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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은 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바르게 살고 싶고, 사람답게 살고 싶고, 의로워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의가 깨어졌을 때 사람들은 흔히 두 가지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하나는 죄를 고백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감춤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고는,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먹었냐고 물었을 때 아담은 하와 때문이라고 하고, 하와는 뱀이 유혹해서 먹게 되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는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지난 주간에 'Total Leadership Forum'에 다녀왔습니다. 듣던 강의 중에 비전과 야망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야망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꿈꾸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강사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자신은 알래스카에서 교수와 주지사의 경제 참모로 있으면서 장차 알래스카의 주지사가 되는 것과 상원의원이 되는 것이 그의 비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너의 비전(야망)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비전은 결코 그 자체로 죄가 되거나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야망이지 비전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조별로 토의를 했습니다. 비전과 야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꿈이 비전이냐 아니면 야망이냐에 대한 개인들의 생각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화중에 꼭 하나님이 주신 비전만 좋은 것이 아니라, 개인의 야망이라도 ‘거룩한 야망’ 즉 하나님을 위한 야망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사실 비전과 야망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라고 할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본인이 가진 야망을 나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마음에서 ‘거룩한 야망’이라는 말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순간적으로 꼬아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를 왜곡시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합리화시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의에 대한 갈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 의에 대한 강한 외침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 외침을 그대로 행하지 못할 때는 의로움이라는 것 자체를 틀어버려서 자신의 불의함을 합리화합니다.

오레곤 주에 여자 교사가 있었습니다. 30년 전 그는 브렌다이스라는 명문 대학의 학생이었습니다. 성적을 늘 A만 받았던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그 당시(60년대) 한창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반전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일에 주도적으로 앞장섰던 학생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이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몇몇 학생들과 함께 학교 건물을 방화했고, 다른 건물을 불사르다가 수배 당하자, 동부에서 서부로 은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반전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열심히 한 마을에 가서 봉사해서 community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봉사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교 선생이 되었습니다. 너무 열심히 가르쳐서 수많은 메달과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안하고 기쁨이 없고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들이 계속되었습니다. 결혼을 하면 이런 불안을 극복될까 싶어 결혼을 했지만, 그 마음속의 고통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정신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와 카운슬러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크리스천 카운슬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카운슬러는 그 분에게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십니다. 우주의 창조자, 그리고 인간에 대한 마지막 심판자이신 그분은 당신을 아직도 사랑하시며 당신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의 죄를 짊어지고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복음을 들은 이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이 자매는 마음속에 평안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법정으로 나갔습니다. 나흘만 있으면 자기 잘못에 대한 법정 시효가 만료되는 상황에서 그는 법정에 출두합니다. 기자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묻자 ‘나는 하나님과 자신 앞에 떳떳하고 싶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현재의 소감을 묻자 ‘너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의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그 갈증을 어떤 사람들은 바르게 맞이하지만, 많은 경우 상황을 twist해서 해석하고, 왜곡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왜 자신을 합리화합니까? 자신이 의로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의(義)’에 대한 문제는 평생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의(義)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하는 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4-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즉 우리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2절),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4-5절은 우리에게 그렇게 쉽게 납득되거나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두 젊은 연인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키워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아기를 갖는 순간부터 입덧을 하고, 몸이 무거워집니다. 출산의 고통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기가 자라면서 부모가 감당하는 일은 정말 큰 것입니다. 하지만 꼭 힘든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를 보면서 부모가 느끼는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일인지 경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맛보는 기쁨이 너무도 커서 아이가 부모에게 할 효도는 이미 어릴 때 다 했다고 고백할만 합니다.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모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모의 수고를 내세우는 스타일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생 했는지 아냐?’ 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부모는 ‘나는 너를 키우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난 이미 너에게서 받을 효도를 다 받았단다.’ 라고 말하는 스타일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1994년 3월 7일 오후 9시 18분 큰 아이(하랑)가 태어났습니다. 병원 분만실에서 아기를 안고 온 간호원으로부터 아기를 받아 안고 병실로 들어올 때의 기분은 지금도 느껴집니다. 예정보다 거의 보름 이상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다 큰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얼굴은 통통했고, 건강해 보였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내 기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돌이 되었을 때 이미 걷기 시작했고, 공원에 데리고 가서 걷는 모습을 비디오에 담아 사진관에 가져가니 편집을 해 주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카셋트에 녹음을 해오면 비디오 테입에 함께 담아주겠다고 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하랑아! 네가 벌써 태어난 지 1년이 되었구나. 엄마와 아빠는 네가 태어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네가 엄마와 아빠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너에게 먼저 말하고 싶구나. 하랑이가 장차 무엇이 될까 생각하다가 아빠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단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야. 아빠는 네가 무엇이 돼든 너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싶다.” 이런 식으로 편지를 써서 녹음을 하고, 그 내용을 테입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7살쯤 되었을 때 그 테입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그 편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론 부모는 자녀에게 수고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위해 감당하는 일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솔직히 돌아보면 모두가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압니다. 만약 자녀가 부모의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가서 ‘저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냐?’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아냐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함으로서 너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빚이 아니야. 네가 갚으려고 한다면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겠니. 평생 갚으려고 해도 그 빚은 갚을 수 없는 거야. 그것은 빚이 아니야.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해서 한 일이기 때문이지.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 그리고 너를 사랑하면서 나는 이미 너무나 큰 기쁨을 맛보았어. 라고 우리 주님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빚의 관계로 보면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자녀는 빚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해서 낳은 아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먹고 자라야 할 마땅한 권리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로 계속 간다면 그 관계는 너무나도 풍성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팽팽하게 맞서고, 손익계산을 하다보면 양자 간의 관계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기꺼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빚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빚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갚아야 할 짐이 아니라, 누려야 할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갚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비유에서처럼 일만 달란트나 되는 것입니다. 평소 일용직 근로자가 180000년 동안 벌어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것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아니 때로는 어려운 시간을 내어서라도 전화를 걸어 대화를 하고, 안부를 묻고, 감사와 기쁨을 나누는 것처럼 하나님과도 동일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4절과 5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말씀은 일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일함으로 그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행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히 율법을 준행할 것을 요구했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천하게 여기고,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기준에 맞는 율법을 지키고는 마치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복을 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아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말씀은 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일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응답할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정말 고맙습니다.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살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주님은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기독교가 행함의 종교가 아니고 믿음의 종교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그 근본에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함을 강조하지 않으면 사람이 방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면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2-3절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감사하고 신뢰함으로 나아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길을 따라 갔습니다. 그것은 행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떤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요구할만한 자격을 얻고, 그로 인해 의를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감사하고, 감격함으로 그 분을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나이가 100세가 되고, 아내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뢰와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과 신뢰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맛보게 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가 건강하고 자신감 있게 자란다는 것은 이미 학자들이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역시 그 분의 사랑을 느끼고 감사하며 믿음과 신뢰로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얻기 위해서는 그 분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있고, 그 감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빚을 갚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에 응답하는 성도의 삶 속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과 은혜 가운데 참된 의를 이루어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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