸움을 버리고 서로를 돌보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성도라면,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변화를 우리도 경험하고 있습니까? 내가 죽는 상황에서도 남을 구하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이 아름다운 포로 수용소의 변화가 지금 우리 공동체 가운데도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것은 결심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결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동료의 죽음을 보는 순간 이것은 거의 자발적인 생명력이 그들 가운데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교회에 공동체의 회복을 원하십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교회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교회는 ‘콰이 강의 기적’과 같은 역사가 지금도 꿈틀꿈틀하면서 무슨 일인가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우리교회 가운데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은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교회 공동체가 변화는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교제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교회의 참모습 중에 하나는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7-11절을 보겠습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이 바로 사랑 자체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야 아! 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구나 하고 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특징 중에 제일의 특징이 바로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옆 사람을 보면서 ‘사랑합니다’ 라고 말합시다.)

마태복음 5장 46-47절에 보면,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라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 사랑입니다. 대상을 가리고 구별하는 사랑은 이방인이나 세리들도 하는 사랑입니다. 하다못해 짐승들도 자기 자식은 사랑하고, 개도 자기 주인을 사랑할 줄 압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시는 사랑은 그런 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 사랑입니다. 요즘 보면 ‘선 긋기 사랑’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랑이요, 세리들 수준의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아서 주는 사랑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 25절 이하에 보면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빌립보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하나였는데, 사도 바울 선생님이 로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회에서 로마로 가서 바울을 돕도록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에바브로디도가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바울 사도를 돕기는커녕 바울을 힘들게만 했습니다. 이 소식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듣고는 원망을 합니다. 바울을 도우라고 보냈지, 누가 자기가 병이 들라고 했냐고,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 제 역할도 못하느냐고 하면서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원망하는 소리로 가득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그를 변호합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도왔다고 변호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변호해 주는 것입니다. ‘그가 그럴 리가 없다고,’ ‘아마 피치 못할 상황이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이런 은혜를 이미 한 번 입었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다가 예수를 믿고 회심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너무나 많은 반대가 있자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자기 고향 다소로 갔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어려울 때마다 바울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를 사도들 앞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변호해주고, 그를 옹호해 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신약시대에 그렇게 드러난 인물이 아니었지만, 그가 없이는 사도 바울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을 세워주고 격려하고 변호해주는 사람이 있었을 때 초대교회는 엄청난 복음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교회도 그런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 반드시 필요합니다. 선을 긋는 사랑은 사랑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방인이나 세리들이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입은 성도들입니다. 그로 인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콰이 강의 기적이 오늘 우리교회에도 필요합니다. 동료를 대신해 죽은 포로, 우리를 대신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인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앞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살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공동체, 사랑의 교제가 우리교회에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교회를 세우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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