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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이 때가 되면 성탄절을 많이 기다렸지만, 요즘은 전과 같이 성탄절에 대한 기대가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나이탓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시대가 워낙 많이 발전해서 성탄절에만 누릴 수 있었던 놀이와 즐길 것들이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탄의 기쁨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고들 많이 말하지만, 만약 잃어버린 성탄의 기쁨이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라면 굳이 그런 기쁨을 찾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 누렸던 기쁨도 진짜 성탄의 기쁨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3절
본문 13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아! 저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구나!’라고 느끼면서 감동에 젖는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가 왜 성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탄이 나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이 나를 위한, 나를 향한 사건으로 고백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성탄의 참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성탄이 바로 나를 위한 사건임을 고백함으로 기쁨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9절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9절). 이 말씀은 마태의 회심과 제자 됨에 대해 지나칠만큼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마태가 세관에서 일을 하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을 따랐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너무도 쉽게(단순하게)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뭔가 어떤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당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창녀를 지칭하는 죄인들과 동일하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구원의 과정에 아무런 언급이 없음으로 인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본문은 침묵 속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가 아주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마태의 변화로부터 그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의 이름은 마태였습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그는 당시 가장 악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인간이었습니다. 물론 세리들 중에도 선한 사람이 있었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가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마태가 삶의 변화를 언급하지 않는 것을 봐서는 삭개오와는 달리 아마도 선한 세리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의도를 지나치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마태의 삶에 대한 성경의 침묵은 성경이, 아니 예수님께서 구원에 관한한 마태의 삶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그가 어떤 삶을 살았든 상관없이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본문은 마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가 “레위라 하는 세리”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본문과 마가복음에서는 그 자체로 그가 세리인 것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세관에 앉아 있으니 세리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확하게 지목해서 세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마태는 단지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한 영혼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남이 우러러볼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도, 아니면 좀 부족하고 내놓을 것이 없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구원 받아야 할 동일한 존재들입니다. 마태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철저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마태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구원의 자격, 구원의 근거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마태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의 죄짐을 감당하신 사건에 근거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태의 죄의 형벌에 대한 값을 지불하셨고, 마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값을 요구받지 않고 구원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9절 말씀이 하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9절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 구원을 맛볼 때 우리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10절
9절은 10절로 자연스럽게 넘어갑니다. 마태를 통해 일어난 이런 구원의 사건은 10절에서 마태의 잔치로 이어집니다. 이 잔치는 아주 유명한 잔치입니다. 이 잔치를 흔히 마태의 잔치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마태의 잔치를 일컬어 ‘불가시적인 구원 사건을 가시적인 사건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잘 모릅니다. 구원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그냥 일어나 따른 것밖에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조차도 내가 한 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10절의 사건, 마태의 잔치입니다. 물론 그것조차도 구원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구원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10절 말씀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구원은 무엇이며, 구원은 우리에게 어떤 사건을 만들어 냅니까?

1. 구원은 기쁨의 사건입니다.
우선 마태의 식사가 보여주는 첫 번째 구원의 모습은 기쁨입니다. 기쁨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기쁨이 있다고 그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기쁨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의 신분과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의 형편과 관계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구원 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2. 구원은 자원하는 마음을 갖게합니다.
마태는 의무감으로 이 잔치를 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부담감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그는 전적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결정으로 기꺼이 식사의 교제를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동기로 자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를 섬기게 됩니다.

3. 구원은 나눔과 하나됨을 가져옵니다.
구원의 사건을 구원 받은 자와 이웃을 하나 되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무한한 나눔의 은혜를 갖게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나눔의 일들은 아주 유명한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45절은 초대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마태는 자기 것을 나눠 잔치를 벌이며 함께 나누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성경의 모습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도출했다고 합니다. 자본가들을 없애서 자기 것이 없이 함께 분배하는 논리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면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에는 구원의 진정한 역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의 구원 사건은 그로 하여금 나눔과 하나 됨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서로 함께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이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은 누구의 집이든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있었고, 또 이런 비난을 하는 것으로 봐서 그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마태의 잔치에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들 안에 진정한 나눔과 하나 됨의 은혜가 일어났습니다.

4. 구원은 관계의 회복을 가져옵니다.
구원의 사건은 관계의 회복을 가져옵니다. 세리라고 하는 비난과 천시, 창녀로 대표되는 죄인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5. 구원은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리와 죄인들의 삶에 대해 염려합니다. 이런 잔치가 그들의 삶을 그대로 용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입니다. 이런 염려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누리기 못하게 합니다.

마침 지난 금요일 어느 구역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예수를 믿은 후에 성격이 변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성격과 성품을 구분해서 말하면서 논의를 했는데, 아무튼 성격은 잘 변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이 모아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그런 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동기는 우리의(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삶의 변화가 잘 안 일어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변화에 대한 갈증이 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이런 삶의 변화에 대해 갈증이 많습니다. 예수는 믿지만 삶은 잘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의 변화를 은근히 촉구합니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잔치 안에 삶이 곧 변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예수를 믿음으로 생기는 기쁨과 감사, 자원함, 나눔과 하나 됨, 관계의 회복 등이 곧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를 믿으면서 구원의 본질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는가? 불가시적인 구원의 사건은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가시화되었는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마태가 경험한 구원은 무엇이며, 내가 경험한 구원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구원받음으로 인하여 나타난 나의 삶에 구체적인 가시적인 현상이 없다면 그 가시적인 현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시 9절 말씀으로 돌아가서 과연 내가 받은 구원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교회에서 설교 준비를 하는데, 조금 힘들어서 일찍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본당에서는 성가대 칸타타를 연습하고 있고, 2층에서는 다음 주일에 할 교회학교 특송 준비를 하고 있고, 현관에서는 성가대 연습을 위해 온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떠들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런 일로 인해 방해를 받지 않았는데, 어제는 왠지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둘어 주보를 마치고,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집에 가면서 머리는 더 아파오고, 몸은 몸살에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피곤하여 졸립기도 하고, 설교 준비는 계속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원고를 정리하긴 했지만, 설교 내용 안에 어떤 생명력 있는 힘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토요일에는 설교 준비를 위해 가급적 말을 적게 하려고 하고, 농담도 적게 하려고 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마음이 자꾸 뜨는 것 같아 깊은 생각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는 그런 저의 의도가 저의 마음을 정도 이상으로 계속해서 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만들어 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말씀을 받는 시간은 굉장히 기대되고 기쁘고 흥분된 시간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모든 피곤과 몸살 기운, 그리고 머리 아픈 것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아는 순간 변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능력도, 지혜도, 은혜도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자원함과 나눔과 하나 됨, 그리고 관계의 회복과 삶의 변화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자꾸 원론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자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목사가 목사의 아이디어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11절
11절에 가면 바리새인이 마태의 잔치에 참여한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라고 하신 말씀은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회복을 촉구하면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 때부터 이스라엘의 멸망 무렵까지 선지자 사역을 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는 가장 왕성한 국력을 자랑하던 시대였지만, 여로보암이 죽은 후 30년 동안 6명의 왕이 모반을 통해 정권을 잡으면서 나라는 피비린내 나는 혈투로 나라가 이어갔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제사)를 잘 드렸지만, 동시에 그들 자신의 육체적 탐욕과 물질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방 신도 섬겼습니다. 그래서 긍휼과 제사, 즉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사실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긍휼이 없는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긍휼 없는 제사, 즉 주님의 사랑이 없는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즉 그들의 제사에 긍휼이 없다면 그들의 제사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 너희가 이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세리와 죄인들 앞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창피를 주는 장면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긍휼이 없는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이 없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을 말씀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 의인이 있고, 죄인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소경같은 사람은 주님의 관심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고백이 없는 성도, 그는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소경 같은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소경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새인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것을 부인하면 부인하는 순간 그 덫에 빠집니다. 부인하는 것 자체가 곧 바리새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알콜 중독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자신이 알콜 중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알콜 중독의 정도가 아니라 본인이 그것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인정하면 그 때부터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으면 그에게는 치료의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그것을 말씀합니다. 인간은 이 점에 있어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는 세리와 죄인의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의 자리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마음을 회개하고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고 나면 곧 거기에 바리새인의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다시 세리와 죄인의 자리로 가야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겸손히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은혜를 받고 나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바리새인의 자리로 다시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덧입혀 주신 그 의가 우리를 덮을 때 우리는 드디어 예수께서 허락하신 진정한 구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이런 구원의 삶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런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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