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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인간의 죄들을 낱낱이 파헤치며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간 동안 두 종류의 죄인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흔히 말하는 세상적인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성적 타락을 일삼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도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윤리를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남을 판단하는 죄를 범합니다. 자기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깊이 보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누구나 동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죄가 드러났고, 다른 사람은 속에 숨어있을 뿐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끌고 왔지만, 그들도 그들 안에 동일한 정욕의 노예가 되었음을 그들은 결국 발견했습니다.

오늘은 종교인들의 죄를 언급합니다. 첫 번째가 이방인의 죄이고, 두 번째가 도덕주의자들의 죄이고, 세 번째는 종교인들의 죄입니다. 이 세 종류의 죄인들 중에 누구의 죄가 가장 클까요? 로마서는 이에 대해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첫 번째 이방인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을 그들을 내어버려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도 그들을 내어버려 두셨습니다. 두 번째 도덕주의자들의 죄에 대해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와 용납하심을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실 것인데, 뭐 그렇게 죄 지은 것을 가지고 심각하냐고 하는 태도입니다. 세 번째 오늘 보는 종교인의 죄에 대해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23절)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게 하는 죄를 범한다고 했습니다(24절). 그러니 세 번째 죄인이 가장 악한 죄인입니다. 종교를 이용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 사무엘상에 보면 사울 왕이 두 번의 전투를 합니다. 한 번은 블레셋과의 전투였고, 다른 한 번은 아말렉과의 전투였습니다. 이 두 전투에서 드러낸 사울 왕의 잘못으로 인해 그는 왕의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무엘이 드려야 할 제사를 드렸고, 모든 생명 있는 것을 다 멸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 안에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명예와 위신을 세우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욕심이 있었습니다. 즉 그는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성전(聖傳)을 하면서도 자기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모양은 신앙적이었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치르는 전투였지만, 실제는 자기의 의지와 자기의 야망을 채우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과 대조됩니다. 다윗은 자기 정욕으로 부하를 죽였고, 남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그것도 용납될 수 없는 죄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죄를 로마서 1장 18-32절에서 말하는 이방인의 죄에 해당한다면, 사울의 죄는 종교인의 죄, 즉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를 내세우려는 매우 악한 죄였다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가장 치열한 전쟁이 무엇입니까? 종교전쟁과 인종간의 전쟁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교 전쟁은 끝도 없고, 자비도 없습니다. 무참히 죽이고, 용서도 없고, 이해도 없고, 관용도 없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선이 그 가운데 찾을 수 없습니다. 적은 곧 사단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싸우는 전쟁은 배부르면  끝납니다. 하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치루는 전쟁은 끝이 없습니다. 함께 죽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 세계의 구조를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갈등과 전쟁의 구조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좋게 표현해서 문화전쟁이고, 더 강도 있는 표현으로는 종교전쟁이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 회심하기 전에는 그의 이름을 사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때 사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에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이 신흥종교의 주동자들을 색출해서 다 잡아 죽이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불철주야 달려 다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고 죽이는 일에 제일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죽는 자리에서도 찬성하는 투표를 던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기독교인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의 사이비 종교의 물결이 유대 사회를 덮칠 것이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말 옳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잘 깨우쳐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경우 사람들은 전혀 맞지 않는 발상을 합니다. 씨를 말릴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고, 전쟁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일입니까? 신앙은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모독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악을 행합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7-20절에는 유대인들의 좋은 점을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 천 년 동안 지켜오던 민족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율법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압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오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들이 되고, 더 나아가 소경의 인도자이며,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도리어 자신들은 그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2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지킵니다.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우상을 가증이 여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여자들에 대해 바른 태도를 갖지 않습니다. 모세의 법을 오용해서 자기 아내에 대해 싫증나면 아무런 대책 없이 부인과 이혼을 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오용합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 의하면 모세는 부부가 이혼할 때는 이혼 증서를 주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은 이혼 당하는 여자가 창녀가 아님을 증거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부가 비록 이혼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부인이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보호를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을 이 율법을 오용했습니다. 이혼 증서만 써 주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있을 때 그들은 여자를 버리는 수단으로서 이혼 증서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표면상 간음을 행하지 않았어도, 율법을 오용함으로, 즉 그들의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남용하는 더 큰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적어도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이윤이 크게 남기면서 돈을 빌려줍니다. 결국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50년 마다 희년제도를 만들어 빈부의 차이를 극복하도록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 희년제도가 시행된 적을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적어도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탐심도 우상숭배라고 하는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남의 것을 탐내고 시샘하는 것도 결국 우상숭배의 연장입니다. 하나님보다 그 마음에 더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모두 우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진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진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외모로는 그럴듯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탐욕과 시기와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안에 들어갈 틈을 찾지 못하십니다. 진실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너무 피곤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잡니다. 주님께서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합니다. 이 때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것이 바로 진실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속에는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몸이 따라주지 않을 뿐입니다. 몸이 회복되면 기도할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제자들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제가 헌금 기도할 때는 가능한 빼놓지 않고 하려고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 가지 형편으로 드리지 못한 성도님들이 있으면 그 분들에게도 동일한 은혜와 복을 주시옵소서."하는 기도입니다. 때때로 헌금을 하지 못한 성도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나는 헌금 안 할 거야'라고 생각하고 안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하고 싶었습니다. 기꺼이 힘닿는 데까지 감사의 마음을 헌금으로 표현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만약 목사가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헌금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한다면 목사가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도 동일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정말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종교심을 믿지 못하십니다. 그들의 종교행위는 모두 위선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앞에 나아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 가운데는 주님의 엄청난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복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미국 서부에 상당히 큰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두 파로 나누어졌습니다. 한 부류는 교회에 남아있고, 다른 한 부류는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교회건물을 놓고 재판을 했습니다. 재판 결과 두 그룹의 사람들이 공평하게 교회 건물을 사용하도록 판결이 났습니다. 그런데 본래 교회를 점유하고 있던 그룹의 사람들이 건물의 모든 키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주일날 와 보니 모든 교회의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쪽 그룹의 사람들에게 열쇠를 달라고 하자 그들은 서로 누가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핑게를 대다가 마지막에 할 수 없이 찾은 양 문을 열어줍니다. 매주 동일한 방법으로 예배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예수를 믿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들의 탐심의 우상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욕심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아갑니다. 백성들 앞에서 자기의 위신을 세우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울 왕과 같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설교시간에 굳이 하고 싶지 않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닌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종교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의 죄는 이방인들의 죄와 도덕주의자들의 죄보다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악한 죄 가운데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25절 이하에 보면 할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할례 받은 사람만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사람은 조금 부족하고 죄를 범해도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제 아무리 애를 써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할례 받은 사람끼리만 이야기하고 상종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과는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렇게 할례 당 그룹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이 그룹 안에는 아무나 들어오지 못합니다. LA에 있는 어느 교회처럼 문도 열지 못하게 합니다. 오래 오래 애를 먹이다가 들어오게 합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아마도 주님께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면 박수를 치면서 환영할는지 모릅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가지고 할례당을 지켜갑니다. 그 안에는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교회를 더럽히는 이들로부터 지켜져야 한다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자기들의 할례 당을 지키려는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조차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교회 안에도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교회 안에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까? 할례 당끼리만 모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끼리만 있으면 됩니다. 누가 소외당한 사람입니까? 내가 찾아가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나로부터 소외당하는 사람들입니다. 학교는 학생들끼리 모이는 곳입니다. 가정은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직장은 직장 동료들끼리 모이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주님의 자녀들이 한 가족이 되어 모이는 곳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이 모여서 매일 밥 먹고 식사하는데, 시간 없다고 아들하고는 한 마디도 안하고 딸하고만 하는 가장이 있습니까? 약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 가족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가정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약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에게 더 다가가는 본능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왜 교회가 나뉘어져야합니까? 왜 얼마 전까지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나뉘어져서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대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것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관심을 가지며 서로 위하여 기도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예배가 끝나고 난 후에도 서로 위해서 손을 붙들고 기도하는 모습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약한 점을 감당하고 세상에서 힘들고 지친 영혼들이 주님 앞에 나아와 함께 기도하며 찬송하며 힘을 얻는 모습이 많아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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