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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가장 소중하게 읽혀지던 성경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사랑했고, 로마서를 통해 변화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로마서를 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또 복음의 강력한 도전을 감당하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로마서를 설교하려고 했을 때 저에게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 말씀을 우리가 잘 나눌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전하는 목사에게도 큰 짐이 아닐 수 없었고, 듣는 성도님들에게도 많은 준비가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가 가장 힘든 부분이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죄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지나가면서 누구나 최소한 한 번은 걸리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최소한 단 한 번도 마음의 걸림이 없다면 그가 말씀을 잘못 들었거나, 목사가 말씀을 잘못 전한 것일 것입니다. 아마도 목사가 말씀을 제대로 전한다면 말씀이 주는 찔림과 아픔을 경험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우리 모두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몸에 질병이 있다면 제대로 진단을 해서 병에 맞는 처방을 받아야 합니다. 지난 달 한국에 한 병원에서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수술을 받은 두 환자의 차트가 바뀌는 바람에 각각 다른 곳을 수술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다고 합니다. 한 환자는 위암초기 환자인데, 갑상선 수술을 받고, 다른 갑상선 환자는 위암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풍성한 삶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잘 진단하고, 거기에 맞는 처방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적 열정만 있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목사지만, 요즘도 때때로 ‘내가 잘못 생각했었구나!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하고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회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하게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진단해야 합니다. 당분간 듣게 되는 말씀은 우리들의 죄를 지적할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아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플 땐 내가 수술대에 올라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 밖에는 우리 인생의 길이 없구나 하고 느끼고 고백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구주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밖에 우리 인생의 진정한 생명의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1장 18절부터 32절에서는 주로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들을 지적합니다. 우상숭배와 성적인 타락, 그리고 수많은 도덕적 타락의 항목들을 지적합니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우상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깁니다. 과거에는 힘없는 고목나무에 제물을 바치고, 스스로 만든 이방 신상을 섬기는 인간의 모습을 오늘날은 일하지 않고 횡재를 꿈꾸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동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확률과 운에 자신의 운명을 맡깁니다.

로마 당시의 성적인 타락은 가장 바르게 살아야 할 지도자들이었던  로마황실에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타락은 오늘날의 성적 타락에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들을 행하고, 여자도 역시 동일한 죄들을 범하였습니다. 권력과 부귀와 세상적인 지위로 인해 그들은 더 이상 빈곤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함은 그들의 삶을 결국 황폐하게 했습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만족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인생의 기쁨과 소망을 얻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권력의 아편에 중독이 되어 더 많은 권력과 성도착에 빠져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와 인생이라는 참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갔습니다.

또한 인간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불의와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수군수군함, 비방, 교만, 자랑, 부모를 거역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마음에 두기 싫어할 때부터 생기게 됩니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도덕적으로 천박하고, 종교적으로 타락했으며, 윤리적인 문제들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고 들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속으로 은근한 만면의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도덕적으로 천박하고 윤리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로마 황실로부터 시정잡배에 이르기까지 온갖 죄로 뒹구는 천한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도덕주의자들입니다. 철학자들 중에는 ‘스토아학파’ 사람들이 금용주의자들이었고, 종교인으로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으며,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해 했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도 바울의 이런 말씀들을 들으면서 ‘맞아! 맞다고. 정말 잘도 말한다’고 하면서 맞장구를 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를 보면서 늘 염려하고 한탄하는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세상이 썩어도 너무 썩었다고 근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의로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를 보아도 소망이 없고, 경제계를 보아도 소망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더욱이 요즘은 과학자들까지도 거짓이 난무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 종교는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교회대로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다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절과 3절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3절을 더 읽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본문에 ‘같은 일’이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오히려 동일한 죄를 범하면서도 하나 더해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죄를 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마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우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을 우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 잘난 것 같지만, 사실 우리도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여자가 간음 중에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말씀하기를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소 가운데 무슨 마음이 있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죄인의 축에 끼지 않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자랑이 있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나는 이런 여자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여자는 이 땅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라고 하는 오만이 그들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조차도 돌로 이 여인을 치지 못하고 모두 돌을 놓고 돌아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던 여자를 잡아온 유대인들로 하여금         주님은 그들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자신을 보고 나니 자신도 별 수 없는 인간이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도무지 돌을 들어 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인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전에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여인은 타락한 여인, 세상을 더럽히는 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을 바로 보고 나니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유대교의 가장 신실한 삶을 살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이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서로로 정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누구를 옳지 않다고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 당시 그렇게 깨끗하고 정결하게 살던 바리새인들도, 서기관들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그 여인 안에 내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동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의 추한 모습만을 보아왔는데, 어느 순간 바로 그 모습이 나에게도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 안에 옳지 않음을 보면서 침묵만 하고 있으라는 말인가요? 성도는 비판하기 전에 함께 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내 안에 숨어있는 수치스러움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아파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함께 부끄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아직도 한국은 황우석 교수의 일로 시끄럽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갖습니까? 황우석교수와 연구원들, 그리고 미즈메디 병원장 등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가슴이 뜨끔하지 않으셨나요? 오랜 고난의 역사 속에서 살면서, 또 근대사속에서 일본의 압제 아래 살면서 원칙과 기준 보다는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고 싶지 않은 우리네 마음이 모두 이 사건 안에 담겨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면 명예도 있고, 지위도 있고, 살만큼 살텐데 뭐가 그렇게 더 필요해서 그런 거짓말을 했어야 했을까요? 하지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를 탓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보다 먼저 할 것은 함께 아파하고 우는 일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우리를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는 비판적 기능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사회의 한 단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비판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 비판은 장래의 방향을 찾는 면에서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이 사회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내 몸속에도 이미 아담과 하와로부터 이어오는 거짓과 위선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먼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아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탈무드가 어떤 책인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젊은이가 탈무드를 연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유대의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유대 랍비는 당시 스승이기도 하고, 재판관이기도 하고, 또 어버이가 되기도 하는 매주 존경받는 존재였습니다. 그 앞에 가서 ‘탈무드’에 대해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 하니까         그럼 먼저 탈무드를 배울 자격이 있는지 시험을 해 보겠다고 랍비가 말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줍니다. 두 아이들이 집에서 굴뚝 청소를 하게 되었소. 그런데 두 아이 중 한 아이는 얼굴에 그을음을 잔뜩 묻히고 내려 왔는데, 다른 아이는 얼굴이 말끔한 채 굴뚝에서 내려 왔소. 이 두 아이 중 누가 얼굴을 닦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젊은이는 너무 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였습니다. 그야 물론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씻겠죠. 젊은이의 대답을 예상이나 한 듯 랍비는 냉정하게 말하였습니다. 역시 당신은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없소.

랍비의 설명입니다. 두 아이들이 굴뚝 청소를 마치고 지붕에서 내려 왔소. 깨끗한 아이는 얼굴이 검은 아이를 보고는 '내 얼굴도 검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 얼굴이 검어진 아이는 얼굴이 깨끗한 아이를 보고 내 얼굴도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오. 우리는 상대방을 보면서 나를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부족한 것을 보면 나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저렇게 부족하겠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내 얼굴을 씻는 것입니다. 동일한 눈높이로 보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할 때는 그들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과 함께 할 때는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다 주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기초여야 합니다.

랍비는 웃음을 띠면서 앞서와 같은 내용을 다시 물습니다. 두 아이들이 굴뚝을 청소했는데,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고, 한 아이는 얼굴이 더러워졌는데, 과연 어느 아이가 얼굴을 닦는다고 생각하시오?  젊은이는 자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닦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이번에도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말합니다. 역시 당신은 탈무드를 공부할 만한 자격이 없는 것 같소이다. 젊은이는 너무도 낙심하여 지친 표정이 되었습니다. 랍비님, 도대체 탈무드에서는 어떤 대답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랍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두 아이가 똑같이 굴뚝을 청소했는데 어떻게 한 아이는 깨끗하고 한 아이는 더러워질 수가 있겠소? 두 아이가 다 얼굴이 더러워졌을 테니 둘 다 씻을 것이오.

굴뚝 청소를 하고 난 후 한 아이의 얼굴은 더럽고, 다른 한 아이는 깨끗했다고 하는 전제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답을 찾으려면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것이 성경의 답입니다.

지난주에 예배시간 지각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어쩌면 그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목사 참 설교 잘한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예배 시간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한번쯤은 목사가 그런 설교도 해야지’ 하고 생각하신 분들이 없으신지요?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한 번도 지각해보지 않았다고 해도 그러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심 직하게 예배하나요? 예배를 전심으로 드리지 못한다면 지각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남의 허물을 뒤에서 수군수군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 남 얘기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 어디 있습니까? 혹 있다고 해도 옆에서 수군수군하는 말을 즐겼다면, 이는 동일한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10년 전쯤 한국에 한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료 전도사님과 함께 교회 일로 차를 함께 타고 움직일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 여름에 차를 몰고 나가면 거리에서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자들을 더러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함께 가던 전도사님께서 꼭 한 마디씩 합니다.
‘세상이 말세가 돼서 쯧쯧쯧 --’라고 하십니다. 제 맘 같아서는 그냥 슬쩍 보고 지나가던지, 아니면 ‘주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하고 지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 마디 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전도사님께서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요.’

교회 한 번도 지각하지 않고 지각하는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 보다는 열심히 일찍 오려고 했는데 오면 지각하고, 오면 지각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훨씬 더 낫습니다. 남을 흉을 한 번도 안 봤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것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남 얘기를 해 놓고는 집에 가서 회개하면서 주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께요. 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흉도 안보고, 지각도 하지 않으면서 남을 비판하지도 않으면 더 좋지만, 잘못하는 것보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의 죄를 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고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인은 비판 안하는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참 부족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굳이 자기는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결국 망하는 길입니다. 요즘 교회가 많이 비난을 받습니다. ‘아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얼른 달려가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 그렇게 말해서/행동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잘 몰랐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정말 그러면 안되는건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고백해 봅시다.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목사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돼야 하지 않냐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목사가 그래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는 사람 아니냐고, 목사는 속도 없는 줄 아십니까? 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진짜 성도는 자기의 허물을 먼저 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듯이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성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허물을 더 크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늘 거울을 보는 사람은 자신을 살피는 사람입니다. 작은 먼지가 몸에 묻어도 금방 발견하고 깨끗하게 합니다. 늘 성경을 가까이 두고 영적인 거울인 성경을 통해 자신을 보는 사람은 자기의 결점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의 결점을 볼 시간이 없습니다. 예수를 잘 믿을수록 자기의 결점을 더 많이 보고, 그래서 더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또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이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정적으로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힘쓰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 10년 20년 혹은 30년 믿다보면 내가 뭔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예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을 알고,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정상적인 성장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3절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 봅니다. “이런 이를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정말 실망스런 사람을 볼 때, ‘저게 바로 내 모습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거의 맞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내 허물을 보고 내 눈 안에 들보를 빼는 고통이 있을 때, 나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성도가 될 때 진정한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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